7. 남자의 첫사랑은 무덤까지
(7/95)
7. 남자의 첫사랑은 무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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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남자의 첫사랑은 무덤까지
2022.04.22.
차 안에 적막이 흘렀다.
소유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도 그다지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태오는 자꾸만 입을 꾹 다문 소유를 힐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숍 가기 전에 아버지 병원에 먼저 들르고 싶은데.”
결국 태오는 이 사태의 원인을 찾지 못한 채 적막을 깼다.
그러자 소유가 고개를 돌려 태오를 바라보았다.
“거긴 왜요?”
“그래도 인사는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내가 사위라고.”
“아, 네. 고마워요.”
좋아할 줄 알았는데 시큰둥한 반응이 돌아왔다.
지금까지 태오를 감히 이런 식으로 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공연히 운전기사가 태오의 눈치를 보았다.
“꽃이랑 과일은 내가 미리 사 뒀어.”
“네.”
태오는 화가 난다기보다는 가슴이 답답했다.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뽀얀 옆얼굴을 손으로 감싸 쥐고 제게로 끌고 오고 싶을 만큼 안달이 났다.
이유가 무엇이든 얼른 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왜 그러지?”
“뭐가요?”
“왜 화가 났지?”
“제가 화가 날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전혀 화낼 일이 없는데 왜 화를 내는 거냐고.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좋기로 유명했던 태오도 소유의 섬세한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태오 씨.”
태오의 고민이 깊어져 갈 때쯤, 다행히도 소유가 입을 열었다.
“누구예요, 아까 그 여자?”
‘아까 그 여자’라 함은 아까 로비에서 만난 세리를 말하는 걸까.
소유에게 집중하느라 세리와의 마주침도 잠시 잊었던 태오였다.
“클로버 그룹 임세리.”
불필요한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소유의 마음을 알고 싶었던 태오는 대충 사실만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소유가 황당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황당한 건 태오도 마찬가지였다.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오히려 더 화를 돋운 것 같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요? 내 말은 두 분이 무슨 사이냐고요.”
그 질문엔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세리와의 관계를 딱 잘라 정의하기 어려웠다.
집안 간의 교류로 어릴 적부터 알고 지냈다고 했지만, 딱히 무슨 ‘사이’는 아니었다.
친구도, 각별한 사람도, 그렇다고 앙숙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그저 주변인이었을 뿐이다.
굳이 말하자면…….
“그냥 아는 누나?”
무언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소유는 그러한 망설임이 거짓말을 위한 준비로 느껴졌다.
잠잠해진 줄 알았던 심정이 다시 널뛰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자신을 무시하는 세리의 태도와 태오의 목소리가 오버랩되었다.
애초에 준 적도 없는 마음이지만, 내동댕이쳐지는 듯 비참했다.
그가 들으면 이상하게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현재 소유의 마음은 그랬다.
“……맞네. 첫사랑.”
“뭐?”
소유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제 보니 실연의 아픔 때문에 나를 선택한 거군요?”
소유의 말이 도통 이해되지 않는 태오였다.
“나야말로 적당히 이용당해 주고, 떨어져 나가면 돼요?”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러면서 왜 자꾸 사람 헷갈리게 잘해 줘요! 나만 우스워질 뻔했잖아요!”
화가 난 나머지 얼굴까지 달아오른 소유가 다다다 태오에게 쏘아붙였다.
“아빠 병원 가는 것도 그래. 뭘 그렇게까지 사위 역할에 충실해요? 괜히 심란하게.”
어찌나 흥분했던지 온 차량이 쩌렁쩌렁 울려 퍼질 정도였다.
차 안에 다시 적막이 흘렀다.
다만 아까보다 다소 더 난감한 적막이었다.
소유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제 돌발적인 행동에 입을 틀어막았다.
“방금 제 목소리가 좀 컸나요?”
“응. 무지.”
조곤조곤한 태오의 대답에 소유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어졌다.
화를 냈다.
화를 내면 안 될 이유로.
하지만 방금 전 일은 저조차도 당혹스러울 정도로 돌발적인 행동이었다.
그러고 보니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 요즘처럼 감정에 솔직한 적이 없었다.
태오의 앞에만 서면 화가 나면 화가 나는 대로, 좋으면 좋은 대로 숨김없이 표현하게 된다.
내내 방어적이던 태도가 적극적으로 변하는 유일한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태오가 절대 만만한 사람은 아닌데.
오히려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대단한 사람인데.
왜 당신은 자꾸만 애써 걸어 잠근 빗장을 열어 버리는 걸까.
나는 더 이상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기 싫은데.
“아무튼 제 말의 의미는, 저에게 너무 잘해 주지 말라는 소리예요.”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그야…….”
나 설마 이 남자가 진짜 좋아지고 있는 걸까.
그것만은 정말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야, 당신은 첫사랑을 아직 못 잊었으니까요.”
“내가 첫사랑을 못 잊었다는 게, 너에게 나쁘게 대해야 하는 이유가 되나?”
이 남자에게 사랑까지 요구하면 안 되는 거잖아.
설령 그에게 사랑 한 톨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나에겐 따질 자격조차 없는데.
“도대체 왜 그래? 아까 임세리랑 무슨 일 있었어?”
당신의 첫사랑에게 이 결혼의 내막에 대해 직접 들었노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소유는 시선을 피하고서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저 멀리 아버지의 병원이 보일 때,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누구나 첫사랑과 결혼하길 바라잖아요?”
대화의 방향이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갔다.
영문을 모르는 태오는 소유의 감정선을 따라잡기 힘들었다.
“안 그런 사람도 있나?”
한참 후에 태오가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그 첫사랑이 바로 너라고, 그래서 난 지금 몹시 벅찬 상태라는 사실은 섣불리 고백하지 못했다.
아직 과거의 인연에 대해서 기억하지 못하는 소유에게 갑작스러운 고백은 부담만 될 뿐이다.
그녀의 새로운 짐이 되고 싶진 않았다.
태오는 그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마음을 억누르는 것엔 익숙했다.
소유가 사실을 알아도 도망치지 않을 때쯤, 고백할 요량이었다.
힘들겠지만 버텨 보겠다.
“나 또한 당연히 그렇지.”
서로의 속마음을 모른 채로 주고받는 진심은 껍데기만 있을 뿐, 공허했다.
솔직한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면서, 정작 그가 진짜로 솔직하게 대답하자 소유는 가슴 전체가 찌르르해지는 걸 느꼈다.
“네.”
그 사람은 참 좋겠다.
당신의 첫사랑일 수 있어서.
문득 그런 말이 떠올랐다.
남자의 첫사랑은 무덤까지 간다던 말.
그럴 자격도 없는데, 입안이 쓰게 느껴졌다.
* * *
“아빠.”
평소보다 애정이 담긴 목소리로 아버지를 불러 보았다.
아버지는 오늘도 미동조차 없었지만 말이다.
태오는 꽃다발과 과일바구니를 든 채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소유는 간병인을 애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간병인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직 의식은 없으세요. 의사 선생님은 현 상태가 유지되는 것만으로도 정말 다행이라고 하더라고.”
덧붙여 간병인은 사모님이 한 번도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귀띔해 주고서 병실 밖으로 나갔다.
“아빠, 나 왔어요.”
아버지의 시간은 사고 이후로 멈춰 있다.
얼굴 근육도 그대로 굳었다.
아버지가 방긋 웃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누군가는 허황된 바람이라 했지만 소유에게는 살아 있는 가장 큰 이유였다.
소유에게 모든 것을 주고, 이 세상에서 소유를 가장 사랑하던 아빠가 있어 여태까지 버틸 수 있었다.
“요즘 바빠서 자주 못 왔지, 미안해.”
소유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연달아 떨어졌다.
보는 이로 하여금 아픔을 자아내는 모습이라 태오는 저린 손에 힘을 주어야 했다.
“인사시켜 줄게. 나랑 결혼할 사람. 강화 호텔 부사장 강태오 씨야.”
태오는 침대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간병인이 놓고 간 깨끗한 수건을 집어 들었다.
“나 곧 결혼해. 갑작스러워서 놀랐지?”
태오는 양복을 걷어붙이고 소유 아버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기 시작했다.
“아빠, 나 결혼하면 신랑보다 더 멋진 옷 입고 나랑 같이 걸어갈 거라고 했잖아. 근데…….”
차오르는 감정을 누르고 또박또박 말을 내뱉던 소유의 시야에 한 박자 늦게 태오의 행동이 들어왔다.
아마 그에겐 처음일 테다.
누군가의 얼굴을 손수 닦아 주는 일.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소유가 태오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태오 씨가 이걸 왜…….”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잖아.”
그가 고맙고, 그가 원망스러웠다.
이렇게 잘해 주면서, 좋아하면 안 된다니.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럴 땐 별로 필요가 없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당신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
분수도 모르고 들이닥친 폭풍의 중심엔 당신이 있다.
“하지 마요.”
“싫어.”
“하지 말라니까.”
“하고 싶어.”
태오와 실랑이를 하던 소유가 이윽고 아이 같은 커다란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
태오는 소유를 세게 안아 품에 넣었다.
“안아 주지도 마.”
소유가 태오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너 왜 아까부터 나한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해.”
태오가 달래듯 소유의 등을 토닥였다.
“첫사랑이 이루어지길 바란다며. 그럼 뭐라도 하게 해 줘야 할 거 아니야.”
제 울음소리가 너무 컸던 나머지 소유는 뒷말은 듣지 못했다.
태오는 제게 오롯이 기댄 이 작은 체온이 미치도록 좋았다.
그리고 모든 걸 다 바쳐 그녀를 지켜내고 싶었다.
“아마 곧 깨어나실 거야.”
소중한 소유가 깨지거나 식거나 다치는 모습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이렇게 예쁜 딸을 두고서 아무 데도 못 가실걸.”
네가 했던 감사 인사에 답을 돌려주려고 한다.
오히려 내가 고마워.
가장 힘든 시기에 내가 있는 곳으로 걸어와 줘서.
그래서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널 지킬 수 있게 해 줘서.
“나라도 그럴 것 같거든.”
* * *
너무 많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은 소유는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겠다며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고, 잠시 자리를 비웠던 간병인이 돌아왔다.
간병인이 멀끔해진 소유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오늘은 제가 닦았습니다.”
그러자 태오가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러셨어요? 수고하셨어요.”
“아닙니다. 그런데, 사고가 났을 때 함께 있던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됐습니까?”
별안간 찾아든 질문에 간병인이 슬픈 단어들을 가다듬었다.
“음. 박 기사님은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고, 사장님은 보시다시피 그날 이후 의식이 없으세요.”
“가해자는요? 덤프트럭과 충돌했다고 들었는데.”
“아…… 그 사람.”
어쩐지 떨떠름한 표정이 된 간병인이 망설이다 대답했다.
“그냥 간단한 찰과상 정도만 입었다고 해요. 지금은 어떻게 사는지 몰라요. 딱 한 번 병문안 오고 코빼기도 안 보였으니까. 사람이 그러면 안 되는 건데.”
“제가 듣기론 트럭 운전사의 과실이라고 들었습니다만, 그 후에 어떤 대가를 치렀습니까.”
“그게, 사모님이 합의해 주셨어요. 고의가 아닌 사고니까 일 크게 만들고 싶지 않다고. 덕분에 어딘가에서 뻔뻔하게 잘살고 있겠죠.”
“합의? 공연옥 씨가요?”
지금껏 소유에게 해 온 행동을 보면 그다지 본성이 너그러운 사람은 아닌 것처럼 보였는데 이상하게도 그 트럭 기사에게만큼은 관대했다.
자기 남편을 이렇게 만든 사람을 그리 쉽게 용서할 수 있을까.
“아가씨가 없으니까 하는 이야기인데요.”
간병인이 물소리가 나오는 화장실을 힐끔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석연치 않은 부분을 알고도 감히 입밖으로 꺼낼 수도 없었던 사건의 내막을 초면인 남자에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현 상황에선 이 남자가 소유와 정 사장의 유일한 구원자처럼 느껴졌으니까.
찝찝하게 묻혀 버린 과거의 사건을, 이 남자라면 다시 파헤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태오에겐 그런 힘과 권력이 있었다.
이대로 묻히는 것보다야 무엇이라도 시도를 해서 가여운 부녀를 도와주고 싶었다.
“물론 증거도 없고, 그냥 내 직감일 뿐이지만…… 전 이 사건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태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한적한 도로에서 멀쩡히 서 있던 차를 옆에서 오던 덤프트럭이 칠 확률이 얼마나 될 것 같나요. 게다가 그곳엔 그 차 두 대뿐이라 증인도 없고, 하필 블랙박스도 전부 다 고장 나 있었대요. 우연이라기엔 너무…….”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요.”
태오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그건 소유와 함께 있을 땐 절대 드러내 보이지 않던 그의 본모습이었다.
“우리 사장님이랑 아가씨 좀 도와주세요. 내가 진짜 우리 아가씨만 보면 마음이 아파서 참을 수가 없어요.”
“네. 제가 한번 알아볼게요. 이야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별로 아는 건 없지만 언제든 궁금한 게 있으시면 연락해 주세요.”
다행히도 소유의 주위 사람이 전부 나쁜 것만은 아닌 듯했다.
그때, 소유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나왔다.
화장이 모두 지워졌지만, 그녀는 화장기 없는 얼굴이 더욱 청초했다.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진지하게 해요?”
“아니야. 그럼 이만 갈까?”
태오는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달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딜요?”
“드레스 보러 가야지.”
“아, 맞다.”
오늘 외출의 진짜 목적은 드레스였지.
소유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아빠와 작별 인사를 했다.
“아빠 다시 올게. 오늘 사진 엄청 찍어 둘 테니까 나중에 일어나서 꼭 봐. 응?”
간병인은 소유와 태오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사이라고 하기엔 둘 사이의 기류가 묘했다.
“근데 이 꼴로 드레스 입으러 가도 되나. 그냥 다음으로 미룰까요?”
“지금도 예뻐. 괜찮아.”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