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부부의 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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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부부의 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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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부부의 사생활
2022.05.02.
“우리 혹시 다른 곳에서 만난 적 있어요?”
왜 갑자기 그런 터무니 없는 질문이 터져 나왔는지 모르겠다.
순간 노아의 눈과 태오의 눈이 겹쳐 보여 기분이 이상했다.
설마.
순간 말도 안 되는 추측이 떠올랐다.
태오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은 묘해 보이기도,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맞선 전에 만난 적 있냐고요.”
왠지 조급해진 소유가 태오를 다그쳤다.
태오가 소리 없이 웃다가 머리를 쓸어넘겼다.
덜 말라 축축한 머리가 힘없이 쓰러졌다.
“내가 묻고 싶네. 넌 날 본 적 있어?”
그의 머리카락만큼이나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다.
지금까지 봐왔던 태오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어디가 달랐냐고 묻는다면 딱 잘라 말할 수 없었다.
심장이 멈추지 않고 계속 속도를 높였다.
“네 기억 속에, 내가 있어?”
당연히, 없었다.
있을 리가 없잖아.
답이 곧바로 나왔지만 어쩐지 단호하게 내뱉을 수 없었다.
그런 소유의 머뭇거림을 알아차린 태오가 붉어진 귀를 만지작대며 말했다.
“그럼 없는 거겠지.”
“그게 무슨…….”
“있다면 네가 기억해내겠지. 늦게라도.”
그의 말은 마치 다른 차원의 언어 같았다.
익숙한 단어의 조합이었지만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잘 자. 정소유. 또는, 헤이즐.”
기분이 먹먹해진다.
공연히.
“그리고 네가 나한테 직접 말해 줬었어.”
“네?”
“네 영어 이름 말이야.”
아무리 돌이켜 봐도 그런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반박할 수 없었다.
하긴, 내가 말을 안 해 줬다면 이 사람이 어떻게 그걸 알았겠어.
은연중에 말했거나, 아니면 술에 취해 중얼거렸겠지.
“미안해요. 나 진짜 제정신이 아닌가 봐요. 헛소리를 하는 거 보니.”
혼자서 납득한 소유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태오가 침실에서 멀어졌다.
그러곤 소파에 긴 몸을 뉘었다.
“난 거짓말은 안 했다.”
머리 아래에 손을 넣은 그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시야가 깜깜해지면 주기적으로 생각나는 장면이 있었다.
너한테는 평범한 날이었겠지만 내겐 죽을 때까지 잊히지 않을 그 날.
네가 본격적으로 내 안으로 들어왔던 그 날.
내 세상이 아주 잠시나마 환해졌던 그 날.
‘안녕? 너도 한국인이라며? 나도 한국인이야. 난 Hazel이라고 해. 넌 이름이 뭐야?’
그날 이후 ‘Hazel’은 태오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되었다.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가장 닮았었을지도 모르는 그 시절의 우리.
미숙했던 태오는 그녀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가고 싶은 발걸음을 애써 붙잡아두기 바빴다.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도, 장황하게 설명하는 방법도 모르는 어린애였으니까.
또, 가뜩이나 힘든 그녀를 더욱 힘들게 하긴 싫었으니까.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매일 몰래 그녀를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다음에 또 보자, Noah!’
그리고 소유에게 유일한 노아의 기억 조각인 가면무도회.
그 파티가 끝나기도 전에, 본가에서 연락이 왔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한국에 귀국했다가 몇 달 뒤에 다시 돌아왔을 땐, 헤이즐은 더 이상 미국에 없었다.
그녀의 친구들도 정확히 그녀의 행방을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번이라도 표현할걸.
이기적으로 굴어볼걸.
너를 좋아한다고, 무작정 고백해볼걸.
그래서 어떻게든 옆에 둘걸.
끝없는 후회와 함께 태오의 방황은 시작되었다.
보통 그렇게들 첫사랑이 막을 내린다던데 태오의 첫사랑은 아니었다.
피어나지도 못한 꽃봉오리는 은밀하게 어딘가로 숨어 버렸다.
그리고 소유와 재회하고 나서야 도로 모습을 드러냈다.
한을 풀 듯 활짝 펼칠 준비를 하며.
* * *
“있잖아.”
보기만 해도 든든한 미국식 아침 식사를 하던 중 태오가 무심하게 말했다.
“세어 보니까 내가 너한테 순결을 두 번이나 뺏긴 것 같거든.”
소유는 잘 넘어가던 베이컨을 다시 뱉을 뻔했다.
“몇 주 전 바에서, 그리고 어제 침대에서.”
“어제는 태오 씨가 키스를…….”
“아니. 말은 제대로 해야지. 네가 먼저 볼에 뽀뽀를 했잖아. 시작은 너지.”
다소 억울한 점이 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본의 아니게 시작은 언제나 자신이었다.
말로는 제게 잘해 주지 말라고 했으면서.
이 무슨 모순적인 행동이란 말인가.
“미안해요.”
소유가 부끄러움에 눈을 가리며 빠르게 사과했다.
그놈의 술, 술, 술.
늘 술이 문제다.
태오가 귀까지 빨개진 소유를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내 순결 어떻게 책임질래?”
그러다 들려온 말에 소유가 불쑥 손을 내렸다.
“좀 비싼데.”
“자, 잠깐만요. 농담하지 말아요.”
그에 태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라고? 그럼 내 순결은 싸구려란 말이야?”
“아니요. 그게 아니라 지, 진짜 내가 순결을 빼앗은 거예요?”
태오가 턱을 괴고서 소유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응. 첫 키스였어.”
믿을 수 없어.
이렇게 멋진 남자가 스물아홉 살까지 키스를 안 해 봤다니.
“그런 불신의 눈빛은 넣어 두지 그래. 아무리 나라도 상처란 걸 받는데.”
“아…… 미안해요.”
여전히 그 말은 믿을 수 없지만, 소유는 접시로 고개를 푹 숙였다.
당사자가 그렇다는데, 뭐.
“내가 뭘 해 주면 될까요? 가진 건 별로 없지만.”
원하는 말을 끌어낸 태오가 씩 웃으며 상큼한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들이켰다.
사실 오렌지 주스보다 아침 햇살 아래 빛나는 소유가 훨씬 더 싱그러웠다.
그랬기에 태오에겐 최고의 아침이었다.
“내가 원할 때까지 내 옆에 있어.”
슬그머니 고개를 든 소유가 태오와 눈을 마주쳤다.
“여기에. 나랑 함께.”
어차피 제가 필요 없어질 때까지 태오의 곁에 머물 예정이었지만, 그걸 태오가 직접 요구하니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다시는 떠나지 말고.”
다시는.
결혼을 위해 처음 만난 사이에 하기엔 이질감이 느껴지는 말이었으나 소유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넘겼다.
“이걸 내 순결 값으로 받아도 되겠나?”
“그거보다 더 비싸도 되는데.”
“충분히 비싸.”
창문 틈으로 들어온 바람이 소유의 긴 머리를 훑고 사라졌다.
소유는 입꼬리를 늘어뜨렸다.
“그래 줄래?”
당신이 언제까지 날 원할지는 모르겠지만.
“기꺼이.”
기꺼이 그래야죠.
* * *
둘의 신혼집은 아버지 병원 근처의 타운하우스였다.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땐 언제든 달려가라는 태오의 배려였다.
게다가 3층 구조라 생활공간을 분리하기 용이했다.
2층은 태오가, 3층은 소유가 쓰기로 했다.
“서로 사생활이 존중되니까 좋네요.”
태오에겐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살짝 아쉽기도 했다.
계단으로 층이 분리되어 버리니 그와 다른 집에 사는 듯 멀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러면 혼자 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잖아.
그냥 평범한 아파트로 가자고 할 걸 그랬나.
소유가 심란한 마음으로 짐 정리를 하는 사이, 2층에 있던 태오는 비서에게 어둡고 심각한 사안을 보고받고 있었다.
“무직이었다고?”
“네. 운송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태오는 서류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엔 소유의 아버지를 식물인간으로 만든 가해자 김윤범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그럼 왜 덤프트럭을 몰고 다녔지?”
“……그게, 해당 트럭도 사고 나기 사흘 전에 급하게 구매한 거라고 합니다.”
제삼자인 비서가 봐도 어딘가 석연찮은 사건이었다.
흠. 턱을 괸 태오가 빠르게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게다가 구매대금은 공연옥 사장 계좌에서 흘러나온 돈입니다.”
태오가 혀로 느른하게 자신의 치열을 훑었다.
그다음 장에선 태오가 예상했던 대로 밀회를 나누는 연옥과 가해자 김윤범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연옥은 다정하게 윤범에게 팔짱을 낀 채 집을 나서고 있었다.
보통 사이보다는 연인 사이에 가까워 보였다.
“정희훈 사장님과 결혼하기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로 보입니다.”
태오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픽 웃었다.
“공 여사, 골때리네.”
물론 그건 즐거움에서 비롯된 웃음이 아니었다.
태오가 정말 화가 나면 인상을 쓰기보다는 서늘하게 웃는다는 걸, 그의 주위 사람은 다 알았다.
“어쩌다 이렇게 간이 커졌지. 술집 마담이나 하던 여자가.”
아마 지금쯤 공연옥은, 아니, 공미리는 온 천하를 다 가진 기분일 테다.
지난해부터 의식이 없는 남편 덕분에 유아 물산은 그녀의 것이 되었고, 또 딸을 팔아먹어 강화 그룹이라는 든든한 협력체를 얻었으며, 젊은 내연남은 그녀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을 테니까.
그러나 태오는 그녀의 행복을 지금부터 하나씩 깨부술 예정이었다.
“다른 증거는 어떻게든 모아 보겠지만, 이 사진만으로 두 사람이 내연 관계를 증명해내기엔 다소 어려움이 있습니다.”
“괜찮아. 그건 나한테 맡겨 둬. 조력자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태오의 머릿속에 매일 소유의 아버지를 극진히 보살피는 간병인이 떠올랐다.
그분이라면 돌파구를 만들어 줄지도 모른다.
“일단은 증거 계속 모으고 있어. 때가 되면 바로 칠 수 있게.”
“너무 늦지 않게 정 사장님께서 깨어나셔야 할 텐데요.”
“그러게 말이야.”
그래야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소유도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을 텐데.
그때, 가라앉은 두 남자 사이로 깨끗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밥 안 먹을래요?”
소유였다.
태오는 비서에게 눈짓했다.
비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 소유에게는 비밀로 하기로 했다.
만약 이 사실을 미리 알게 된다면 소유는 이른 배신감에 빠져야 한다.
되도록 천천히 알려 주고 싶었다.
태오는 사랑하는 소유가 지금보다 더 아프길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지금도 충분히 슬픔에 잠식되어 있었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그녀에게 이 비극을 알려 줘도 늦지 않겠지.
“……제가 방해했나요?”
소유는 달라진 분위기에 소심해졌다.
아무리 눈치가 느린 사람도 단박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두 남자는 소유가 나타나자마자 말을 멈췄기 때문이다.
“아니야. 들어와.”
태오가 봉투 안에 서류를 넣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비서는 태오와 소유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서 사라졌다.
“되게 심각해 보이는데.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그런 거 아니야. 밥 뭐 먹을까?”
소유가 시무룩해졌다.
그가 선을 긋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도움은 안 돼도 이야기를 들어 줄 순 있는데. 어쨌든 우린 부부잖아요. 뭐든지 털어놓아도 괜찮은 그런 관계.”
태오가 무어라 대꾸하지 못하고 난감한 듯 눈썹뼈를 어루만졌다.
다른 사람이 조른다면 가뿐히 무시하고 말았겠지만 소유에겐 그게 쉽사리 되지 않았다.
“진짜 말 못 해 주는 일인가 보네. 서로 침범하면 안 되는 그 ‘사생활’의 영역이에요?”
“음. 일단은.”
당장은 그렇게밖에는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저질처럼 이 상황이 행복하기도 했다.
처음 만났을 땐 저를 경계하고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 같던 소유가 제게 아주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생각을 읽으면 소유는 화를 내고 말겠지만.
“나중에 때가 되면 말해 줄게.”
말간 눈동자로 태오를 빤히 바라보던 소유는 자박자박 걸어 빠르게 태오의 앞으로 왔다.
그리고 자그마한 손으로 태오의 손을 꽉 잡았다.
보드라운 손바닥과 닿는 느낌만으로도 황홀해졌다.
그나저나 소유는 알고 있을는지.
남편을 닮아가 저의 소유욕도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지금도 태오를 놓지 않겠다는 듯 최선을 다해 잡고 있었다.
태오는 그녀가 사랑스러워서 온몸이 간지러울 정도로 안달이 났다.
어디서 이런 생명체가 나타났지.
아마 누군가가 제 건강을 해치려고 만든 거라면 아주 성공적이었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면 수명이 줄어드는 것만 같았으니까.
“하나만 약속해 줘요.”
“뭘?”
“만약에 첫사랑에 관한 일이라면 너무 늦게 말하지 않기로. 내게도 준비할 시간을 주기로.”
비참하게 쫓겨날 바엔 먼저 나갈 요량이었다.
“알았어.”
소유의 애타는 마음도 모르고 태오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다 그녀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소유가 움찔했지만, 태오는 향기로운 체취에 행복해졌다.
공 여사로 인해 더러워졌던 기분이 단숨에 정화되었다.
“점심 메뉴 생각해 봤는데, 자장면 어때요? 역시 짐 정리할 땐 자장면이랑 탕수육이 최고죠.”
소유는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말하며 그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여 위로라도 해 주려는 걸까.
과감한 손길에 태오가 눈을 감고 청량하게 웃었다.
“소유야.”
태오가 처음으로 ‘소유야.’라고 불렀다.
익숙해진 이름이 그가 불러 주는 것만으로도 생경하리만큼 소중해졌다.
“나는 가끔 네가 이렇게 먼저 다가오고, 손잡아 줄 때마다 미쳐 버릴 것 같아.”
“좋다는 거예요?”
“응.”
“응?”
진짜로 ‘응.’이란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는지 소유가 되물었다.
“응.”
그러자 다시 간결한 대답이 돌아온다.
“좋다고.”
익숙한 불꽃이 소유의 내부에서 뻥뻥 터졌다.
들뜬 마음으로 인해 당장이라도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태오의 마음속에서 첫사랑보다 제가 앞서 있었으리라 믿고 싶었다.
이기적이지만.
소유는 본능적으로 그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