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끼 부리지 마
(11/95)
11. 끼 부리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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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끼 부리지 마
2022.05.06.
‘소유야.’
든든하게 중국 음식을 먹은 탓에 포만감이 몰려와 당장 잠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는데, 밤이 깊어갈수록 오히려 눈이 또렷해졌다.
‘소유야.’
아까 태오의 부름이 소유의 귓가에 착 붙어 놓아주지 않았다.
또 그렇게 불러줄까.
실수로 부른 것은 아니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소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목이 건조해졌다.
산발이 된 그녀는 방을 나와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냉장고 문을 열어 생수를 꺼내 마시다 문득 맥주가 눈에 들어왔다.
차라리 취해서 잠들어 버리자.
경쾌한 맥주캔 따는 소리에 만족스럽게 웃고 있는데, 누군가가 주방의 문을 툭 쳤다.
화들짝 놀란 소유가 뒤로 돌았다.
“이 밤에 뭐 해? 도둑고양이처럼.”
그곳엔 잠옷 차림의 태오가 있었다.
“나 때문에 깼어요?”
“잠이 안 와?”
“네. 아무래도 새집이라.”
“영화나 볼래?”
“……지금요?”
태오는 소유의 손에 들린 맥주를 뺏었다.
“이건 나 주고.”
애써 딴 맥주는 태오의 몫이 되었다.
시무룩한 얼굴로 서 있자 태오가 손을 뻗었다.
소유가 홀린 듯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에게 이끌려 계단을 올랐다.
발에 날개라도 달린 듯 붕 떠올랐다.
눈 깜짝할 새에 태오의 공간인 2층에 도달해 있었다.
태오는 소파에 소유를 앉히고 프로젝터를 만지작댔다.
그러자 2층 거실은 순식간에 영화관으로 바뀌었다.
하얀 벽에 오래된 흑백 영화가 재생되었다.
담요를 어깨에 걸치던 소유는 영화 제목을 읽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이 영화…….”
그건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던 영화였다.
이 영화 속 여자 주인공 이름이 ‘헤이즐’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소유도 여러 번 봤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신 이후 일부러 가슴 깊숙이 묻고 꺼내 보지 않았다.
“남자주인공 이름이 뭐더라?”
“전 알아요. 남자주인공 이름은…….”
말을 하다 말고 소유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생각보다 더 나와 인연이 깊은 영화잖아.
“Noah.”
나직하게 대답한 소유는 아련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Noah예요.”
혹시 내가 아는 노아도 이 영화 속 이름에서 가져온 것일까.
“그렇구나.”
태오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소유의 옆에 앉았다.
익숙한 오프닝 음악이 울려 퍼지고 천방지축 소녀 ‘헤이즐’이 뉴욕 거리를 마구 뛰어다니는 장면이 보였다.
분명 발랄한 내용의 영화였는데,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정말이지 그리워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소유가 촉촉해진 눈으로 영화를 응시했다.
태오는 맥주를 마시며 그런 그녀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영화 속 헤이즐과 노아는 함께 기타와 피아노를 치며 달밤을 노래했다.
둘이 함께라면 두려운 게 없었다.
아무리 부모님이 원수지간이라 하더라도.
그러나 설익은 풋사랑은 끝내 이어지지 않았다.
둘은 쌓이고 쌓인 오해 끝에 헤어지고 말았다.
소녀와 소년이 중년이 되어 다시 재회했을 때, 태오는 빈 맥주캔을 구기고 있었고, 소유는 불면을 이겨내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태오는 몸을 바로 세우고 소유를 툭 쳤다.
그러자 소유가 스르륵 태오의 어깨에 기대어 더욱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태오가 소유의 눈 끝에 맺힌 눈물을 손으로 닦아냈다.
이윽고 영화는 마지막을 향해 달려갔다.
순수함을 모두 잃은 소년과 소녀였지만, 둘은 다시 달밤 아래서 함께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났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캐비닛에서 네 이름을 보자마자 확신했지.”
태오는 소유에게 들리지 않을 고백을 내뱉었다.
“우리의 만남이 어쩌면 우연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영화 속 노아가 헤이즐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듯.
* * *
연옥이 정말 오랜만에 병실을 찾았다.
“아직 별 차도가 없죠?”
연옥은 안타까운 듯 말했지만, 표정만큼은 감추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안도를 발견한 간병인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여보. 어서 일어나야죠.”
연옥이 희훈의 귓가에 가증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때, 병실 문이 세게 열렸다.
가해자인 윤범이었다.
윤범의 방문은 연옥조차 몰랐다는 듯 얼어붙었다.
그러다 재빨리 상황판단을 하고서 간병인에게 말했다.
“김윤범 씨가 다시 한번 사죄를 하고 싶어서 온 모양이에요. 우리끼리 이야기하게 잠깐 자리 좀 비켜 줄래요?”
간병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으로는 은밀하게 매트리스 사이를 벌렸다.
그리고 그사이에 자신의 휴대폰을 쏙 집어넣었다.
간병인이 나가자 연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상의도 없이 여기에 나타나면 어떡하니? 기다리라고 했잖아.”
요즘 들어 돌발행동이 잦은 윤범이었다.
“하도 답답해서 직접 보러 왔지. 와, 근데 이 아저씨 명줄 엄청 기네. 도대체 언제 죽는 거야?”
“말조심 안 해?”
“뭐 어때. 식물인간이라며.”
그 말이 또 틀린 것도 아니라 연옥은 이마만 감싸 쥔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다시 손 좀 써 볼까? 이번엔 실수 안 할게. 단숨에 죽일 수 있어. 그럼 약속대로 나 차 바꿔 줘.”
윤범에겐 천박한 면이 있었다.
전에야 그런 모습이 귀여워 보였지만 이젠 좀 싫증이 나려고 했다.
하긴 이제 자신의 위치도 바뀌었으니 더 젊고 잘생긴 애인을 만날 수도 있을 테다.
“일단 나가서 이야기해.”
머릿속에 각자 다른 생각을 품은 연인은 서로를 향한 발톱을 숨긴 채 병실을 나섰다.
그리고 그 순간, 미동조차 없던 희훈의 새끼손가락이 살짝 움찔거렸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고 그 이후론 다시 쥐 죽은 듯 조용해졌기에 간병인조차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틀림없이 희훈은 움직였다.
상황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겐 천국, 누군가에겐 파국일 변화는 이미 벌어지고 있었다.
* * *
“미쳤다, 미쳤어.”
요상한 꿈을 꿨다.
일단 태오가 등장하는 꿈이었는데,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계속 소유의 이름을 불렀다.
‘소유야.’
밤새. 쉬지 않고.
저는 그 부름에 좋아 어쩔 줄 몰라 했다.
‘태오야.’
그를 따라 소유도 연달아 태오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도 모자라 그의 목을 끌어안고 마음껏 입을 맞추기도 했다.
오래 헤맨 끝에 마침내 오아시스를 만난 사람처럼 갈증을 채우기 바빴다.
“사춘기 소녀도 아니고.”
만약 태오가 그 꿈속을 들여다봤다면, 기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거리를 두려고 할지도.
불순한 생각이 가득한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소유는 온종일 몸을 움직였다.
그러다 보니 3층은 물론 1층 짐 정리도 초인적인 힘으로 마무리 중이었다.
태오가 퇴근을 한 것도 모르고.
서랍장 닦는 일에 열중한 뒷모습을 보다가 태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걸 혼자서 다 했어? 내일 사람 부를 거라니까.”
“아, 깜짝이야. 왔어요?”
소유가 어색하게 웃고서 태오의 눈을 피했다.
“그러다 몸살 나.”
“괜찮아요. 어차피 할 일도 없었는데요. 오늘 공 여사가 왔대서 아빠 병원에도 못 가고.”
안 그래도 간병인에게 녹취 파일을 전해 받았던 태오였기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할 텐데 올라가서 쉬어요. 나도 다용도실만 마저 정리하고 잘 거니까.”
그런데 어쩐 일인지 소유가 도통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손으로 휘휘 저어 태오를 내쫓기까지 했다.
“얼굴 좀 보고 이야기해.”
퇴근하면 소유와 재잘재잘 대화를 나눌 생각에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데, 등밖에 안 보여 주니 태오로서는 안달이 날 따름이었다.
“그리고 다용도실은 내버려 두고. 그 사람들도 돈 받고 일하는 건데, 할 일을 다 뺏어 버리면 어떡해?”
“……아니에요. 그냥 제가 얼른 하고…….”
“얼굴 좀 보자니까?”
태오가 소유의 어깨를 잡자, 소유가 대뜸 소리쳤다.
“안 돼요!”
혹시 제게 화가 난 건 아닌가, 했는데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그냥 좀, 상태가 이상했다.
종종 혼자 생각하고, 홀로 결론 내리고, 생뚱맞은 행동을 하는 소유였기에 그런 모습은 익숙했다.
어쩔 수 없지.
“그럼 같이해.”
아쉬운 사람이 져 주는 수밖에.
태오는 재킷을 벗고 셔츠를 걷어붙였다.
“아, 아니에요. 태오 씨는 얼른 올라가요.”
“너 올라가기 전엔 안 올라가.”
제가 이상한 욕망에 사로잡혀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이 남자는 제 사정도 모르고 끈질기다.
소유는 머리카락을 내려 붉어진 얼굴을 감췄다.
그 사이 태오는 다용도실 문을 열었다.
안은 짐으로 빼곡했다.
이걸 혼자 다 하게 시켰다간 정말 쓰러질지도 몰라.
태오가 적극적으로 정리를 시작하자 소유도 마지못해 다용도실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가뜩이나 좁은 공간에 짐과 사람 둘이 서 있으니 빼곡했다.
소유는 지금까지 일을 하고 온 사람에게 또 일을 시키는 것 같아 미안해 괜히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
“이번엔 또 뭐야?”
“뭐가요?”
“혼자서 또 무슨 오해를 한 거냐고.”
“그런 거 아니에요.”
“궁금한 게 생기면 웬만하면 내게 직접 물어 줬으면 좋겠어. 혼자 결론 짓지 말고.”
“진짜 그런 거 아니에요.”
어서 정리를 끝내고 방으로 도망치자.
그렇게 다짐한 소유는 쭈그리고 앉아 새로운 상자를 풀었다.
탐탁지는 않지만, 태오도 정리를 이어나갔다.
소유는 낮은 곳, 태오는 높은 곳.
따로 정하지도 않는데 키에 따라 역할 분담이 확실히 되었다.
그러다 고가의 것이지만 잘 사용하지 않는 도자기 꽃병이 나왔다.
소유는 팔을 뻗어 그것을 태오에게 내밀었다.
“태오야. 이것 좀 위에 놓아 주세요.”
무의식적으로 꽃병을 잡으려던 태오가 멈칫했다.
방금, 내가, 뭐라고…….
태오만큼이나 놀란 소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오를 올려다보았다.
“……태오야?”
태오는 굳이 방금 실수를 곱씹어 돌려주었다.
나 진짜 이름 변태 맞나 봐.
소유가 무릎에 얼굴을 푹 묻었다.
계속 이름 생각을 했더니 그만 말이 헛나가고 말았다.
“실수였어요.”
소유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미 태오는 웃음이 터진 뒤였다.
“이름 부르는 것도 괜찮겠는데?”
“진짜 실수였다니까요!”
“하긴 동갑이니까 친구처럼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당신, 그쪽, 뭐 이런 호칭 좀 거슬렸거든.”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몸을 숨기고 싶었다.
“다시 불러봐. 내 이름.”
“…….”
“응? 소유야, 얼른.”
그가 필살기를 쓰듯 애교스럽게 소유를 불렀다.
꿈속에서 듣던 이름을 직접 들으니 더욱 벅차올랐다.
소유는 슬그머니 얼굴을 들었다. 뽀얀 얼굴과 상반되게 그녀의 귀는 타오를 듯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 모습이 꼭 당황한 토끼 같았다.
“이름 부르면 꽃병 받아 줄게.”
“가끔 짓궂어요.”
“가끔 아니고 자주.”
스스로 알고 있다니 할 말이 없다.
슬슬 팔이 아파질 때쯤 소유가 눈을 딱 감고 외쳤다.
“태오야. 이것 좀 가져가, 요.”
아, 귀엽다. 귀여워. 정소유.
태오가 키득 웃으며 꽃병을 받아들었다.
고작 이름 부르는 게 뭐라고 저렇게 온몸이 빨개져.
“그럼 앞으로 서로 이름으로 부르는 거다, 소유야?”
“자꾸 놀리지…….”
소유가 화가 난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약간의 빈혈 증세와 호되게 혹사당한 몸의 콜라보로 크게 휘청댔다.
이러다 쓰러지겠다, 싶을 때쯤 단단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안정감 있게 잡았다.
덕분에 이 짐들 사이에서 우스꽝스럽게 넘어지는 꼴은 면했다.
“너 지금 작정하고 나 꼬시고 있는 거지?”
그런 거라면 진작 넘어갔다.
백 번이고 넘어갔다.
태오는 힘없이 나풀대는 소유를 번쩍 안아 들었다.
태오가 일명 ‘공주님 안기’ 자세로 성큼성큼 다용도실을 빠져나가 계단을 올랐다.
내려 달라고 소유가 마구 발버둥을 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더 무리를 했다간 그녀가 몸살에 걸려 버릴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가만히 안 있으면 확 깨물어 버린다?”
태오의 으름장에 성난 토끼 같던 움직임이 멈췄다.
맹수는 입맛을 다시며 토끼의 침실을 향해 걸어갔다.
“끼 부리지 마. 너만 힘들어.”
끼 부린 적 없는데.
억울했지만 그가 정말 깨물어 버리기라도 할까 봐 침실에 도착할 때까지 소유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잘자, 소유야.”
그리고 그날 이후 두 사람의 호칭은 한층 가까운 느낌으로 정리되었다.
물론 소유의 의견은 조금도 반영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