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여기에 있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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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여기에 있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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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여기에 있어 줘
2022.05.23.
응급실에 들러 링거까지 맞았는데, 소유의 체온은 여전히 높았다.
태오는 한숨도 자지 못하고, 연신 찬 수건으로 소유의 몸을 닦아 냈다.
문득 강태오답지 않은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
이기적인 성격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자신이었는데.
난생처음으로 남의 고통이 내 고통보다 더 버겁게 느껴졌다.
저 아픈 머리가, 가쁜 호흡이, 작게 떨리는 몸이, 힘겨운 몸짓이 제 것이었으면 좋겠다.
장기 하나가 녹아내릴 어마어마한 고열을 앓는다고 해도, 소유가 아픈 것을 보는 것만큼 괴롭진 않을 테다.
“아프지 마.”
태오가 소유와 이마를 맞대고 속삭였다.
닿은 부위가 불처럼 뜨거웠지만, 피하지 않았다.
“네가 아프니까, 내가 더 아프잖아.”
그리고 슬며시 소유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꾹 내리눌렀다.
도장을 찍는 것처럼.
“키스하면 감기가 옮는다는데. 나한테 옮길래?”
소유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태오는 제가 도달할 수 있는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입을 맞췄다.
이렇게라도 해서 그녀의 아픔을 가져올 수 있길 바랐다.
태오는 연신 키스를 퍼붓다가 몸을 세웠다.
“아빠…….”
소유가 앓는 소리와 함께 아버지를 불렀다.
당장이라도 끊길 듯 위태로운 목소리는 이어졌다.
“아빠, ……엄마.”
그와 동시에 눈꼬리를 타고 투명한 눈물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태오의 손가락이 애틋하게 소유의 눈가를 닦았다.
“가지, 마…….”
“넌 꿈속에서도 그렇게 서럽구나.”
“가지 마. 나만 두고…… 가지 마. 여기에, 있어 줘.”
그 애절한 꿈 한편에 나도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그랬다면 울고 있는 너를 꼭 안아 줬을 텐데.
“제발, 가지 마.”
무슨 수를 써도 소유의 꿈속을 들여다볼 순 없었기에 대신 현실 세계의 태오가 그녀를 포근하게 안아 주었다.
그녀에게 닿길 바라며.
놀랍게도 소유는 태오의 품 안에서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가지, 마.”
“안 가. 계속 여기 있을 거야. 너랑.”
태오가 달래듯 말했다.
그러자 소유가 숨이 넘어갈 듯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번엔 마냥 슬픈 눈물은 아닌 것 같아 닦지 않았다.
태오는 자신의 얼굴을 소유의 얼굴에 맞댔다.
이윽고 태오의 얼굴도 눈물범벅이 되었다.
“나랑 같이 걷자.”
외로운 꿈속이든.
험난한 현실이든.
“우리 나란히 걷자.”
걷는 게 힘들거든 자전거도 타고, 자동차도 타고, 비행기도 타자.
어떤 방법이라도 좋으니.
“함께 있자.”
* * *
정말 포근한 꿈을 꿨다.
춥고 외로운 거리에 놓여 있는 자신을 누군가가 꼭 끌어안아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같이 걷자.
함께 있자.
익숙한 낮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들려오자 양옆의 가로등에 불이 하나둘씩 들어왔다.
순식간에 거리는 밝아졌고, 시야엔 아름다운 마을이 펼쳐졌다.
몸을 놓아주지 않던 한기는 저 멀리로 사라졌다.
그리고 뒤로 돌았을 땐, 태오가 있었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제 손을 꽉 쥔 태오가.
소유는 눈물을 닦고서 아이처럼 웃었다.
태오도 그런 그녀를 보며 픽 웃었다.
두 사람은 함께 쇼핑도 하고, 맛있는 쿠키도 먹었다.
따뜻한 해변에 누워 있기도 했고, 별이 빛나는 도로 위에서 드라이브를 즐기기도 했다.
그렇게 완벽한 데이트를 끝냈을 때, 소유는 미소를 지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새가 울고, 밝은 햇살이 쏟아지는 것으로 보아 아침인 듯했다.
“무슨 그런 꿈을…….”
태오한테 들키면 분명 창피했을 꿈이야.
습관처럼 손으로 얼굴을 가리려는데, 왼쪽 손이 무언가에 얽혀 움직이지 않았다.
소유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엎드린 채 잠이 든 태오가 보였다.
그의 고단한 얼굴과 옆에 놓인 다 녹은 얼음물과 수건.
뭐지.
꼭 간호하다가 밤이라도 새운 사람처럼.
그러다 뒤늦게 어저께 일이 떠오르고 말았다.
폭우가 내리던 날,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던 아버지의 움직임, 제게로 달려온 태오.
그리고, 무심결에 내뱉어 버린 좋아하는 마음.
순간 비명이 나올 뻔하던 걸 오른쪽 손으로 가까스로 막았다.
그러고 보니 미미한 두통이 느껴지는 것도 같다.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아.’
그와 동시에 부정하고 싶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미쳤어, 정소유!
‘아니. 너를 좋아해.’
분위기에 취해서 덥석 고백해 버리면 어떡해.
끝까지 감추려고 했는데.
죽어도 안 들키려고 했는데.
‘네가 좋아졌어.’
혹시 꿈일까?
아니다.
꿈이라기엔 지나치게 생생하다.
저질러 버린 게 분명하다.
대책도 없이.
태오가 겨우 내려 놓은 열이 다시 올랐다.
앞으로 얘 얼굴을 어떻게 보지.
그냥 기억 안 난다고 할까.
“……말이 안 되잖아.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소유의 조용한 발버둥에 선잠이 들었던 태오가 꿈틀댔다.
그의 기다란 속눈썹이 점점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본 소유는 ‘퍽’ 소리가 나도록 눕고, ‘퍽’ 소리가 나도록 이불을 뒤집어썼다.
누가 봐도 티가 나는 행동이었다.
“뭐 해?”
태오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일단 자는 척을 해보자.
지금 당장 태오의 얼굴을 본다면 부끄러워 죽어 버릴지도 몰라.
소유는 너무나 어색한 숨소리를 냈다.
그런 소유를 보며 태오가 코웃음을 쳤다.
“일어나. 열 재 보고 안 내려갔으면 다시 병원 가야 하니까.”
소유는 눈을 질끈 감고 빌었다.
가라. 제발 가라.
“너 안 자는 거 다 알거든?”
그나저나 쟨 출근은 안 하나?
“나 오늘 휴가 냈어.”
소유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태오가 말했다.
“와이프가 아픈데 옆에서 간호하는 게 남편의 도리지.”
생긴 건 세상에서 가장 차갑게 생겼는데, 정말이지 이상한 부분에서 다정해지곤 하는 태오였다.
“셋 셀게. 이불 치워. 아니면 내가 치운다?”
“…….”
“하나, 둘…….”
“열 내렸어!”
소유가 이불 속에서 다급하게 외쳤다.
“셋.”
하지만 태오는 인정사정없었다.
“그건 직접 재 봐야 알지.”
태오가 이불을 강한 힘으로 뺏었다. 한 손으로는 체온계를 든 채.
소유가 산발이 된 머리를 정리하는 동안 태오는 소유의 귀에 체온계 입구를 툭 집어넣었다.
“내 체온에 진심이었구나.”
“당연하지. 너 때문에 내가 밤새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그냥 무시하고 자지 그랬어.”
고맙고, 부끄러운 나머지 소유는 아무렇게나 말했다.
“침대가 하나뿐인데, 어떻게 무시하고 자? 너 엄청 끙끙 앓은 건 알고 있어? 난 무슨 새끼강아지라도 기어들어 온 줄 알았네.”
태오는 진지한 표정으로 체온계를 들여다보았다.
미열이 남아 있긴 했지만, 다시 병원에 가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행이다. 많이 내렸네.”
태오가 안도하듯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하루 사이에 핼쑥해진 소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소유는 무릎을 끌어안고 시선을 피했다.
“밥 먹자. 여사님이 전복죽 끓여 주신다고 하셨어.”
소유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알아서 먹을게. 넌 얼른 출근해.”
“나 휴가 냈다니까? 지금 회사 나가봤자 나만 손해야.”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살짝 놀리는 것 같기도 하고.
헷갈리려고 한다.
“저기, 있잖아.”
“너 나 좋아하냐?”
둘러 둘러 말하려고 했는데, 굳이 직설적으로 콕 집어 물어오는 태오였다.
“어제 분명히 그렇게 들은 건 같은데, 확인하려고. 네가 너무 갑자기 쓰러져 버려서.”
“아니, 뭐 좋아한다기보다는…….”
“그래? 그럼 안 좋아해?”
“그렇다고 안 좋아한다는 것도 아니고.”
태오가 팔짱을 끼고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진득한 시선은 여전히 소유를 향해 있었다.
“그만 좀 쳐다보면 안 될까?”
“계속 쳐다보고 싶은데?”
확실해. 놀리고 있는 거야.
그에게 화를 내고 싶은데 어제 벌려 놓은 일이 있기에 소유는 꾹 참았다.
“고백을 들었으면 답을 해 줘야겠지?”
“어?”
굳이 이 상황에서 대답을 하겠다고?
“나는 널…….”
“아, 아니! 대답은 필요 없어!”
태오가 하려고 하는 말이 무엇인지 훤히 알 것 같아 소유가 다급히 그의 말을 끊었다.
아직 고백의 여파도 가시지 않았는데, 실연의 아픔까지 견디라고 한다면 가혹하다.
“대답까지, 바라고 한 고백은 아니야.”
그러자 태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제 말했던 것처럼 내 마음 받아 달라고 한 고백도 아니야.”
그러니 거절은 거절이었다.
스스로 정리할 마음이니.
“다만 그냥 그 순간의 나는, 너에게 진심을 전하고 싶었던 것 같아.”
“지금의 너는 안 그런가?”
“지금의 나는, 당연히 네가 어제 일을 잊어 주길 바라고 있어.”
태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진 않았다.
그는 이미 충분히 제게 잘해 주고 있었다.
“아, 아무튼 우리 어색해지지 않는 거다. 알았지?”
소유가 부자연스러운 몸짓으로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 배고프네. 나 먼저 밥 먹으러 내려갈게.”
그녀가 도망치듯 사라지고 난 뒤 태오는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어이없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말해 주려고 했는데.”
두 번 고백 받고, 두 번 차였다.
“나도 널 아주 좋아하고 있다고.”
소유의 속도에 최대한 맞춰 주려고 했는데, 답답해서 더 이상은 안 될 것 같다.
무리였다.
이제 슬슬 밝혀야겠다.
내가 바로 그 소년이라고.
나는 사실 그때부터 너를 마음에 담았었다고.
내 이야기를 듣는 너는 어떤 반응일까.
울어 버릴까. 웃어 줄까.
너는 기뻐할까. 내게 화를 낼까.
* * *
간병인은 간호사의 부름에 잠시 스테이션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모자를 푹 눌러쓴 윤범은 은밀하게 복도를 걸어 병실에 침투했다.
마침 희훈의 병실은 1인실이었기에 범행을 저지르기도 쉬웠다.
윤범이 서늘하게 웃으며 모자를 벗었다.
“아저씨. 나 또 왔어.”
윤범의 인사에도 희훈은 미동도 없었다.
“그때 확 죽어 버렸으면 피차 좋았잖아. 나도 귀찮은 일 덜고, 아저씨도 고통 없이 빨리 죽고.”
윤범은 새까만 가죽 장갑을 끼고서 희훈이 누워 있는 침대로 걸어갔다.
“솔직히 아저씨도 이러고 있는 거 싫지? 화장실도 혼자 못 가, 씻는 것도 혼자 못 해. 얼마나 비참해?”
아마 눈앞의 이 남자가 살면서 한 실수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공연옥, 그 여자를 만난 것일 테다.
“이만 그 무기력한 몸을 버리고 떠나고 싶잖아. 안 그래? 그러니까 내가 도와줄게.”
희훈과 소유는 자신들과 같은 밑바닥 인생들을 견뎌내기엔 너무 여린 사람들이었다.
윤범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키득키득 웃었다.
“가기 전에 이별 선물로 뭐 하나 알려 줄까?”
“…….”
“그 여자, 단 한 순간도 아저씨 사랑한 적 없어.”
희훈과의 첫 만남부터 작년의 사고까지.
모두 미리 짜여 있던 계획이었다.
차곡차곡 숙제를 하듯 해치웠을 뿐이다.
“가만 보면 그 여자 연기에 소질 있다니까. 불쌍한 척, 착한 척, 순수한 척. 그놈의 척, 척, 척. 같은 편인 나까지 토 나올 정도였어.”
윤범이 검은 손을 그에게 뻗었다.
“그러니까, 아저씨. 다음 생엔 아저씨한테 어울리는 여자 만나. 구를 대로 구른 공연옥 말고.”
희훈의 목을 양손으로 감싸 쥔 윤범이 서서히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이렇게 목숨줄을 조여 가는데, 희훈은 작은 저항조차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저항을 할 수조차 없었다.
이미 그의 육체는 죽음에 반쯤 발을 걸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잘 가요, 정희훈 사장님. 남겨 주신 유산으로 잘 쓰고, 잘 놀다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