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좋은 날 (17/95)


17. 좋은 날
2022.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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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조금만 더.

윤범은 살인이란 행위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마침내 목표를 이룬다는 희열에 휩싸여 있었다.

기괴한 소리를 내며 웃던 윤범은 곧 귀신이라도 본 듯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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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이 마주쳐서는 안 될 존재와 눈이 마주쳐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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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말도 안 돼.”

그 어떤 낌새도 없었다.

복선도 없었다.

그저 희훈의 눈이 번쩍 뜨여 있었을 뿐이다.

방금 막 깨어난 사람답지 않게 그의 눈은 총명하고 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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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

겁에 질린 윤범은 더욱더 필사적으로 희훈의 목을 졸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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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 죽어. 죽어!”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공포였다.

윤범의 눈에 실핏줄이 터져 빨갛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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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범 씨, 그만하시죠.”

그러던 그때,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윤범을 둘러쌌다.

이런 사태를 대비해 태오가 미리 심어 둔 경호원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의 연속에 윤범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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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병원입니다. 여기서 살인 미수 사건이 일어나서요.”

한 명은 경찰에 신고 전화를 했고, 나머지 인원들은 윤범에게 달려들어 희훈에게서 떼어놓았다.

희훈은 거친 기침을 토해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윤범은 시뻘건 눈으로 희훈을 바라보다 털썩 주저앉았다.

깨어난 희훈은 사고당하기 전 희훈과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순박하던 눈에는 윤범을 향한 살의가 가득했다.

그건 분명 섬찟한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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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십니까?”

경호원 한 명이 달려가 희훈의 약해진 몸을 잡아 주었다.

희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윤범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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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한테 똑똑히 전해.”

이제 모든 연극은 종료되었다.

격동을 맞이했고, 상황은 반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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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끝났다고.”

희훈의 거친 목소리가 연극의 막을 갈기갈기 찢었다.

이제 후안무치한 주연 배우들은 무대에서 내려올 차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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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

연락을 받은 태오의 얼굴은 심각해졌다.

그러고는 맞은편에 앉아 시집에 푹 빠진 소유를 쳐다보았다.

열이 조금 내린 뒤로도 며칠을 꼬박 앓더니 오늘에서야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았다.

아직 무리하면 안 되는데.

태오의 눈에 소유는 아직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불안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유가 목격했던 장면은 허구가 아니었다.

이틀 전 늦은 밤, 소유의 아버지가 깨어났다는 은밀한 소식을 들었다.

동시에 공연옥과 김윤범이 다시 한번 끔찍한 짓을 저지르려는 움직임도 포착했다.

그들의 범행을 현장에서 잡기 위해 담당 형사와 태오의 변호사는 병원 측에 양해를 구했다.

덕분에 정희훈 환자의 현재 상태는 담당의와 수사 인력, 간병인, 경호원 외의 사람들은 모르는 비밀이 되었다.

태오가 판 함정에 공연옥과 김윤범은 보기 좋게 빠져들었고, 지금 막 윤범의 체포에 성공했다는 전화를 받은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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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어?”

소유는 곧 알게 될 어마어마한 사건도 예상하지 못한 채 예쁜 언어와 아름다운 의미에 심취해 있었다.

그러다 태오가 불쑥 이마에 손을 올리자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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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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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열이 좀 남아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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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는 푹 자면 나아. 그나저나 심각한 전화 같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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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오가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안 소유가 읽던 자리에 책갈피를 꽂고서 시집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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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래? 안 좋은 일이야?”

만약 그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 거라면 이번엔 자신이 그를 돌봐 주리라 다짐했다.

그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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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좋은 일. 우리 잠깐 어디 좀 나갔다가 오자.”

그런데 태오 혼자만의 문제가 아닌 모양이다.

두 사람이 함께 발을 들이고 있는 문제.

태오가 이토록 차분해지는 문제.

하나뿐인 답에 소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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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아빠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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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이라니까. 울 것 같은 표정 하지 마. 깨어나셨대.”

소유가 숨을 들이쉬며 입을 틀어막았다.

의사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소유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거의 반쯤 포기한 일이었다.

울 것 같은 표정 하지 말랬더니 청개구리처럼 오히려 눈물방울들을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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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지금 당장.”

소유가 옷도 갈아입지 않고 당장 뛰쳐나갈 태세로 말했다.

태오가 무거운 마음으로 그런 소유의 팔목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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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그 전에 먼저 볼 게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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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보면 안 될까? 아빠가 깨어나셨다잖아. 얼른 확인하고 싶어, 내 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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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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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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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일, 단순한 사고 아니야.”

살면서 이토록 내뱉기 힘든 어려운 말이 있었나 싶었다.

태오의 말이 이해가 안 되는지 소유가 몇 번의 호흡이 지나간 후에야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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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이야, 그게?”

태오는 소유를 다시 앉히고 서랍에서 몇 가지 서류와 USB를 꺼냈다.

소유는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 안엔 연옥의 돈이 윤범에게로 흘러간 정황이 추적되어 있었다.

순간 심장이 아래로 쿵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윤범은 가해자였다.

피해자의 부인이 가해자에게 돈을 주는 상황은 분명 비정상적이었다.

그 반대라면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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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옥. 재혼 전에 작은 식당을 운영했다고 했지만 사실 강남에선 꽤 유명한 마담이었어. 개명 전 이름은 공미리. 그때 만난 호스트바 선수 김윤범과 오랜 연인 사이지.”

그렇다면 연옥과 윤범은 초면이 아니라는 이야기인가.

그것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건 연옥의 과거였다.

공연옥이 공미리였던 시절, 그녀는 지금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정숙한 ‘유아 물산’ 사장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두꺼운 화장과 야한 드레스로 치장한 사진 속 공미리는 남자 손님에게 매혹적인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너무나 큰 괴리에, 소유는 공연옥과 공미리가 얼굴만 같은 다른 인격체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어두운 세계에 있던 공미리가 어떻게 우리 아버지와 엮이게 된 걸까.

도무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순 없는 만남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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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계획적으로 접근한 거야, 아버지한테. 당연히 그때도 김윤범은 조력자였고.”

이어지는 설명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럼 지금까지의 우리의 삶과 시간은.

사기꾼들에게 도난당한 나의 어린 시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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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B에는 공연옥이 전부 폐기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클라우드에 남아 있던 블랙박스 파일이 담겼어.”

연옥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많았다.

그중 하나는 부당 해고된 그녀의 비서였다.

연옥의 전 비서는 태오를 손수 찾아와 블랙박스 파일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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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내연 관계였다는 건 술집 종업원들의 증언과 포렌식 수사로 증명할 수 있을 거야. 불법이긴 하지만 간병인이 보내 준 녹취 파일도 있고.”

그에 비해 희훈과 소유는 모두가 돕고 싶어 했다.

그래서 태오는 훨씬 수월하게 증거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지금껏 그들이 살아온 인생의 조각들이 모인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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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범은 지금 체포 됐어. 곧 공연옥에게도 체포 명령 떨어질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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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오야.”

체포 이야기가 나오자 멈칫한 소유가 사막처럼 까끌까끌해진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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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이거 언제부터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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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오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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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말한 사생활이란 게 이거였어?”

소유는 태오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는데, 도저히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소유가 어느 부분에서 화를 내는지도 알 것 같았고, 또 같은 상황이 주어져도 자신은 똑같은 행동을 하리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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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적어도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했어.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우정 정도는 나누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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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유는 강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적어도 그녀는 태오를 믿었고, 모든 것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었을 테니까.

그런데 알고 보니 자신과 관련된 일들이 모두 자신 몰래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어떤 허탈함을 느낄지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다.

태오는 소유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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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였다면 너에게 가장 먼저 말했을 텐데.”

소유는 태오를 남겨 두고서 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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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보다도 내가 먼저 알았어야 할 사실이잖아.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구경하는 게 재밌었니?”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긴 태오는 달려가 소유의 팔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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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지키고 싶었어.”

소유가 짧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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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린 지킨다는 의미를 다르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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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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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믿었어. 유일한 가족이던 아빠가 그렇게 되신 이후, 유일하게 믿었던 사람이 너야. 우습겠지만 널 만날 수 있어 정말 감사하다고 여겼어.”

소유가 천천히 태오의 팔을 잡아 뺐다.

태오의 손이 무기력하게 아래로 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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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네가 아니면 그 사건은 영영 묻혀 버렸을지도 몰라. 나도 알아.”

애써 가까워졌던 사이에 두꺼운 벽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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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태오야. 숨기진 말았어야지.”

태오는 저 멀리로 밀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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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큼은 나 바보 만들지 말지, 태오야. 너 없으면 난 정말 혼자이고, 의지할 곳도 없는데.”

조곤조곤하게 울려 퍼지는 소유의 말엔 의외로 묵직한 무게가 있어 태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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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남은 건 이제 너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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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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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소유가 비틀대며 병실 문을 열었다.

꿈이 아니었다.

정말로 아버지가 눈을 뜨고 있었다.

퉁퉁 부어 있는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렀다.

상태를 확인하던 의사와 간병인은 자리를 비켜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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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아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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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가짜 아빠도 있어?”

희훈이 팔을 벌렸다.

소유는 아이처럼 달려가 아버지에게 안겼다.

언제나 일방적인 포옹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아버지도 힘을 줘 소유를 꽉 끌어안아 주었다.

일평생을 어른스러운 딸로 살아왔지만, 이제는 잔뜩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아버지를 잃을 뻔하며 느꼈다.

투정 한 번 안 부린 것이 어찌나 한심한 짓이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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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울어. 울지 마.”

희훈이 다정하게 소유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가엾게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 냈다.

희훈도 나름대로 이 일로 인해 딸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이렇게 눈물이 많았구나.

이렇게 여렸구나.

강하고 밝은 척만 하길래 몰랐네.

티를 안 내기에 괜찮은 줄로만 알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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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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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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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 아빠 재혼하는 거 하나도 안 좋았어요.”

뒤늦은 고백에 희훈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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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어머니는 나를 학대했어요. 아빠가 없을 때마다.”

‘억장이 무너진다’라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일까.

딸을 위해 한 재혼 결심이 이토록 딸을 병들게 하고 있을지 몰랐다.

공연옥 그 여자만의 잘못이 아니었다.

일부는 무지했던 제 죄였다.

제가 못난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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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매일 내 것을 훔쳐 갔어요. 그건 나한테도 소중한 물건들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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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아빠가 정말 미안해. 몰라서 미안해.”

문득 애써 떠나보낸 한 사람을 기억해 냈다.

희훈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여자였다.

밝고, 웃음이 유달리 예쁘던 여자였다.

그리고 그 여자는 저와 꼭 닮은 딸을 희훈에게 남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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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랑 약속했는데. 너를 잘 키워 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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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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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결국 못 지켰네, 그 약속.”

희훈이 이미 아물고도 남았을 어린 소유의 상처들을 어루만지며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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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연옥이 처음 나타났을 때, 정말 소유의 친엄마가 다시 살아온 줄 알았다.

생김새는 전혀 달랐지만 전체적으로 풍기는 분위기가 그랬다.

모든 사실을 알고 난 지금에서야 그것이 모두 꾸며낸 연기였음을 알아차렸지만 당시엔 정말 깜박 속았다.

그래서 연옥과 재혼을 결심했다.

티를 내진 않아도 내심 엄마를 그리워하는 소유에게 완벽한 가족을 선물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던 이들과 가족이 된다는 것에 대한 염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소유가 그저 웃기만 하기에 좋은 결정이었겠거니 믿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소유는 원래 아빠에겐 늘 웃었는데 말이다.

바보처럼.

희훈은 많이 야윈 딸을 보며 자신이 얼마나 무신경한 아빠였는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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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제라도 노력해 보려고 해.”

너무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변하기로 했다.

딸을 보호하기 위해 새로 주어진 삶이라 생각하고 소명을 다하겠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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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연옥은 잘 관리된 손톱이 망가질 정도로 세게 깨물었다.

진작 연락이 오고도 남았을 윤범이 몇 시간째 깜깜무소식이었다.

그렇다고 병원에 먼저 전화해서 물을 순 없지 않은가.

‘우리 남편, 드디어 죽었나요?’라고.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상황에 히스테리가 머리끝까지 치솟는데, 누군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연옥은 누구인지 확인조차 하지 않고 바로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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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로 연락하라고…….”

당연히 윤범일 것이라 생각했다.

윤범밖에 올 사람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눈에 보이는 사람은 두 명의 신체 건장한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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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입니다. 공연옥 씨 맞으십니까?”

남자 중 하나가 경찰 공무원증을 눈앞으로 내밀었다.

연옥이 뒤로 돌아 2층 계단을 응시했다.

그곳엔 소란에 잠에서 깬 잠옷 차림의 다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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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옥 씨 맞으시죠?”

이윽고 다해도 뭔가 큰일이 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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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옥 씨, 당신을 불법 횡령 및 정희훈 씨 살인 교사 혐의로 체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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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다해야.”

연옥이 애달피 딸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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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물론 엄마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오히려 음침한 사람이란 걸 다해도 알고 있었다.

또 엄마가 새아버지와 소유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까지도.

그러나 다해의 머릿속엔 다른 걱정뿐이었다.

엄마가 잡혀가면 나는?

재현이와의 결혼은?

내 카드값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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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야. 너무 걱정하지 마. 엄마 금방 나올 거니까…….”

경찰들은 연옥의 손목에 차가운 수갑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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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옥 씨,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고, 당신이 하는 말은 법정에서 불리한 증거가 될 수 있으며,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 아시겠죠?”

연옥은 비참한 모습으로 끌려갔고, 다해는 덩그러니 집에 남았다.

곧 본래의 주인에게로 돌아갈 그 커다란 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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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더러 어떻게 하라고, 엄마.”

다해의 신경질적인 고함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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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만 믿으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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