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신데렐라 언니
(21/95)
21. 신데렐라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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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신데렐라 언니
2022.06.10.
희훈이 퇴원하는 날, 태오는 휴가까지 내고 부녀의 옆을 지켰다.
희훈도 희훈이었지만, 소유도 감회가 새로웠다.
결혼을 한 이후로 처음으로 돌아가는 집이었기 때문이다.
벽을 뒤덮었던 가시덩굴은 사라졌을까.
기쁨과 온기는 되돌아왔을까.
다시 그 공간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길 바랐다.
소유는 떨리는 마음으로 아버지를 부축했다.
태오는 묵묵히 차 트렁크에서 짐을 꺼냈다.
“아빠!”
그런데 텅 비어 있을 줄 알았던 집엔 누군가가 살고 있었다.
아직 불청객 하나가 떠나지 않은 것이다.
새엄마도 잡혀간 마당에 신데렐라 언니는 염치도 없이 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제 오세요?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르시죠.”
다해가 거짓 눈물을 짜냈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다해를 보는 희훈의 눈은 차가웠다.
“아빠, 저예요. 다해. 무슨 말이라도 해 보세요.”
다해의 죄가 연옥의 죄와 같은 무게라고 재단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해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연옥에게 못된 영향을 받아 왔을 뿐이니.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해를 받아 줄 마음은 없었다.
희훈은 이미 소유가 당한 일을 모두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너에게까지 험한 꼴 보이고 싶지 않다. 나가거라, 지금 당장.”
희훈은 무채색의 목소리로 말했다.
소유조차 놀랄 정도의 냉정함이었다.
사고를 당하기 전 희훈에게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희훈은 친딸인 소유뿐만 아니라 의붓딸인 다해에게도 헌신적인 아버지였다.
연옥이 소유를 아껴 주는 만큼, 자신도 다해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희훈은 진심으로 연옥과 다해 모녀를 믿었다.
“아빠. 나는 아무 죄 없잖아요, 네? 다 엄마 잘못이잖아요. 난 몰랐어요.”
사이 좋은 모녀인 줄 알았더니 다해는 연옥만큼 애틋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그 얄팍한 애정에 태오는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똑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말고 나가.”
“아빠. 저 당장 지낼 곳도 없어요. 네? 아빠가 제 보호자잖아요.”
이 편리함이 평생 갈 줄 알았다.
엄마의 비호 아래 희훈의 재산을 까먹다가 재현에게 시집을 가 고고한 의사 아내로 살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다해는 꿈도, 능력도 없었다.
소유처럼 좋은 대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었고, 어떤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세상 물정 모르고 자란 그녀는 정말이지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랬기에 재현과 결혼하기 전까진 꼼짝없이 이 집에 붙어 있어야만 했다.
“소유야.”
희훈이 전혀 동요조차 없자 이번엔 타깃을 바꿨다.
비교적 마음이 약한 소유에게로 다가간 다해가 눈물로 호소했다.
“그동안 내가 미안해. 정말 잘못했어. 내가 나빴다는 거, 나도 알아.”
소유는 복잡미묘한 심경으로 다해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우린 자매잖아. 나 네 언니잖아. 응? 내쫓지만 마. 여기서 살게만 해 줘.”
처지가 바뀌었다.
언젠가 소유가 다해에게 애원한 적이 있었다.
제발 괴롭히지 말라고. 날 좀 내버려 두라고.
그때, 다해가 어떤 대답을 들려주었던가.
저를 가엾이 여기기는 했던가.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 설명해 봐.’
아니다.
오히려 다해는 소유를 짓밟고 비웃었다.
그날 이후 다해의 괴롭힘은 더욱 비열해졌다.
“소유야. 응? 우리 이제부터 잘 지내 보자. 우리가 피가 섞이진 않았지만…….”
다해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소유가 그녀의 손을 뿌리쳤기 때문이다.
다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유를 쳐다보았다.
“……소유야.”
“아빠가 싫으시다면, 나도 싫어.”
“정소유.”
다해는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소유에게로 달려들었다.
어찌나 강한 힘이었던지 소유의 여린 팔에 상처가 생길 정도였다.
가만히 그 광경을 주시하던 태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섰다.
“정다해 씨.”
다해의 손톱에 긁힌 부위에 피가 맺혔다.
“그만하시죠.”
어릴 땐 저런 상처가 얼마나 더 많았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게 태오에겐 가장 안타까운 점이었다.
지난 상처들은 어루만져 주지 못할 테니까.
“놔. 안 놔?”
다해가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태오는 강한 힘으로 다해를 소유에게서 떨어뜨리고, 함께 집을 나왔다.
“놓으라고. 안 놔?”
“정 그렇다면 소원대로.”
정원에 다다르자 태오는 본색을 드러내며 그녀를 놓았다.
그러자 홀로 난리를 치던 다해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당신은 이 일이랑 상관없잖아.”
“왜 상관이 없어?”
태오가 조소를 지으며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다해와 눈을 마주쳤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그쪽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는데.”
태오의 말에 다해가 얼어붙었다.
설마 둘이 진짜 사랑하기라도 하는 건가.
그저 정략결혼이었을 뿐이잖아.
“또 상처 입었는데.”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늘 이런 식이었다.
재현도 그랬고, 이 대단한 남자도 그랬다.
아니, 살면서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다.
모두 소유만 좋아했다.
자신은 뒤로 밀어두었다.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비싼 목걸이를 차도 소용없었다.
모두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건 언제나 소유였다.
그랬기에 다해에겐 심한 열등감이 있었고, 소유를 혹독하게 괴롭히며 그 분을 풀었다.
“저 계집애가 뭔데.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반짝반짝 빛나는 소유가 빛을 잃을 때가, 다해에겐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왜 다들 쟤 편만 드는데!”
다해의 울먹이는 고함에도 태오는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
“글쎄. 그건 당신 남자 친구한테 물어보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 소유의 무슨 점이 그렇게 좋은지.”
“뭐라고?”
“당신 남자 친구가 요즘 들어 부쩍 내 와이프한테 집적대더군. 꼴사납게.”
조금의 흠도 없이 수려한 태오의 얼굴이 다해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툭 건드리면 깨질 것처럼 굳은 그의 얼굴은 몹시 비현실적이었다.
너무 완벽한 얼굴이라 오히려 더 범접할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가. 가서 애원하든, 죽이든지 해서 네 옆에 잡아 놔.”
다해의 치아가 덜덜 떨렸다.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보는 공포였다.
“네 마지막 동아줄이잖아, 석재현.”
“…….”
“곱게 보내 줄 때 네 발로 가.”
* * *
“특별할 건 없는데, 들어올래?”
소유가 수줍게 방을 안내했다.
태오는 씩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어릴 적 소유가 썼던 방이었다.
“취향은 어릴 때부터 이랬구나.”
이리저리 붙은 포스터와 자잘한 인형들과 귀여운 소품들이 지독히도 소유다웠다.
언제나 심플한 인테리어를 선호했던 태오였지만 이상하게도 소유만의 키치(kitsch)함은 사랑스러웠다. 정신이 사납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방에 이것저것 두면 혼자 있는 기분이 안 들어서 덜 외롭거든.”
“귀엽긴.”
뜬금없는 칭찬에 소유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나씩 소중하게 구경하던 태오의 눈에 볼이 빵빵한 어린 여자아이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 너야?”
태오가 액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놀란 소유가 다다다 달려가 태오의 앞을 막아섰다.
“보지 마!”
그러나 태오는 긴 팔을 이용해 가뿐히 액자를 집어 들었다.
“아, 보지 마. 제발.”
“너 진짜 귀엽다.”
예쁜 이목구비는 그대로였다.
하지만 찹쌀떡 두 개를 붙여 놓은 듯한 볼과, 소시지 같은 팔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너도 통통했던 시절이 있구나.”
소유가 액자를 뺏으려고 까치발을 들었지만 어림도 없었다.
태오가 팔을 뻗자 천장에 닿을 듯 까마득했다.
“아빠가 이것저것 몸에 좋다는 건 다 먹이셔서 그래. 미숙아로 태어났거든.”
그 마음이 너무 이해될 것도 같았다.
비쩍 마른 소유는 보는 사람이 다 초조할 만큼 약해 보였으니까.
“보기 좋다. 너 살 다시 찌우자.”
“뭐어? 장난치지 말고 얼른 줘.”
소유가 짓궂은 태오를 툭툭 치고 밀었다.
못 이긴 척 태오는 점점 뒤로 밀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동시에 푹신한 침대로 함께 쓰러졌다.
소유의 은은한 향이 태오를 감쌌다.
태오는 황홀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여기서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을 지경이었다.
태오의 위로 떨어진 소유가 당황해서 비키려고 하자, 태오가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사이는 더욱 밀착되었다.
“이거 나 선물로 주라.”
“싫어.”
“주는 게 좋을걸?”
“절대 싫어!”
흐음.
한쪽 눈썹을 찡긋 올리던 태오가 목을 빼꼼 들어 소유에게 짧게 입을 맞췄다.
눈이 동그래진 소유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속삭였다.
“뭐 하는 거야! 1층에 아빠도 계시는데.”
“그러니까 나 주라.”
“싫다니까?”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소유의 목을 아래로 끌어내린 태오가 이번엔 조금 더 길게 입을 맞췄다.
“난 말이야. 갖고 싶은 건 꼭 가져야 직성에 풀려. 그게 사람이든, 물건이든.”
그게 너든, 이 사진이든.
“당혹스럽겠지만 받아들여. 이게 네가 사랑하는 남자야.”
“무슨 그런 말을 그렇게 당당하게 해?”
“이렇게 당당해도 네가 날 미워하지 못할 거란 걸 아니까.”
뭔가 단단히 코가 꿰인 기분이다.
그럼에도 저를 미워할 수 없을 거란 말엔 반박할 수 없었다.
사실이니까.
태오가 소년처럼 웃으며 심통 난 소유의 볼에 입을 맞췄다.
단단한 그의 몸에 얼굴을 묻은 소유가 웅얼거렸다.
“짜증 나, 강태오.”
차분한 외부와 달리 폭풍이라도 온 듯 시끌벅적한 태오의 내부가 소유를 작은 배에 태워 달빛이 가득한 바다에 데려다 놓았다.
반짝이는 물결이, 그 주위를 날아다니는 작은 나비들이, 둥둥 떠다니는 등불이 소유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 주었다.
그 세상에서 소유는 마음껏 춤을 췄다.
그녀를 짓눌러 온 모든 과거를 벗어던지고서.
“대신 너만 봐야 해. 아무도 보여 주면 안 돼.”
“당연하지. 훔쳐보려는 놈들이 있으면 가만 안 둘 거야.”
어느새 소유는 킥킥 웃고 있었다.
아빠에게도 이 찬란한 세상을 보여 주고 싶다.
“크흠.”
그런 생각이 듦과 동시에 어색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겹쳐 있는 두 사람의 몸을 보며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희훈이 서 있었다.
깜짝 놀란 소유가 후다닥 태오의 위에서 일어났다.
“아, 아빠.”
마치 부모님 몰래 스킨십을 하다 들킨 10대 커플 같았다.
태오도 소유를 따라 일어나며 액자를 뒤로 감췄다.
애써 얻은 그의 보물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이상한 짓 안 했어.”
“알고 있어. 그러니까 더 수상하게 변명하지 않아도 된단다.”
아직 아이 같기만 한 딸을 보던 희훈이 천천히 태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안 바빠요?”
“너무 오래 있었나요? 죄송합니다. 금방 돌아가겠습니다.”
“그게 아니라 안 바쁘면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가라고.”
예상하지 못한 제안에 태오와 소유가 동시에 얼어붙었다.
“별 뜻은 아니고, 그냥 고마워서. 오늘 퇴원 도와준 거.”
* * *
“여기까진 어쩐 일이니?”
서령이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세리를 쳐다보았다.
소유의 독서회 데뷔 이후 두 사람은 줄곧 서먹서먹한 상태였다.
서령이야 딱히 아쉬울 건 없었지만, 세리는 아니었는지 먼저 자존심을 굽혔다.
“지난번엔 제가 너무 무례했던 것 같아서 사과드리려고 왔어요.”
세리는 제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공손한 표정을 지었다.
서령은 우아하게 차를 마시며 대답했다.
“사과까지 할 건 없다만, 앞으로 말조심을 해 다오. 그 아이를 무시하는 건 우리 태오를 무시하는 거나 다름없어.”
이왕 이렇게 된 거, 서령은 소유를 며느리로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을 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메마른 아들이 처음으로 좋아하는 여자라니 소유에 대한 반감이 서서히 줄어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네. 태오를 아끼는 누나로서 경계한다는 게 그만 선을 넘었던 것 같아요.”
이토록 마음에도 없는 말을 술술 내뱉을 수 있는 건 그녀가 어릴 적부터 가식을 떠는 방법을 잘 교육받아왔기 때문이다.
서령과 마찬가지로.
두 상류층 여자는 결이 비슷했다.
“앞으로 소유 씨와도 잘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그래 준다면 고맙겠구나.”
“태오가 참 처가에 헌신적이더라고요. 저는 좀 놀랐어요.”
“그게 무슨 말이니?”
순간 집 안의 공기가 바짝 당긴 낚싯줄처럼 팽팽해졌다.
“어머, 모르셨어요?”
세리가 놀란 척 과장된 몸짓을 지었다.
“그 집에서 태오를 무시하고, 하인처럼 여긴다는 걸 듣고 눈물이 날 뻔했답니다. 그 자존심 센 애가 그걸 다 당하고 있으니. 얼마나 대견해요?”
탁. 서령이 세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세리가 화가 난 서령을 만족스럽게 쳐다보았다.
“오늘 태오가 휴가까지 내고 그 집으로 달려간 거 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