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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성에 대한 이해도 (22/95)


22. 성에 대한 이해도
2022.06.13.



 


“우리 태오가?”

“네. 하인 노릇도 모자라 기사 노릇까지 자처한다고 하더라고요.”

겉보기엔 특별한 변화가 없어 보였으나, 사실 서령은 온몸에 강한 전류가 흐르는 정도의 극심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태오는 언제나 떠받들어지며 살아온 아이였다.

일부러 심부름 한 번 시키지 않고 키웠다.

차기 강화 그룹을 이끌 후계자로서 남들 위에서 군림하는 것에 익숙하게 키워야 하는 것이 당연하거니와 그와 별개로 서령은 제 배 아파 낳은 하나뿐인 아들을 몹시 아꼈다.

그런 아들이 강화 가(家)와는 감히 비교도 되지 않는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그런 취급을 받고 있다니.


“그 아이가 어째서?”

“그야 장인어른께서 반대가 극심하기 때문이죠. 어쨌든 소유 씨에게 결혼을 하라고 떠민 것이 공연옥 그 여자니까요.”

태오가 당장 이혼남이 된다고 해도,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 구애를 하는 여자들이 줄을 설 테다.


“거의 공연옥과 비슷한 취급을 받는 모양이더라고요.”

그런데 주제도 모르고, 뭐? 반대?


“소유 씨는 왜 가만히 있는지 모르겠어요. 아버지와 태오 씨 사이를 좀 조율해 주면 좋을 텐데.”

서령이 노여움에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귀걸이를 만지작댔다.

서령이 화가 났을 때의 버릇을 아는 세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혹시 소유 씨도 내심 즐기고 있는 거 아닐까요? 갑이 된 이 상황을. 을이 된 상대를 휘두르는 것에 쾌락을 느끼는 고약한 부류들 있잖아요.”

“…….”

지난 몇 달간 소유가 집안 행사에도, 각종 모임에도 모두 소홀했지만, 이해하려고 했다.

아버지 일로 정신이 없겠거니, 회사 일을 배우느라 바빴겠거니, 넘어가려고 했다.

웬만하면 소유의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려 주고자 했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을 몰아붙일 정도로 매정한 시어머니는 되지 않으려 했다.


“어머나. 제가 또 외람된 말씀을 드렸네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 이해의 시간이, 사랑하는 아들에겐 을의 시간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태오가 그런 취급을 받는다면, 소유에게 더 이상 너그러워질 이유가 없다.


“세리야. 미안하지만 오늘은 이만 가 주겠니?”

서령이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리는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어머니.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저는 태오가 이혼남이라고 해도 딱히 상관없답니다. 아시잖아요. 제가 어릴 때부터 태오 좋아한 거.”

만약 새로운 며느릿감을 찾는다면 이번엔 두말할 것 없이 제가 강력한 후보다.

태오에게 어필이 되지 않는다면 이 집안의 실세인 서령에게 어필하는 수밖에.


“그리고 저만큼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는 며느리가 어디 있겠어요?”

“…….”

“전혀 다른 환경에서 나고 자란, 평범한 여자들과는 차원이 다르겠죠. 전 어머니의 모든 취향에 맞출 수 있답니다.”

세리가 나간 뒤에 서령이 휴대폰을 집어 들어 태오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큰 사모님.

“태오한테 잠깐 집에 들러 저녁이나 먹고 가라고 하세요.”

서령은 제가 골라 준 원피스와 목걸이를 착용한 채 독서회 회원들에게 당당하게 인사를 하던 소유를 떠올렸다.

아들만 셋 있는 그녀에겐 나름 즐거운 경험이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소유에게 마음을 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아, 그게…….

그런데 그런 나의 성의를 이런 식으로 되갚아 주다니.


― 정말 죄송하지만, 오늘은 곤란할 것 같습니다.

“왜?”

― 오늘, 정희훈 사장님께서 병원 진료가 있는 날이라 동행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녁도 같이 드신답니다.

비서의 말은 세리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완벽하게 증명해 주었다.

서령의 손톱에 붙여 둔 큐빅이 빛에 반사되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마치 그녀의 화난 마음처럼.

* * *



“아빠. 아직 무리하면 안 돼요.”

“이 정도는 괜찮아. 넌 얼른 앉아 있어.”

소유는 직접 요리를 하려는 아버지의 주위를 졸졸 따라다니며 잔소리했다.

아무리 퇴원을 하고, 꾸준히 통원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소유는 그저 불안하기만 했다.

겨우 깨어난 아버지가 다시 쓰러질까 봐.


“너한테 내 손으로 만든 밥을 어찌나 먹이고 싶던지. 내가 몸이 나아지면 가장 하고 싶었던 일 중 하나란다. 의사 선생님도 말했잖아. 이제 슬슬 일상생활로 복귀해도 된다고.”

“하지만…….”

“그러니 방해하면 안 돼.”

아버지는 몹시 바빴고, 새어머니는 집안일엔 영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집엔 늘 가사도우미가 상주하고 있었다.

소유는 대부분 가사도우미의 밥을 먹고 자랐으나, 희훈은 틈이 날 때마다 가끔 직접 밥을 차려 주기도 했다.

소유는 고급 한식점 같은 가사도우미의 밥상보다 아버지의 소박한 밥상을 더 좋아했다.

언제나 맛있다며 엄지를 치켜들곤 했다.

희훈은 그 모습을 또 보고 싶었다.


“넌 앉아 있어. 내가 도와드릴게.”

결국 얌전히 있던 태오가 중재를 시도했다.

태오가 소유의 손을 잡고 다이닝 룸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곤 의자를 빼 그녀를 앉히곤 다시 주방으로 돌아왔다.

은근히 고집이 센 편인 소유를 단숨에 설득해 버린 태오를, 희훈이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손님인데, 소유랑 같이 앉아 있어요.”

“똑같은 말 반복해서 죄송하지만, 전 손님이 아니라 이 집 사위입니다.”

희훈은 능숙하게 칼질을 하며 물었다.


“그래서 할 줄 아는 요리는 있고?”

“……설거지라도 하겠습니다.”

제 요리 실력을 바로 객관화한 태오가 망설임 없이 팔을 걷어붙이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어차피 태오와 이야기도 좀 나누고 싶고, 다 쓴 조리기구는 바로 씻어 두는 편이 좋았기에 희훈은 별말 없이 허락했다.


“부모님이 보시면 화내는 거 아니실까 모르겠네. 귀한 장남이라 애지중지 키우셨을 텐데.”

“미국에 있을 때는 부모님 몰래 혼자 빨래도 하고, 설거지도 했었습니다.”

“미국?”

희훈이 칼질을 멈췄다.


“우리 소유도 미국에서 지낸 적 있는데.”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께서 직접 지어 주신 ‘Hazel’이란 이름까지.”

희훈이 고개를 돌려 설거지에 열중한 태오의 옆모습을 보았다.

반짝이는 눈망울, 긴 속눈썹, 높은 콧대까지.

장인어른으로서 괜히 불안해질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 뜻밖의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제 이름은 ‘Noah’였어요. Hazel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죠?”

“…….”

“그 영화, 저도 정말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헤이즐을 처음 만났을 때, 우습게도 우리가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소유를, 미국에서 본 적 있어요?”

“네. 엄밀히 말하면 제가 혼자 첫눈에 반했습니다.”

언젠가 딱 한 번, 스무 살이 갓 된 소유가 정체 모를 전학생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 있었다.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한국에 돌아와서도 자꾸 생각난다고.

그 후론 기억이 옅어졌는지 다시 꺼내진 않았지만.


“그래서 저는 간절했습니다. 아버님 말씀대로 전 공연옥이 남긴 가장 또렷한 흔적이겠지만, 제겐 이 결혼이 돌아 돌아 만난 첫사랑과의 재회였습니다.”

병원에서부터 집까지. 매일 자신을 찾아와 준 태오였지만 이런 깊은 대화는 처음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희훈이 대화를 피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연옥에 대한 분노가 컸고, 태오도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인물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우연이란 게, 참 신기하네.”

희훈이 호흡을 내뱉듯 작게 속삭였다.


“필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미국에서 우리 소유는 어땠죠?”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모두의 사랑을 받고, 인기가 많았어요. 전교생이 소유와 친해지고 싶어 했어요. 소유도 정말 행복하게 웃었고요.”

“……다행이네.”

한국에서와 달리 행복했었다니.

희훈이 태오에게서 등을 돌리고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 냈다.

태오는 그런 장인어른의 뒷모습을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비록 제게 매정하긴 했지만, 태오는 희훈을 미워한 적 없었다.

오히려 소유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줬음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강태오 씨를 보면 우리 소유가 미국에서의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릴 수 있을까?”

희훈도 소유와 마찬가지로 너무나 선한 사람이었다.

비열한 이들에게 이용당했을 뿐인 선하고 약한 존재들.


“그랬으면 좋겠네.”

그랬기에 태오는 소유와 희훈을 끝까지 지켜 내고 싶었다.

다시는 그런 비극에 휘말리지 않도록.


“인생을 살면서 한 번씩 곱씹어 보고 그리워할 수 있는 한 구절이 있다는 건 정말 좋은 거거든.”

“…….”

“소유의 그런 한 부분이 되어 줘서 고마워요.”

 

* * *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를 끝내고, 소유는 태오를 배웅하러 나왔다.


“입에 안 맞았지? 너는 맨날 비싼 음식만 먹고 살잖아.”

된장찌개와 달걀말이뿐인 식사가 성에 찼을 리 없다.

태오가 괜한 염려를 하는 소유의 양손을 잡고서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먹어 본 음식 중에 제일 맛있었어.”

“거짓말.”

“진짜야. 나 두 그릇이나 먹었잖아.”

입이 짧은 편인 태오가 밥을 두 공기나 비우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음식은 뭘 먹느냐보다 누구와 먹느냐가 제일 중요한 것 같아.”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소박한 식사는 태오의 인생에서 가장 맛있는 식사였다.


“넌 어떻게 그렇게 예쁜 말만 골라서 해?”

소유가 감동한 듯 태오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무서워.”

“뭐가?”

“다른 여자가 너의 이런 모습을 보고 반하면 어떡하지?”

“별걱정을 다 한다.”

어차피 다른 사람 앞에선 절대 보여 주지 않을 모습인데.

소유는 아직 자신의 두 얼굴을 보지 못했기에 이런 말을 하는 거겠지.


“네 앞에서만 이러는 거야.”

“아니야. 너를 조금만 알고 지내면 다들 알게 될걸? 네가 얼마나 착하고 다정한지.”

“…….”

고마운 오해가 굳어가는 중이다.

사랑하는 여자가 저를 좋게 봐 주겠다는데 굳이 부정할 생각은 없어 태오가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렇다고 치자.

내가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라고 치자.


“아, 맞다. 나 이거 아직도 가지고 있더라? 책상 서랍에서 찾았어.”

그러다 무언가가 생각이 났는지 소유가 주머니를 뒤적였다.

방에서 발견한 노아의 초대장이었다.

알록달록하고 입체적인 카드가 마치 어제 받은 것처럼 멀쩡했다.

정말 소중하게 보관해 왔기 때문이다.

태오가 반가운 물건을 활짝 펼쳐 보았다.

직접 쓴 손글씨가 눈에 보였다.

어릴 적 내 글씨는 이랬었구나. 지금은 많이 변했는데.


“아직 종이에서 향기도 나.”

소유의 말에 코를 가져다 대자 그녀의 말대로 은은한 향기가 났다.

그때 당시 한창 유행하던 향기 나는 종이로 만든 초대장이었다.


“신기하지?”

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오에게도 소유는 인생을 살면서 한 번씩 곱씹어 보고 그리워할 수 있는 한 구절이었다.


“이제 생각해 보니까 너 팔목 되게 아팠겠다. 몇백 장이 넘는 초대장을 손글씨로 일일이 썼을 거 아니야.”

얘, 진짜 바보인가.


“네 초대장에만 직접 썼어.”

“……어?”

“다른 건 그냥 컴퓨터로 인쇄했다고.”

자기 초대장만 특별했다는 걸 여태 모르고 있었어.


“정말?”

“난 그렇게 할 일 없는 놈이 아니었어.”

소유의 친구들의 리스트를 뽑고, 그녀들의 사물함에 초대장을 넣은 것도 모두 태오가 고용한 사람들이 한 일이었다.


“어차피 너만 오면 되는 파티였는데, 뭐 하러 다른 사람 초대장에까지 정성을 쏟겠어?”

그렇게 말하니 이 초대장이 더욱 소중해졌다.

소유는 초대장을 품에 꼭 안았다.

죽을 때까지 간직할 거야.


“그때 진짜 재밌었는데.”

“그럼 파티 한 번 더 할까?”

“응?”

“원한다면 또 널 위한 파티를 열어 줄게.”

사치스러운데 로맨틱하다, 이 남자.


“네가 가면을 쓰고 있어도 난 한 번에 알아볼걸?”

그러자 소유가 손으로 태오의 코와 입을 가렸다.


“나도 마찬가지야. 이 눈을 어떻게 못 알아봐. 다신 똑같은 실수 안 해.”

태오가 소유의 손바닥에 연달아 쪽쪽 입을 맞추며 말했다.


“다시 같이 살게 되면 파티 열자.”

“그런데 그런 날이 오긴 할까.”

소유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태오가 나서지 말라고 했으니, 아버지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소유는 안달이 났다.


“내 생각엔 금방 올 것 같아, 그런 날.”

“정말? 네가 어떻게 알아?”

태오가 소유의 팔을 끌어당겨 꼭 안았다.


“네가 방금 말했잖아. 누구든 나와 조금만 알고 지내면 반하게 될 거라고.”

“그래서 우리 아빠도 꼬셨어?”

“뭐, 거의?”

“못 하는 말이 없어, 진짜.”

능글맞은 태오의 말에 소유가 그를 툭 쳤다.


“남들은 밤에 헤어지기 싫어서 결혼한다는데, 우리는 결혼을 한 사이인데도 따로 자야 하니까 아쉽다.”

소유가 평소보다 어리광을 더 부렸다.

따로 사니까 날이 갈수록 애틋해지네.


“지금을 즐겨 둬. 우리가 다시 같이 살게 되면 넌 다른 의미로 힘들어 죽을 거야. 내가 안 재울 거거든.”

“무슨 말이야? 나를 왜 안 재워?”

순수하게 되묻는 소유를 보며 태오가 씩 웃었다.


“그런 게 있어, 아기야.”

“너랑 나랑 동갑이야.”

“동갑인데 달라.”

“뭐가?”

 

 


“음, 성에 대한 이해도가?”

또 새빨개진다.

소유의 얼굴이.

확 깨물어 버리고 싶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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