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 나 잡아먹을래? (24/95)


24. 나 잡아먹을래?
2022.06.20.



 
희훈은 고 이사와 오랜만에 밤낚시를 떠났다.

덕분에 두 사람에겐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태오는 퇴근을 하자 마자 곧바로 유아 물산 앞으로 달려갔다.

날이 저문 것도 모르고, 내부는 분주했다.

사장과 이사가 자리를 비웠음에도 회사가 무사히 돌아갈 수 있는 것은 모두 소유가 있는 덕분이었다.


“내일까지 네고 폭 정리해서 주실래요?”

“네, 팀장님.”

몇 시간 전, 소유에게도 정식 직함이 생겼다.

그녀는 수년간 공석이었던 자원팀의 팀장이 되었다.


“B/L은 잘 보관해 주세요.”

“네. 그러겠습니다.”

배운 대로 잘하고 있군.

태오는 기척을 내지 않고 잠시 서서 일에 열중한 소유를 구경했다.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사람은 섹시하다고 했다.

아니다. 그냥 소유 자체가 섹시한 건가.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 사이 탕비실에 다녀오던 신입사원이 우두커니 서 있는 태오를 발견했다.


“어, 어…….”

순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듯 어버버 대는 신입사원을 대신해 태오가 앞으로 나섰다.


“다들 수고가 많으시네요.”

갑작스러운 인사에 다들 하던 일을 멈추고 태오를 바라보았다.

그중 가장 놀란 것은 소유였다.

급한 일을 처리하느라 약속 시간이 지난 것도 몰랐던 탓이었다.


“고생들 하시는데, 제가 딱히 도와드릴 수 있는 건 없고 커피 한 잔씩 드시고 하세요.”

태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와 고급 테이블을 뚝딱 설치했다.

‘커피 한 잔’이라기에 일반적인 테이크 아웃 커피 정도를 생각했던 직원들의 입이 턱 벌어졌다.

커피를 내려 주는 전문가가 따로 있었고, 케이크는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하고 다양했다.

이 작은 회사에 케이터링이라니. 외조 한번 무시무시하게 하네. 역시 재벌은 재벌이야.

직원들이 스케일에 감탄하고 있는 사이 소유는 태오에게 달려갔다.


“뭘 이렇게까지 준비했어.”

그래도 내심 고마운지 소유가 태오의 손을 꼭 잡았다.


“팀장 승진 기념 턱은 쏴야지. 뷔페까지 부르려다가 참았어.”

직원들이 우르르 달려가 카페인과 당을 충전했다.

좋아하는 직원들을 보니 소유에게도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태오야, 고마워.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

“앞으로 기대해. 내가 외조가 뭔지 제대로 보여 줄게.”

태오가 장난스럽게 으름장을 놓자 소유가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웃었다.

그때, 직원 몇 명이 다가와 대표로 태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고맙습니다.”

“앞으로 우리 소유 잘 부탁드립니다.”

“에이, 정 팀장님이라면 저희가 도와드릴 것도 없죠. 이미 너무 잘하고 계시는데.”

이미 연옥을 겪은 직원들에게 소유는 두말하면 입 아픈 좋은 상사였다.


“그럼 이만 소유 좀 데려가도 될까요? 원래 오늘 저녁에 데이트를 하기로 했거든요.”

소유는 모두가 바쁜 와중에 홀로 퇴근하려니 마음이 불편하다.


“당연하죠! 정 팀장님, 오늘 저희보다 훨씬 일찍 나와서 일하셨어요. 이만 퇴근하셔야죠.”

하지만 오히려 직원들은 선뜻 소유를 보내 주었다.

누구보다 고생한 그녀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신입사원이 소유의 외투와 가방까지 직접 챙겨 왔다.

태오는 그것을 받아들며 속삭였다.


“마음 바뀌기 전에 얼른 도망치자.”

장난스러운 태오를 툭 치던 소유는 그에게 끌려 회사 밖으로 나갔다.

향기로운 커피 냄새와 달콤한 케이크 맛을 음미하던 직원 중 하나가 말했다.


“……그런데 재벌이 저렇게 잘생기고 키까지 큰 데다, 목소리까지 좋으면 불공평한 거 아니에요?”

거참, 세상 혼자 사시네.


“내가 말했지. 신은 없다니까?”

“아니면 신께서 편애가 심하시든가.”

 

* * *



“태오야. 나 이제 월급도 받아.”

소유가 안전벨트를 채워 주는 태오에게 자랑하듯 말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받아 보는 월급이었다.


“그러니까 오늘 저녁은 내가 살게.”

태오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면 좀 뜯어먹어 볼까.”

“응. 나 다 뜯어먹어도 돼.”

그러다 태오의 시선이 문득 소유의 눈가에 닿았다.

남들은 알아차리지 못할 미세한 변화도 태오의 눈엔 모두 보였다.

일부러 꾸며낸 듯한 높은 목소리와, 약간 부은 눈까지.


“아까 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응?”

태오의 입꼬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자 놀랍도록 분위기가 바뀌었다.

무표정의 태오는 소유조차 움찔할 정도로 서늘했다.


“너 오늘 울었어?”

“…….”

거짓말에 능숙하지 못한 편인 소유가 멈칫했다.


“눈이 좀 부어 보이길래.”

찬물로 그렇게 오랫동안 세수를 했는데 어떻게 알았지.

종일 얼굴 맞대고 일한 직원들도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무슨 일 있어? 이번엔 또 누구야? 어머니? 임세리?”

고민하던 소유가 고개를 저었다.

태오가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지면 나한테 말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나?”

“견딜 수 없을 정도는 아니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건 맞네.”

“…….”

태오의 유도 신문에 넘어가 버린 소유가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쉬었다.


“난 이제 우리가 그저 정략결혼이라느니 계약 결혼이라느니 그런 말장난에 묶인 사이가 아닌 것 같은데.”

“그건 당연히 맞지. 서로 사랑하니까.”

소유는 행여나 태오가 상처받을까 봐 그의 손을 꽉 잡고 대답했다.


“부부 사이엔 비밀이 없어야 된다고 생각해, 난.”

“태오야.”

이젠 태오가 부탁해도 이 손을 놓을 수 없었다.

태오가 사라진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제가 생각한 모든 미래에 태오가 있었고, 모든 결말에 태오와 함께였다.


“나도 너를 많이 좋아해. 네가 내게 마음이 식었다고 하면 최선을 다해 매달리고 싶을 정도로. 그러니까 절대 안 헤어질 거야.”

평생 노아와, 태오와 함께할 것이다.


“다만 내가 슬펐던 건 내가 미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야. 정말 사랑받고 싶었는데. 해 주신 만큼 돌려드리고 싶었는데.”

“…….”

“처음이란 말이야. 엄마처럼 내 옷 정성스럽게 골라 준 사람. 기죽지 말라고 혼내 준 사람.”

엄마와의 추억이 전혀 없는 소유에겐 소중한 경험이었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의 소유를 애달피 보던 태오가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미안해. 예민해져서.”

힘들어지면 소유가 훌쩍 제 곁을 떠나 버리진 않을까 지레 겁을 먹고 소유를 너무 몰아붙였다.


“그런데 나만으로는 부족할까? 내가 두 배, 세 배로 널 사랑해 주면 안 될까?”

다른 사람의 변심에 상처받지 않게끔 내가 더 사랑해 주면 안 될까.

상처는 제가 받았건만, 자신보다 더 아픈 표정을 짓는 태오를, 소유가 와락 끌어안았다.


“충분해. 넌 이미 충분히 나를 많이 사랑해 주고 있어. 그냥, 그냥 내 욕심이 과했던 거겠지.”

“소유야.”

“그러니까 넌 지금 여기에 그대로 있어 주면 돼.”

목덜미에 소유의 뜨거운 숨이 닿았다.


“오해가 있으신 것 같아. 그래서 조금만 더 시도해 보려고. 오해를 풀려고 노력해 보려고. 미련이 없어질 때까지.”

소유를 이토록 상실감에 잠기게 했을 인물들을 천천히 떠올렸다.

그러다 한 인물이 태오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래도 변함이 없으시다면 더는 슬퍼하지 않고 깔끔하게 포기할게.”

임세리.

이상하게 자꾸 둘 사이에 끼어들고, 교묘하게 소유와 저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려고 했다.

아마 이번 일에도 어느 정도 세리가 관련이 되어 있을 테다.

지금까지는 그녀가 무어라 떠들고 다니든 귀찮아서 내버려 뒀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태오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자꾸 성가신 짓을 한다면 태오의 눈에도 거슬릴 수밖에 없다.


“응? 그러니까 조금만 두고 봐 줘.”

딱히 가치가 없어서 무시하고 있던 걸, 자신을 너그럽게 봐주고 있다고 착각하면 곤란한데.

소유에게는 보이지 않는 태오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렇다고 내가 흔들릴 일은 없을 테니까.”

“알았어.”

태오는 순순히 대답했다.

방금 막 타깃이 바뀌었으니까.


“정말?”

의외라는 듯 소유가 태오를 떼어 놓고 되물었다.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차가운 얼굴은 지워낸 지 오래였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돈이 든 봉투를 주면서 나랑 헤어지라고 한다면?”

“태오, 너 아침드라마도 보는구나?”

언제 적 구닥다리 수법이야.

방금까지 울적했다는 것도 잊은 소유가 킥킥 웃었다.

태오와 있으면 모든 걱정거리를 밀어 둘 수 있어서 좋았다.


“음…… 이렇게 말할래. 저도 돈이라면 있어요.”

“엄청 고된 시집살이를 시킨다면?”

“너도 엄청 고된 처가살이를 당할 거라고 알려 줘야지.”

당찬 소유의 말에 태오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잘한다, 내 새끼. 그럼 일단 해 봐. 난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네가 그러고 싶다면.”

“고마워, 내 새끼.”

애 취급하지 말라니까 자꾸 애 취급을 하기에 똑같이 돌려주자 태오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내 새끼?”

“그래. 내 새끼. 나는 네 새끼. 너는 내 새끼.”

“많이 컸네, 우리 Hazel.”

“이젠 점점 늙어가는 중 아닐까?”

태오가 얄미운 소유의 양 볼을 꾹 눌렀다.

그러자 소유가 붕어 입이 되어 뻥긋했다.

태오는 튀어나온 소유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가 꾹 눌렀다.

소유는 멀뚱멀뚱 얼굴을 내어주고 있다가 태오의 귓불을 툭 건드렸다.

태오가 저를 빤히 쳐다보자 소유가 까르르 웃었다.


“너한테 배운 거.”

네가 지금 웃을 때가 아닐 텐데.

가여운 소유는 곧 닥칠 제 처지도 모른 채 맑게 웃었다.


“고 이사님이 그러는데, 내가 되게 빨리 배운대. 학습 능력이 좋은 건지.”

“흐음. 그래?”

태오가 한쪽 눈썹을 의미심장하게 치켜올렸다.


“그럼 우리 진도 좀 더 나가 볼까?”

“뭐? 오늘은 데이트하는 날이잖아.”

소유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아무리 공부가 재밌다고 한들, 데이트를 제쳐 놓으면서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오늘은 아빠도 없는 날인데.


“그리고 내가 맛있는 거 사 준다니까?”

“내가 진짜 맛있는 거 알아.”

“어떤 거? 그때 그 레스토랑 스테이크?”

“오늘 장인어른 안 들어오시지?”

“뭐, 그러시겠지?”

아빠가 안 들어오시는 거랑 음식이랑 무슨 상관이지?

대답을 하면서도 소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태오는 귀여운 소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외박해도 되는 날이네?”

“응. 들키지만 않으면. 그런데, 태오야. 우리 뭐 먹으러 간다고?”

“나.”

“……뭐?”

“나 잡아먹을래?”

“…….”

 

 
소유가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너한테만 특별히 허락해 줄게.”

“나, 나 내릴래.”

어림도 없다는 듯 태오가 조수석 문을 쾅 닫았다.

소유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우리 태오, 사랑스럽지만 가끔 무서워.


“다른 쪽도 진도 좀 나가 보자.”

태오가 운전석에 올라탔을 때 소유는 얼굴뿐만 아니라 손등, 귀, 목까지 빨갛게 변해 있었다.


“태오야. 그런 야한 말은 늘 준비하고 다니는 거야? 나한테 하려고?”

“아니. 그냥 순간의 생각을 솔직히 내뱉는 것뿐인데?”

“……너 변태야?”

소유가 심각하게 물었다.

태오는 차를 부드럽게 출발시키며 물었다.


“그걸 이제야 알다니.”

“맙소사.”

소유가 작은 동물 같은 비명을 지르며 도로 손바닥 안으로 숨어 버렸다.


“태오야. 나는 아직 적응이 안 돼. 나 너무너무 부끄러워.”

“처음엔 누구나 그렇지.”

“이런 게 어른들의 사랑이라면 미룰래. 순수한 Noah가 좋아.”

“Noah 죽었다.”

애초에 그 노아 시절에도 별로 순수했던 적은 없지만.


“아, 귀여워라. 내 새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