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아찔한 감각
(25/95)
25. 아찔한 감각
(25/95)
25. 아찔한 감각
2022.06.24.
소유는 태오에게 끌려 신혼집 안으로 들어왔다.
떠난 지 몇 달이나 되어서인지, 그리운 기분이 물씬 들었다.
태오와 함께 오르내렸던 계단, 처음으로 말을 놓았던 다용도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던 다이닝 룸.
소유의 눈썹이 팔자로 변하더니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태오와의 추억이 깃들지 않은 공간이 없었다.
우리 집. 내 집.
이제야 깨달았다.
아버지와 행복하게 살았던 그 집은 이제 과거의 집일 뿐이다.
현재 소유가 살고 싶었던 집은 바로 이 집이다.
왕자와 결혼한 신데렐라가 옛집으로 돌아가지 않듯이.
옛집은 이따금 빛바랜 추억을 떠올리기 위한 용도, 그것이면 되었다.
“다녀왔습니다.”
소유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잘 왔어.”
태오도 소유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그녀를 꼭 끌어안고 대꾸해 줬다.
“이제야 집이 좀 집 같네.”
태오가 소유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며 말했다.
매일 홀로 이 집에 들어서야 했던 그도 적잖이 외로웠을 테다.
“우리 무슨 로미오와 줄리엣 같다. 사랑하는데 떨어져서 살아야 하고.”
“심지어 부부인데 말이야.”
태오의 슬픈 농담에 소유가 웃을 수 없었다.
“아빠가 요즘 부쩍 너에 대해 많이 물어보셔. 나한테 잘해 주냐, 성격은 어떠냐, 바람기는 없냐.”
그건 즉 태오를 사위로 받아들일 준비 중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어쩌면 오늘의 밤낚시도 마음을 정리하기 위한 여행일지도.
아버지는 무언가 큰 결정을 할 때마다 고 이사님과 밤낚시를 떠나곤 하셨으니.
“조만간이야. 꼭 같이 살자. 같이 잠들고, 같이 일어나서, 같이 밥 먹자. 조금만 더 기다려 줘.”
태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장인어른을 제대로 꼬셨다면 다행이고.”
태오가 꼬시고 있는 건 비단 장인어른만이 아니었다.
이미 충분히 넘어온 와이프도 쓸데없이 유혹 중이다.
소유의 눈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깨달은 태오가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고 그녀에게로 스윽 다가갔다.
소유도 그를 받아들이려고 마음을 다잡는데,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꼬르륵.
소유의 배에서 나는 소리였다.
민망해진 소유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애써 무시하고 태오가 다시 다가갔지만, 불청객은 더욱 요란하게 떠들었다.
꼬르륵. 꼬르륵.
“……배가 그렇게 고팠어?”
쥐구멍이 있다면 당장 머리부터 욱여넣었을 거야.
소유가 배를 움켜쥐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밥부터 먹자고 했잖아. 아침부터 굶었단 말이야.”
태오가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래. 먹자. 밥부터.”
“아니야.”
그러자 소유가 다급하게 팔을 붙잡았다.
“무시해도 돼. 그냥 하던 거 마저 해.”
태오를 더 이상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고, 스스로도 태오와 더 가까워지길 바랐다.
하지만 이번엔 태오가 고개를 젓고 재킷을 벗었다.
“어떻게 무시해? 내가 머릿속에 그런 것밖에 없는 줄 알아?”
“……아니었어?”
“너를 사랑하니까 하고 싶은 거지.”
이 상황에서 이렇게 로맨틱한 말이 나올 일인가.
“하고 싶어서 너를 사랑하는 건 아니야.”
그리고 태오는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부엌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태오의 재킷을 꼭 끌어안은 소유가 그를 졸졸 따라갔다.
태오는 찬장을 뒤져 파스타 면을 꺼냈다.
요리를 해 주겠다고?
강태오가?
“너 요리 잘해?”
“아니, 못 해.”
뭐 이렇게 당당해.
“그럼 내가 할게.”
“넌 잘해?”
“……아니, 못 해.”
하필 또 둘 다 요리 바보네.
“그럼 앉아 있어. 그나마 파스타가 쉬울 것 같네. 설마 내가 이거 하나 못 하겠어?”
면도 있겠다, 소스도 있겠다.
그냥 때려 넣고 끓이면 되는 거 아니야?
“맛없어도 다 먹을게.”
“그렇게까지 기대 안 한다는 얼굴은 안 해도 되잖아.”
가만 보면 은근히 사람 상처 잘 준다니까.
하지만 소유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
오늘은 내가 진짜 맛있는 저녁 대접하고 싶었는데!
“얼른 가서 앉아.”
“태오야. 나중에 내가 꼭 근사한 저녁 살게.”
“알았다니까.”
어디서 본 건 있어서 냉장고에서 양송이버섯과 새우 등을 꺼내 준 소유가 태오의 말대로 부엌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 앉았다.
“손 조심해.”
태오는 어디서나 위엄이 넘치는 캐릭터였지만, 오늘만큼은 물가에 내놓은 애 같았다.
커다란 몸으로 고군분투하며 꼼지락대는 뒷모습을 목이 빠져라 보고 있던 소유가 소리 없이 웃었다.
엄청 열심히 하네.
뭐, 유명 셰프가 해 준 음식이 아니더라도 이것도 이것대로 즐겁긴 했다.
아니지. 어떻게 보면 유명 셰프 음식보다 강태오 음식이 더 먹기 힘들지.
“아. 뜨거워.”
“조심해, 태오야!”
물론 그 과정이 몹시 우당탕탕이긴 하지만.
태오가 손가락을 부여잡자 소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약 가지고 올까?”
“아니야. 괜찮아. 편히 쉬어. 종일 일하느라 고단했을 텐데.”
……마음이 전혀 편하지 않은걸.
태오는 찬물에 데인 손가락을 식히고서 꿋꿋하게 요리를 이어 나갔다.
“너 파스타 면이 제대로 익었는지 어떻게 확인하는 줄 알아?”
“몰라. 직접 먹어 봐야 아나?”
“잘 봐.”
자신만만하게 말한 태오가 파스타면 하나를 건져 냅다 벽으로 던졌다.
그러자 가여운 면이 벽에 철썩 달라붙었다.
“봤지? 이러면 다 익은 거야.”
별거 아닌 일에도 소유는 박수를 치며 까르르 웃었다.
“우와, 대단하다.”
사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태오를 위해 모른 척해주었다는 건 죽을 때까지 비밀이다.
뿌듯한 표정으로 태오는 소스와 재료를 한데 넣고 볶았다.
“Thank you for awesome dinner, Noah.”
요리가 마무리되어 갈 때쯤 소유가 작게 속삭였다.
예쁜 볼에 담으니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태오가 그것을 들고 다이닝 룸으로 나가자 소유도 물 두 잔을 들고 따라 나갔다.
“먹어 봐.”
소유의 손에 포크를 쥐여 준 태오가 기대하는 눈으로 말했다.
소유는 다짐했다.
맛없어도 무조건 맛있는 척해야지.
저 반짝이는 눈을 실망시킬 순 없어.
태오만큼이나 긴장한 소유가 파스타 면을 돌돌 말아 입에 넣었다.
잠시 오물거리던 소유의 눈이 동그래졌다.
“왜? 뜨거워? 맛없어?”
괜히 조급해진 태오가 대답을 재촉했다.
“아니, 맛있어.”
진짜 맛있어.
엄청 맛있어!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정말 맛있어.
“태오야. 너 요리에 재능 있나 봐!”
그제야 안심한 태오가 제 몫의 파스타를 말아 한 입 밀어 넣었다.
소유의 말대로 재능이 있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먹을 만했다.
다행이다.
태오는 볼에 소스까지 묻히고 허겁지겁 먹는 소유에게 자신의 것을 덜어 주었다.
“천천히 먹어. 체해.”
소유가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불렀다.
“나 요리 배울까?”
새우의 꼬리를 떼서 소유의 앞에 놓아 주던 태오가 불쑥 말했다.
열심히 입을 움직이던 소유가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바쁜데 웬 요리?”
“너 맛있게 먹는 거 보니까 기분 좋아서. 다른 음식도 해 주면 좋잖아. 이런 거 말고 진짜 대단한 음식.”
평생 남이 해 주는 음식을 받아먹을 줄만 알았지, 그 반대의 처지가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태오는 생경했다.
하지만 이것도 나쁘진 않았다.
내가 한 요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맛있게 먹어 주었을 때 얼마나 기쁜지 처음 깨달았다.
사랑이라고 하면 남녀 사이의 육체적 관계만 생각하던 태오의 세상이 넓어지고 있었다.
사랑이란 건, 생각보다 더 풍부하고 섬세한 감정이었다.
태오는 점점 더 윤택해지고 있었다.
“너 보기보다 되게 가정적이구나.”
“가정적인 게 아니라 그냥 네가 웃는 게 좋아서. 바보야.”
“…….”
“다른 사람이랑 결혼했으면 절대 이런 생각 안 들었을 거야.”
“그런 말 할 땐 예고 좀 해 줘. 넌 내 심장에 너무 해롭단 말이야.”
픽 웃은 태오가 냅킨으로 소유의 볼에 묻은 소스를 닦아 냈다.
“고마워. 이런 사랑 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사랑해 줘서.”
“받아도 돼.”
소유가 태오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시야에 시뻘겋게 변한 손가락이 보였다.
아까 데인 상처일 테다.
“아프겠다.”
“그럼 뽀뽀 한번 해 줘.”
소유가 쓰라릴 부위에 쪽 입을 맞췄다.
그러자 태오가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거기 말고, 여기에.”
태오가 가리킨 곳은 입술이었다.
“넌 가끔 우리가 소꿉놀이라도 하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인데, 우리 진짜 부부야.”
제 실수를 깨닫고 멋쩍게 웃은 소유가 태오에게로 걸어갔다.
그러곤 드물게 적극적으로 태오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따뜻한 저녁에 대한 보상이었다.
태오의 팔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좋아. 너무 좋아.
그와 더 깊어지고 싶을 만큼 좋았다.
설령 아주 아파진다고 하더라도 좋았다.
소유가 먼저 나서서 끈적하게 굴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농염하게 변했다.
이윽고 태오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싼 소유가 입술을 떼고 짧게 비명을 질렀다.
“이제 배부르지?”
이번엔 태오의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했다.
소유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떨어진다. 꽉 잡아.”
태오는 무겁지도 않은지 소유를 안은 채로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다 먹은 그릇 치워야 하는데.
내일 되면 눌어붙어서 닦기 힘들 텐데.
“나한테 집중해.”
현실적인 걱정을 하는 소유를 알아차린 태오의 숨결이 그녀를 마구 헤집어 놓았다.
그렇게 정신을 빼놓는 통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태오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망설임 없이 침실이 있는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간 태오는 발로 문을 쾅 열었다.
소유를 대신해 주던 쿼카 인형을 옆으로 치워 버리고 그 자리에 조심스럽게 소유를 눕혔다.
소유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태오를 올려다보았다.
오늘만큼은 이 순진한 얼굴에 안 넘어가.
“태오야.”
소유가 제 위로 올라온 태오의 팔을 끌고 왔다.
“여기 만져 봐.”
얘가 진짜 사람 미치게 하려고 환장했나.
이리저리로 날뛰는 태오의 본능도 알지 못한 소유가 그의 손을 제 가슴팍 위에 올려 두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네가 자초했다. 난 몰라.”
처음이라 조금 더 조심스럽게 하고 싶었는데.
결국 참지 못한 태오가 흉포하게 그녀에게로 달려들었다.
소유의 아랫입술을 핥고, 숨결을 모아 내부로 파고들었다.
낯선 무드에 당황했지만, 소유는 곧 적응했다.
온몸이 간지러운 듯한 아찔한 감각이 그녀의 몸을 잠식했다.
소유의 입에서 호흡 같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태오는 소유욕 가득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사랑해.”
“…….”
“I love you, Hazel.”
두 가지의 언어로 사랑 고백을 듣다니, 오늘은 정말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소유는 몸을 일으켜 태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태오의 손은 빠르게 소유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어 냈다.
언뜻 보이는 그녀의 뽀얀 피부에 더욱 안달이 났다.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는 태오의 입술을 느끼며 소유는 그와의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의 나날들을 떠올렸다.
부정하고 있었지만 사실 나는 무례했던 너와의 이런 장면을 상상하고 있던 건 아닐까.
처음부터.
너의 차가운 시선에 오히려 나는 달아오르기 시작했던 것이 아닐까.
너의 사람이 되었음에 기뻐했던 것이 아닐까.
마침내 태초의 모습이 된 두 사람이 정욕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I love you too, Noah.”
그 말을 시작으로, 소유에겐 다소 가혹한 밤이 시작되었다.
태오는 무자비하게 여린 소유를 안았다.
소유에게 작은 생채기들이 생겨났다.
그럼에도 너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