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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너 그러다 정말 죽어 (26/95)


26. 너 그러다 정말 죽어
2022.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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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꿈을 꿨다.

화려한 불꽃 아래의 헤이즐과 노아.

하지만 그 전과 살짝 달라진 점도 있었다.

헤이즐은 용기를 내어 노아의 가면에 팔을 뻗었다.

노아는 가만히 얼굴을 내어주며 헤이즐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까만 가면을 벗겨내자 스물아홉의 태오보다 얼굴선이 옅고 젖살이 통통한 소년 노아가 있었다.

헤이즐이 노아를 보며 활짝 웃었다.

이제 헤이즐은 소원이 없었다.

노아의 얼굴을 봤으니.

새로운 불꽃이 연달아 터지며 두 사람의 찬란한 시작을 축하해 주었다.

아, 행복해.

정말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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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자면서 왜 웃는 거야?”

붕 떠올랐던 마음이 현실적인 목소리에 곧바로 가라앉았다.

꿈은 끝났다.

헤이즐은 다시 소유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하, 왜 남의 행복한 꿈을 방해하고 난리람.

소유가 인상을 팍 쓰며 눈을 떴다.

그러자 바로 코앞에 있는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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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이야.”

아침부터 너무 가까운 거 아니니?

콩깍지가 제대로 씐 건지 사람이 하루 중 가장 추한 순간이라는 자다 깬 모습조차 태오는 너무 멋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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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는 소유를, 태오가 심각하게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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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거 아니니까 좀 떨어져 줄래?”

난 너와 달리 자다 깬 모습이 엉망이란 말이야.

슬며시 퉁퉁 부은 눈을 가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뭐가 이렇게 허전하지?

그러다 이불 아래를 툭 내려다보고선 깜짝 놀랐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 보인 것이다.

그건 옆에 있는 태오도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뒤늦게 어젯밤, 태오와 했던 낯부끄러운 행위가 떠올랐다.

맞아! 나 어제 태오랑 했었어.

그거.

그거…….

그거…….

정신이 돌아오자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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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좀 보여줘 봐.”

소유의 마음도 모르고 태오는 이불 속에 파묻힌 소유를 감자처럼 캐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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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 하지 마!”

그럴수록 소유는 더욱 깊이 숨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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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눈 감고 있을 테니까 너 먼저 옷 입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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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볼 거 다 본 사이에, 무슨.”

새삼스러운 소유의 내외에 태오는 헛웃음을 지었다.

진도를 늦춰 줄 순 있지만, 이미 지나온 진도를 돌이켜 줄 순 없다.

에라, 모르겠다.

태오는 소유의 말을 어기고 소유를 이불 채로 끌어안았다.

숨 막히면 알아서 나오겠지.

태오는 소유의 귀가 있을 법한 지점에 대고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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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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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팠어.”

그러자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제대로 듣지 못한 태오가 다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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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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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팠다고!”

귀여운 대답에 태오가 킥킥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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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더 노력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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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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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익숙해질 정도로 시도해 보자.”

잠시 후 태오의 예상대로 숨이 찬 소유가 이불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머리가 산발이 되어 있었지만, 태오의 눈엔 마냥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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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옷 입어.”

소유가 보챘다.

태오는 소유의 얼굴을 끌고 와 쪽 입을 맞췄다.

원래 아침에 더 불끈하는 법이지만, 어제 충분히 무리한 소유를 생각해서 애써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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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 돌아 있어.”

옷을 다 입은 태오에게 으름장을 놓고서 소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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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

그러자 익숙하지 않은 통증이 느꼈다.

이게 익숙해진다고?

어정쩡한 걸음으로 걸어간 소유가 아무렇게나 던져진 옷을 주워 입었다.

그 사이 태오는 몸을 본래의 상태로 돌려 두고 그런 소유를 빤히 구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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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제 먹은 접시도 다 씻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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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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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붙은 파스타 면도 떼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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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너무 순순히 대답하는 태오가 이상해 고개를 돌리자 바로 태오와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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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내가 뒤돌아 있으라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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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끼리 왜 그래야 하는 건데. 내 와이프 내가 보겠다는데.”

능글맞게 말하는 태오를 쫓아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태오는 다이닝 룸에서 제게로 폴짝 뛰어드는 소유를 꼭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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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내 새끼.”

그러곤 온 얼굴에 뽀뽀를 퍼붓고서야 놓아줬다.

그러는 동안 심통 난 소유의 마음은 스르르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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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 설거지나 하자, 얼른.”

정소유 마음 풀어 주는 게 세상에서 제일 쉬웠어요.

태오가 흡족하게 웃으며 테이블 위의 접시를 차곡차곡 접어 주방으로 향했다.

고작 파스타 하나 했을 뿐인데, 모아 두니 꽤 설거짓거리가 많았다.

태오가 거품을 묻히고, 소유가 헹궈내는 작업을 했다.

눌어붙은 음식물을 떼어내는 작업이 쉽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란히 서서 하자 그 지겨운 집안일마저 즐거웠다.

태오가 고군분투하며 어제의 흔적과 싸웠다.

덕분에 하얗고 예쁜 거품이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그 거품을 잡으며 놀던 소유가 고단한 몸을 태오에게 기댔다.

태오가 키가 커서 이런 점이 좋았다.

언제 기대든 듬직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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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안 돼? 내가 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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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다 했어.”

소유에게 힘든 일을 시키기는 싫은 듯 태오가 고집을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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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려. 그래도 재밌다. 우리 진짜 신혼부부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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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다.”

겨우 음식물을 떼어내는 것에 성공한 태오가 그것을 소유에게 내밀었다.

덕분에 소유는 편히 거품만 헹궈 내면 끝이었다.

뽀득뽀득 소리가 나는 접시를 차곡차곡 개수대에 겹치고 있을 때쯤, 테이블 위에 둔 휴대폰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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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수건에 손을 닦은 소유가 휴대폰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태오의 표정이 굳었다.

헤어져야 할 시간임을 직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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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아빠.”

예상대로 발신인은 장인어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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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벌써 집에 왔어?”

곧 소유도 입술을 삐죽이며 태오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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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아침에 잠시 회사에 나왔어요. 지금 다시 집으로 가요.”

소유가 어설픈 거짓말을 하고 있는 사이 태오는 홀로 설거지를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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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서 봐요.”

소유가 통화를 끝내고 휴대폰을 툭 내려놓았다.

태오는 애써 아쉬움을 감추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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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워 줄게.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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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오야.”

소유가 울먹이며 말했다.

놀란 태오가 다급하게 달려가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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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울어, 갑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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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집에 가기 싫어.”

소유가 태오를 꽉 끌어안았다.

태오가 달래듯 소유의 등을 토닥였다.

보내기 싫은 건 태오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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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여기가 우리 집인데.”

하지만 딸을 보내는 힘겨운 과정 중에 계신 장인어른을 보챌 생각은 없다.

후에 후회가 되지 않도록 충분히 시간을 드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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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 저녁에 집으로 갈게. 장인어른이랑 같이 저녁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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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야? 약속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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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약속.”

태오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고작 몇 시간의 이별이건만 부부는 영겁의 헤어짐을 하듯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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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기다리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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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 * *

소유의 집으로 가기 전, 태오는 잠시 들를 곳이 있었다.

그는 클로버 어패럴 본사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태오가 온다는 연락을 받은 세리는 중요한 회의조차 내팽개치고 태오를 마중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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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오야!”

세리는 설렘에 가득 찬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사실 세리는 놀랐다.

작정하고 서령과 소유 사이를 이간질하긴 했지만, 태오가 이토록 빨리 반응할 줄이야.

어쩌면 벌써 서령이 아들을 설득하는 것에 성공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취급을 받으면서까지 수준에 맞지 않는 결혼을 이어 나갈 필요는 없노라고.

모두 정리하고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결혼을 하라고.

그녀는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순간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차에서 내리는 태오는 무표정이었다.

상관없다. 태오는 원래 잘 웃는 편이 아니니.

세리는 애써 위안을 하며 태오의 앞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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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웬일이야, 여기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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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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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인 거 알아? 네가 먼저 나 찾아온 거.”

태오가 한숨을 쉬듯 짧게 웃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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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이 있어서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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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뭔데?”

세리가 태오의 손을 잡으려 팔을 뻗었다.

그러자 태오가 더러운 것과 닿았다는 듯 손을 뺐다.

그제야 세리도 표정이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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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잊은 게 있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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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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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고백에 대답을 안 해 줬던 것 같은데.”

세리는 고등학교 때 태오에게 직접적으로 고백한 적이 있었다.

너를 좋아한다고.

돌아온 건 무반응이었다.

태오는 거절도, 긍정의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것도 못 들은 듯 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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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옛날이야기는 왜 하고 그래. 과거보다는 현재가 중요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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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과거가 중요하지. 제대로 매듭짓지 않은 과거가 나중에 어떤 식으로 탈이 나는지 확실히 깨달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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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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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내 몸 만지지 마.”

소유에겐 쉽게 허락되던 몸이 세리에겐 어림도 없었다.

그런 점에 순간 화가 났으나 세리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태오는 누가 봐도 겁먹을 정도로 매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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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좋아한다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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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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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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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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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나 싫다고.”

‘미안하다.’도 아니다.

‘누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아니었다.

너무나 매정하게도 ‘싫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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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앞에 더는 안 보이면 좋겠어. 네가 벌레보다 혐오스러우니까.”

순간 세리가 휘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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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랑 사랑할 바엔 평생 불구로 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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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 태오야. 왜 그렇게 심하게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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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배려한답시고 참아 줬더니 네가 네 처지를 전혀 모르는 것 같아서.”

세리는 상황이 이렇게까지 진행되고 나서야 알았다.

태오의 무시는 나름의 배려였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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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소유 건드리면 너 진짜 내 손에 죽어.”

그저 협박을 하기 위한 빈말이 아니었다.

그의 눈에선 정말 저를 죽일 수 있다는 살의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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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로 대접해 줄 때 어지간히 해.”

세리는 묻고 싶었다.

네가 그토록 사랑하는 그 여자도 너의 이런 모습을 알고 있느냐고.

무자비하고, 흉포한 모습을 알고도 사랑하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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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걱정을 다 한다.”

세리의 마음을 읽었는지 태오가 한껏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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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는 평생 이런 모습 볼 일 없을 거야.”

세리가 눈을 감자 눈물이 연달아 흘러나왔다.

다른 사람도 아닌 첫사랑에게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들었으니 온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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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임세리.”

세리가 털썩 주저앉았다.

태오가 그녀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곤 그녀와 눈높이가 맞도록 몸을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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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조심해야지. 너도 네 부모님한텐 소중한 외동딸인데.”

태오의 눈동자는 언제나 그렇듯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우수가 아닌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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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그러다 정말 죽는다?”

혀를 차던 태오가 몸을 바로 세우고 뒤돌아 걸었다.

소유와의 약속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이다.

태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를 몰고 떠났다.

정작 태오는 제게 손 하나 대지 않았는데, 세리는 두려움에 몸을 작게 떨었다.

그 와중에도 역설적으로 태오가 얼마나 소유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는지 실감이 나서 슬펐다.

어쩌면 태오는 제 목숨보다도 소유를 아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안 하던 짓을 연이어 하고 있으니까.

원래 태오의 성격이라면 이런 일은 귀찮아서 일일이 반응도 안 했을 테다.

그런 그가 직접 움직여 제 힘을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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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정소유도 네 진짜 모습을 안다면 겁먹고 도망치고 말걸?”

고작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태오가 떠난 흔적에 대고 그렇게 말하는 것뿐이다.

두려웠다.

평생의 짝사랑을 앞지를 만큼 거대한 공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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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네가 감춘 비밀을 들켰으면 좋겠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 너도 느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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