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키스를 위한 빌드 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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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키스를 위한 빌드 업
2022.07.01.
태오가 고르는 식당은 실패하는 법이 없었다.
은근히 맛집 전문가라니까.
태오는 스테이크를 먹기 편한 크기로 잘라 소유의 접시에 놓아 주었다.
소유는 아버지 눈치를 보다가 슬쩍 그것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음, 맛있어.
“너희 어제 같이 있었지?”
그러다 별안간 날아든 희훈의 질문에 소유가 사레가 들려 캑캑댔다.
그쯤이야 예상했다는 듯 태오는 덤덤하게 소유의 등을 토닥여 주며 대답했다.
“네. 죄송합니다.”
소유의 어설픈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을 리가 없으니까.
희훈은 딸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일 테다.
“죄송할 건 없지. 부부 사이에.”
하지만 이어진 말엔 태오도 놀란 듯 잠시 말을 잃었다.
희훈이 겸연쩍은지 시선을 내렸다.
“내가 너무 욕심이 과했나 보네. 뭐가 진짜 내 딸을 위한 건지 모르고.”
소유가 포크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를 너무 오래 떨어뜨려 놨어.”
희훈이 소유와 닮은 얼굴로 포근하게 웃었다.
“우리 딸은 너무 착해요.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도 못 할 정도로. 이기적으로 키우고 싶었는데 혼자 그렇게 커 버렸어. 모자란 아빠랑 지내느라고 철이 일찍 들어 버렸어.”
그의 눈엔 딸을 사랑하는 감정이 오롯이 보였다.
“자네에게 미안한 마음에, 끝을 내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런 거라면 내가 대신 끝을 내 주자고.”
희훈의 손이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작고 보드라운 딸의 손을 잡았다.
“어쩌면 나의 못남을 자네에게 화풀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자네는 이렇게나 우리 소유를 아껴 줬는데. 내가 미안해요.”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이제 둘이 같이 살아. 좋은 시간, 나로 인해 방해당하지 말고.”
소유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투명한 눈물은 기어이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아빠.”
소유가 아버지에게로 달려가 안겼다.
어느 때보다 애달피 울었다.
희훈은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당신은 공연옥이 남긴 가장 또렷한 흔적이라고 했던 말, 취소할게요.”
정작 공연옥 그 여자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건 저인지도 모른다.
“당신은 원래부터 소유의 안에 굳건하게 있던 존재였으니까.”
덩달아 희훈의 코끝도 찡해졌다.
희훈이 뒤늦게 사위를 애정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누군가에겐 감히 바라보지도 못할 사람, 또 누군가에겐 경외심을 가지게 할 사람, 또 누군가에겐 다소 무서울 사람.
그런 대단한 사람이 소유에겐 한없이 연하게 굴어 주니 기특하고 기꺼웠다.
“그럼 2차는 우리 집에서 할까? 고 이사가 사위로 맞기 전 마지막 확인은 하라고 하더라고. 술버릇 말이야.”
태오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못난 아빠지만 남들 하는 건 다 해 보고 싶어서. 내겐 자식이 하나뿐이니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잖아.”
“당연히 그러셔야죠. 귀한 딸, 이상한 남자한테 보내면 안 되니까.”
* * *
소유를 먼저 재우고, 두 남자는 술잔을 두고 마주 앉았다.
“비싼 위스키만 마시는 거 아닌가? 소주도 괜찮겠어요?”
“소주도 좋아합니다. 그리고 이제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럴까?”
“저도 장인어른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희훈이 태오의 잔에 소주를 따라 주며 말했다.
“그러게, 강 서방.”
순간 태오는 만감이 교차했다.
강 서방.
저 세 글자를 얻기 위해 얼마나 부단히 노력했던가.
살면서 특정한 호칭을 위해 이토록 애를 써 본 적이 없었다.
현재로서는 ‘강 부사장’이라는 대단한 직함보다도 더 가치가 있었다.
비로소 소유와 진짜 가족이 된 느낌이었다.
태오는 병을 받아 들고 두 손으로 희훈의 잔을 채웠다.
“우리 소유, 행복하게 해 주게.”
“더 이상 걱정하지 않으시게 잘살겠습니다.”
그건 태오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고 싶은 약속이었다.
꼭 희훈의 말 때문이 아니라 제가 가장 바라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소유와 행복해지는 것.
“보기 좋으면서도 쓸쓸하네. 나한테도 아들놈 하나 있었으면…….”
소유가 떠난 집은 조용하고 쓸쓸할 테다.
희훈이 소주를 한번에 들이켰다.
장인의 소주잔을 다시 채워 주며 태오가 말했다.
“딸이 어딘가로 가 버린 게 아니라, 아들이 하나 생긴 거라고 생각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빈말이라도 고마운 사위의 말에 희훈이 희미하게 웃었다.
“장인어른을 제 아버지라 생각하며 효도하고 싶습니다. 외롭지 않으시게 소유랑 자주 놀러 오고. 오늘처럼 밥도 같이 먹고.”
“강 서방 같은 재벌을 부담스러워서 어떻게 아들로 생각하나.”
희훈이 농담을 하며 껄껄 웃었다.
“진심입니다. 아들로 대해 주세요. 잘못하면 호되게 혼내고, 적적하면 이렇게 술잔도 함께 기울이고.”
“…….”
“저희 아버지와는 그런 정을 쌓아 본 적이 없거든요. 매일 바쁘신 분이라. 집안에 관심이 없으시기도 했고. 게다가 부모님 사이까지 나쁘니, 집안 분위기가 화목하겠습니까.”
그래서 내심 소유와 희훈의 관계가 부러웠다.
염치없이 쏙 끼고 싶을 정도로.
“우리 소유가 술 상대가 되어 줄 수 있는 배우자가 아니긴 하지? 워낙 주량이 약해서.”
희훈이 태오를 배려하기 위함인지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한층 더 따뜻해져 있었다.
“제 엄마 닮아서 그래. 그 사람도 술을 잘 못 했어요.”
“정말 미인이셨겠어요. 소유와 닮았으면.”
“두말하면 입 아프지. 근방의 학교에서 제일 예뻤어. 오죽하면 내가 통학 버스에서 말을 걸었겠어?”
빡빡머리 학생으로 돌아간 희훈은 생각만 해도 달콤했던 그 시절을 떠올렸다.
남의 일엔 전혀 관심이 없는 편인 태오였지만 희훈의 러브스토리는 흥미로웠다.
두 남자는 풋풋했던 사랑을 안주 삼아 쉬지 않고 술잔을 기울였다.
어느새 테이블엔 초록색 술병이 늘어갔다.
하얀 편이었던 희훈의 얼굴도 슬슬 빨갛게 변해 갔다.
“그런데 강 서방은 왜 취하질 않나?”
“아직 견딜 만합니다.”
“이래서야, 원. 술버릇을 볼 수가 있어야지. 이러다가 내가 먼저 취하겠네.”
그 말과 동시에 희훈의 고개가 테이블 위로 툭 떨어졌다.
“장인어른.”
“…….”
“괜찮으세요?”
희훈을 깨워 보던 태오가 술 냄새가 짙게 나는 한숨을 쉬었다.
사실 그도 취기가 오르려던 참이었다.
희훈의 앞에서 필사적으로 참았을 뿐.
정신을 깨기 위해 눈을 깜박이고, 볼을 툭툭 치던 태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희훈을 조심스럽게 부축해 침실까지 모셔드리고, 자신은 미리 준비된 손님방이 아닌 소유의 침실로 올라갔다.
소유는 신혼집보다 좁은 침대에 등을 돌린 채 잠들어 있었다.
“좁으니까 더 좋네.”
태오는 좁은 침대를 핑계 대며 소유에게로 쓰러졌다.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소유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깜짝이야.”
“기다리지도 않고 진짜 혼자 자냐? 치사하게.”
태오가 남들에겐 절대 보여 주지 않는 애교 섞인 얼굴로 어리광을 부렸다.
“취했어?”
“아아니.”
“취했는데?”
“맞아. 사실은 취했어.”
술에 취한 태오는 맨정신일 때와 묘하게 달랐다.
“그런데 여기로 오면 어떡해. 손님방으로 가야지.”
왠지 아직은 아버지가 계신 집에서 같은 방을 쓰는 것이 민망해 소유가 그를 쫓아내려고 했다.
“몰라. 몰라. 나 취했다니까? 어지러워서 못 가겠어.”
“그렇게 어지러운데 계단은 어떻게 올라오셨대?”
소유가 태오와 마주 보며 누웠다.
귀여워. 내 새끼.
영상으로 남겨 두고 싶을 정도로 치명적인 귀여움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평생 모를 귀여움이라 생각하니 더 귀여웠다.
“조금만 누워 있다가 술 깨면 내려가.”
귀여운 것엔 장사가 없다고 내가 못 이긴 척 한발 물러나는 수밖에.
“알았어. 그런데, 소유야.”
“응?”
“나한테 술 냄새 심하게 나?”
“술 마셨으니까 술 냄새가 나지?”
당연한 질문을 하는 태오에게 소유가 당연한 대답을 해 주었다.
그러자 태오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그럼 나 너한테 키스하면 안 돼?”
태오는 나름 심각한데 그만 웃음이 나와 버렸다.
지금까지의 것들이 다 키스를 위한 빌드 업이었다니.
“응? 안 돼?”
“안 된다고 하면 안 할 거야?”
“아니?”
“뭐야. 그럼 왜 물어?”
소유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하긴 할 건데, 네가 안 된다고 하면 내가 쪼오금 슬플 것 같네? 나는 네 입에서 술 냄새가 나도 언제든지 키스할 수 있거든.”
“정말 강태오답지 않은 말이야.”
“나다운 게 뭔데?”
“그만 귀여우라고.”
소유가 찹쌀떡 같은 태오의 볼을 마구 주물렀다.
“그리고, 난 안 된다고 한 적은 없어.”
“뭐?”
“나도 술 냄새가 나도 상관없다고. 너를 향한 내 사랑이 겨우…….”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태오가 성급하게 다가왔다.
어찌나 강한 부딪힘이었던지 서로의 치아가 닿을 정도였다.
소유가 맹수를 조련하듯 등을 토닥였다.
물론 술에 취한 태오에게 별 소용이 없었다.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소유였지만 덩달아 몽롱해졌다.
태오에게 남아 있던 알코올 향이 소유도 취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잠시 후 태오가 입술을 뗐을 때, 소유의 눈은 반쯤 풀려 있었다.
“사실 이게 내 술버릇인데.”
태오의 엄지가 소유의 입술을 닦아 냈다.
“술에 취하면 평소보다 더 너를 안고 싶고, 입 맞추고 싶고 그런데.”
“…….”
“이걸 장인어른께 보여 드릴 순 없잖아. 그래서 안 취한 척했어, 나.”
“잘했어. 잘했어, 우리 태오.”
확실히 이런 모습은 부모님께 보일 만한 모습이 아니긴 하지.
낯부끄러워서, 원.
“소유야. 장인어른이 나보고 ‘강 서방’이라 그랬다?”
“진짜야?”
소유가 기쁨에 눈이 커졌다.
“응. 너 다시 만난 이후로 이렇게 기뻤던 적은 처음이야.”
“정말 잘됐다!”
이제 나만 어머니와 화해하면 되겠네.
좋은 기분의 태오를 망치지 않기 위해 뒤의 말은 속으로 삼켰다.
“그동안 진짜 고생했어. 자존심도 많이 상하고, 피곤했을 텐데. 버텨 줘서.”
서령의 말대로 태오는 어디 가서 그런 취급을 받을 사람이 아니다.
오로지 저를 사랑하면서 겪어야 했던 수모들이다.
잘못은 공연옥이 했는데, 왜 벌은 너도 같이 받고 있는 것만 같은지.
“나도 진짜, 진짜 장인어른한테 잘해 드릴 거야. 아들처럼.”
“우리 아빠, 아들 없다고 가끔 슬퍼하셨는데 좋아하시겠다.”
“같이 밤낚시도 가고, 술도 마시고.”
이번엔 소유가 먼저 태오에게 입을 맞췄다.
재잘재잘하는 입술을 보고 있자니 견딜 수가 있어야지.
본능은 태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유에게도 똑같은 본능이 있었다.
그녀는 이제 본능을 당당하게 표출하는 법을 배웠다.
“너 건드리고 싶다.”
태오가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안 돼, 오늘은.”
그것만큼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내일이면 집에 가잖아. 조금만 참아.”
“그래. 가자, 우리 집으로.”
내일이면 밤마다 헤어지지 않아도 되고, 매일 함께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
티격태격 싸울 수도 있고, 밤늦게까지 영화를 보며 수다를 떨 수도 있다.
원하면 언제든지 입을 맞출 수 있었고, 서로를 원할 수 있었다.
생각만 해도 설레는 일의 연속이었다.
“우리 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