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그만큼 널 사랑한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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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그만큼 널 사랑한다는 거지
2022.07.04.
“늦어서 죄송합니다.”
소유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장내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서령의 은은한 미소가 그쳤다.
소유는 첫 등장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땐 단아한 재벌가 며느리였다면, 지금은 젊은 여성 CEO의 모습이었다.
깔끔한 정장에, 매트한 립스틱을 바른 그녀는 원래부터 이 모임의 일원이었던 마냥 자연스러웠다.
“요즘 바쁘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와야죠. 우리 어머니께서 이끌고 계신 모임인데요.”
“아무리 중소기업이라도 규모가 갑자기 커져서 운영이 쉽지가 않죠?”
“제가 다 하나요. 아직 아버지도 현역이시고, 도와주시는 분이 많답니다.”
멀찍이서 그런 소유를 바라보던 서령이 서늘하게 웃었다.
서령과 눈이 마주친 소유는 저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묵례를 하고 시어머니에게로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다음엔 더 일찍 오도록 하겠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이곳에 발을 들였지?”
서령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누구의 허락이 있어야만 올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뭐야?”
“저를 이 모임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주신 건, 다름 아닌 어머니니까요.”
“너 지금 그 작은 회사 하나 물려받았다고 안하무인으로 구는 거니?”
서령이 코웃음을 쳤다.
제아무리 유아 물산이 무서운 성장 속도를 보인다고 해도 감히 강화 그룹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건 영리한 소유도 알고 있을 텐데.
“그런 게 아닙니다.”
소유는 그 주의 책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서령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머니께 예쁨받으려고 애쓰는 겁니다.”
서령이 고개를 비스듬하게 둔 채 소유를 응시했다.
처음 봤을 때의 나약함을 모두 벗어던진 그녀는 완전히 딴 사람 같았다.
서령이 그토록 바라던 며느리의 모습이긴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
“그럴 필요 없다. 난 한 번 버린 사람에겐 다시 눈길을 주지 않아.”
“하지만, 저랑 태오는 절대 이혼 안 할 거예요.”
서령이 다리를 꼬며 붉은 입술을 늘어뜨렸다.
그녀가 각설탕 하나를 집어 찻잔 속에 집어넣었다.
각설탕은 흔적도 없이 그 안에서 녹아 버렸다.
“그래? 그런데 어쩌지. 우린 잘난 사업가 며느리가 아니라 집안을 위해 헌신할 며느리가 필요한데.”
“…….”
“구시대적이라고 생각해도 소용없단다. 그게 네가 그토록 예쁨받고 싶어 하는 우리 집안의 현실이니까.”
예로부터 강화 가(家)는 그랬다.
물론 처음엔 서령도 그 시대착오적인 분위기를 깨부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편한 결혼 생활을 위해서 그녀는 자신의 꿈을 접었고, 남편보다 튀지 않게 행동했다.
둘째를 낳지 못하는 것에 따른 불이익을 모두 감수하라는 압박을 받으면서도 혼자 삭힐 수밖에 없었다.
그때 이 집안에 모든 정이 떨어졌지만, 하나뿐인 아들 태오를 위해 참았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독서회 모임 시간도 못 맞추는 네가, 며느리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겠니?”
너보다 훨씬 대단한 출신의 나도 깨부수지 못한 전통이었어.
그런데, 나보다 가진 게 없는 네가 과연 깨부술 수 있겠니?
“아이를 가지기 전에 헤어져라. 너를 위해서 하는 마지막 조언이다.”
“…….”
“태오가 헤어지지 않겠다고 하면, 네가 태오에게…….”
“하겠습니다, 며느리 역할.”
맹랑한 목소리가 서령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뭐라고?”
“하겠습니다, 어머니가 바라시는 며느리 역할.”
서령은 흥미로운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이 아이는 이따금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튄다.
“아버지 회사는 어쩌려고?”
“제가 둘 다 해내면, 제 이야기를 한 번만 들어 주세요. 오해하고 계신 부분이 있어요.”
“둘 다 해내겠다고? 꿈도 크구나. 현실감각이 없는 건지.”
소유는 대기업 며느리의 실상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이 틀림없다.
“해 보겠습니다. 이혼을 하는 것보다는 덜 힘들 것 같으니까. 그리고 구시대적인 전통이라면, 어머니와 제 선에서 끊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령이 차를 마셨다.
각설탕의 단맛이 서령의 혀끝을 맴돌았다.
우습게도 전혀 다른 부류의 저 아이에게서 자신의 패기 있던 젊은 모습이 보였다.
“그래? 정 그렇다면 기회는 줘야지.”
궁금해졌다.
이 가진 것 없는 아이가 저처럼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말지.
아니면, 자신이 못 한 일을 이루어 낼지.
그건 아들의 일과는 별개로, 강화 가(家)의 같은 이방인으로서 궁금해지는 부분이었다.
“다음 주 주말, 본가로 오거라. 김장을 하는데, 네가 빠지면 안 되지.”
“네. 그럴게요.”
그것만으로도 기쁜지 소유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아,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날 남편은 출입 금지란다. 나는 딱히 상관없지만, 거기에 있는 다른 더 구시대적인 마나님들이 난리가 날 거야.”
어디 한번 견뎌내 보라지.
“마음 준비 단단히 하고 오렴. 적어도 500포기는 할 테니까.”
“……500포기요?”
“뭘 그렇게 놀라니? 일가가 나눠 먹으려면 그 정도는 해야지. 재벌이라고 다 김치를 사 먹거나, 아랫사람을 시켜 담그지 않는단다. 그것 또한 강화만의 ‘전통’이지.”
험한 일을 하는 남자들에게 김치만큼은 우리 손으로 해 먹이자는 게 강화 그룹 창업주의 어머니였던 명숙희 여사의 철학이었다.
“도망치려거든 조금이라도 빨리 도망치는 게 좋을 거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진서령 여사는, 이 집안에서 그나마 정상적인 사람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 * *
500포기.
500포기.
500포기.
그 어마어마한 숫자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태오에게 말하면 분명 가지 못하게 할 것이 분명하기에 비밀로 해야 할 것 같다.
그나저나 허리는 남아날까.
하지만 도망치진 않을 거다.
태오와 평생 함께하기로 약속했으니까.
“낯짝도 두껍지. 여기 올 줄이야.”
그때, 누군가가 소유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따라 유독 조용히 구석에 앉아 샴페인만 홀짝거리던 세리였다.
“보기보다 겁이 없나 봐요. 진서령 여사한테 개길 줄도 알고.”
“취하셨네요, 세리 씨.”
“세리 씨? 아, 웃기네. 태오 아니었으면 날 쳐다보지도 못했을 평민이 감히 내 이름을 다 부르고.”
세리는 감춰 왔던 재벌의 특권 의식을 여과 없이 마구 드러냈다.
이젠 일일이 이런 것에 대꾸할 힘도 없었다.
“더 실수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세요.”
“아, 하긴…… 겁이 없으니까 그 괴물 같은 강태오 옆에 붙어 있겠지.”
무표정이던 소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를 욕하는 건 어떻게든 참겠지만, 태오를 욕하진 마세요.”
“너 지금 나 째려봤냐? 째려보면 어쩔 건데.”
소유가 한숨을 쉬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취한 사람을 계속 상대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무시하고 가야 하는 건지.
“잘 들어. 넌 강태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순간 그날의 일이 떠오른 세리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넌 그 새끼한테 속고 있는 거라고.”
“무슨 말이죠?”
“넌 강태오의 진짜 모습을 못 봤잖아. 그 잔인하고, 끔찍한 모습을.”
사람의 목숨을 벌레의 목숨처럼 여기던 그 냉혈한을.
“지금이야 한창 좋을 때라 필사적으로 감추고 있겠지. 하지만 마음이 식고, 익숙해지면? 언젠가 진짜 모습은 드러나게 되어 있어. 그날이 오면 내 말이 이해될 거야. 네가 얼마나 위험한 남자랑 살고 있는지도.”
세리를 물끄러미 보던 소유는 손을 들었다.
그러자 저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세리의 기사가 달려왔다.
“많이 취하신 것 같으니까, 모셔다드리세요.”
“네.”
기사에게 끌려가면서도 세리는 입에 담지도 못할 막말을 이어 나갔다.
“나중에 네가 강태오 손에 죽으면 조문은 가 줄게.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소유는 뒤로 돌아 단정하게 묶었던 머리를 풀었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그건 지금껏 그녀가 느껴 본 분노 중 최고의 농도였다.
“즐길 수 있을 때 즐겨 둬.”
* * *
집에 도착해서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아무리 취했다고 해도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가 있지.
구두를 던지듯 벗고 있는데, 2층에서 태오가 내려와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잘 다녀왔어?”
태오의 품은 따뜻하기만 했다.
얼어 버렸던 마음을 모두 녹일 만큼.
소유는 태오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 쥐고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얼굴이 안 좋네.”
“…….”
“어머니가 너한테 나쁜 짓이라도 했어?”
하지만 아무리 봐도 세리가 말했던 냉혈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 아침과 다름없이 사랑스럽고, 다정한 얼굴일 뿐이다.
대답이 없는 소유가 더욱 걱정되는지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랑 우리 집안 때문에 너무 힘들어?”
소유는 태오가 더 시무룩해지기 전에 팔을 뻗어 그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이렇게 함께 안고만 있어도 하루의 피로가 모두 풀리는 기분이다.
“그런 거 아니야. 어머니랑 이야기 잘했고, 어떻게 노력해야 할지 대충 방향도 잡았어.”
“그런데 표정이 왜 안 좋아?”
“아, 오다가 어떤 미친 여자가 헛소리를 하길래. 그거 생각하느라.”
“무슨 헛소리였는데? 너한테 해코지는 안 했어?”
태오는 소유를 떨어뜨려 놓고, 작은 생채기라도 없나 곰곰이 살펴보았다.
소유는 그런 태오를 보다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안 했어. 나 멀쩡해.”
“무슨 말을 했길래 그래.”
“말 안 할래. 말해봤자 기분만 안 좋아. 우리 소중한 태오 귀는 내가 지켜 줘야지.”
소유가 발꿈치를 들어 태오의 귓가에 입을 쪽 맞췄다.
그러자 귀엽게도 귀가 빨갛게 변했다.
신혼부부는 손을 잡고 사이좋게 주방으로 들어왔다.
“나 오늘 좀 멋진 커리어우먼 같아?”
“당연하지. 누구 와이픈데.”
“다행이다. 너무 긴장돼서 청심환까지 먹었는데,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어. 어머니를 다루는 법을 조금은 알겠어.”
어렵진 않았는데 배는 고팠다.
소유는 냉장고에서 이것저것 꺼내 한 입씩 베어 물었다.
빵과 과일, 우유 등이 순식간에 테이블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배고프면 밥해 줄게.”
“아니야. 기다릴 힘도 없어. 그냥 대충 먹고 얼른 뻗어 잘래.”
태오는 소유에게 새로운 빵 껍질을 까 주며 볼에 묻은 빵가루를 털어 냈다.
“으, 이건 별로 맛없어.”
“그럼 그건 나 줘. 내가 먹을게.”
태오는 소유가 먹다 남긴 초코빵을 받아 들어 대신 먹었다.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그런 작은 부분에서도 태오의 애정이 느껴졌다.
“남이 먹다가 남긴 거 은근 잘 먹는다, 너.”
“남이 아니라 네가 남긴 거라 먹는 거야. 난 네가 씹다 뱉은 것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뭐야. 더러워.”
“못 할 것 같아? 이리 줘 봐.”
태오가 장난스럽게 소유의 볼을 꾹 눌러 붕어 입을 만들었다.
소유는 정말 그가 입안의 빵을 가져갈까 봐 필사적으로 꿀꺽 삼켰다.
“우리 태오는 가끔 너무 저돌적이야.”
“그만큼 널 사랑한다는 거지.”
연달아 웃음이 나왔다.
특별한 이벤트도 없는데.
그저 평범한 일상일 뿐인데.
“그래서, 내가 뭐 도와줄 건 없고?”
초코빵을 반쯤 먹었을 때 태오가 물었다.
소유는 고개를 저었다.
“약속 지켜. 내가 우리 아빠랑 네 사이에 참견 안 했듯이, 너도 어머니와 나 사이를 그저 지켜봐 주기로 한 거.”
“어머니가 널 너무 힘들게 하면?”
“그래도 참아. 버틸 수 있으니까.”
소유가 장난스럽게 아까 전 태오의 말을 인용했다.
“그만큼 널 사랑한다는 거지.”
태오가 보조개가 폭 들어가도록 웃었다.
소유는 그런 태오를 빤히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 앞에서의 태오는 어떤 모습인지 모른다.
세리의 말대로 내가 모르는 모습이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 앞에선 변함없이 이 모습일 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의 말 때문에 흔들릴 일은 없어.
내겐 눈앞의 네가, 그냥 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