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금단증상
(2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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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금단증상
2022.07.08.
지난 몇 주간 다해의 삶은 처참했다.
한순간에 다해의 운명을 바꿔 놓을 만큼 거센 격동이었다.
희훈을 직접 찾아가 다시 빌어 봤지만, 냉정하게 외면만 당했다.
‘너에게까지 험한 꼴 보이고 싶지 않다. 나가거라, 지금 당장.’
그가 퇴원하던 날 했던 말이 그저 화가 나 내뱉은 빈말이 아니었다.
희훈은 정말 더는 다해를 보고 싶지 않다는 듯 굴었다.
그렇게 다해가 찜질방을 전전하는 사이 소유는 유아 물산의 자원팀장이 되어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다해는 참을 수 없는 시샘에 발을 동동 굴렀다.
딱히 노력을 하는 건 없었지만 소유가 가진 거라면 뭐든지 다 가지고 싶었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남은 동아줄은 딱 하나다.
그녀의 오랜 남자 친구였던 재현.
그와 사귈 때만 해도 의사 부인이 되어 떵떵거릴 생각에 미래에 대한 걱정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그의 전공은 성형외과다.
몇 년 후, 강남역 근처에서 개원만 한다면 망할 수가 없는 미래를 가진 남자다.
다해는 남은 돈을 모두 털어 택시를 탔다.
재현이 근무하는 곳은 대형 대학병원이었다.
여러 번 들락거렸기에 다해는 망설임 없이 성형외과 병동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오늘 밤 동안 경과 봅시다. 당직한테 꼭 인수인계해 주고.”
“네, 알겠습니다. 석 선생님.”
예상대로 재현은 그곳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그는 의학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주인공 같아 환자와 보호자들도 힐끔 쳐다보고 지나갈 정도였다.
어딜 감히.
다해가 그들을 휙 째려보고서 재현을 불렀다.
“재현아!”
다해의 부름을 듣자마자 재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뒤로 돌았다.
다해는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어머, 석 선생님. 여자 친구 오셨네요…….”
아는 체를 하던 간호사가 말을 흐렸다.
언제나 명품 옷, 진한 화장으로 기를 누르던 다해는 어디 가고, 초라한 모습의 여자만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이야기 좀 해.”
“나 지금 일하는 중이야.”
“너 왜 전화 안 받아? 불안하게?”
재현이 한숨을 쉬었다.
“정다해.”
“나 임신했어.”
순간 병실이 조용해졌다.
“그런데 아빠라는 사람이 잠수를 타 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중간에 낀 간호사가 서둘러 스테이션으로 돌아갔다.
다해가 씩 웃었다.
잃을 게 없는 자를, 잃을 게 많은 자가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이야기 좀 하자고, 응?”
재현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괜찮아. 그래도 난 너를 사랑해.
다해는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넥타이를 하고 있던 열 살의 재현을 떠올렸다.
유치하고 까불거리는 남자애들만 봐 왔던 다해에겐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그때부터 다해는 결심했다.
커서 저 점잖은 아이와 결혼을 하겠노라고.
“따라와.”
화를 꾹 눌러 담은 재현이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내뱉었다.
다해의 돌발행동을 막기 위해 그녀를 비상계단으로 데려갔다.
“넌 딸이 좋아, 아들이 좋아?”
“헛소리 그만해.”
재현이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다해의 표정도 차갑게 변했다.
“그러게 전화를 받지 그랬어. 또 스테이션에서 난리 났겠네. 우리 훈남 석 선생님이 여자 친구를 임신시켜 놓고, 어쩌고저쩌고…….”
“정다해.”
“우리 다시 시작하자. 좋았잖아.”
“분명히 이야기했지만 우린 이미 헤어졌어.”
“아니. 너 혼자 헤어졌지.”
다해가 서늘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 모습은 마치 공연옥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난 동의한 적 없어.”
순간 재현은 섬뜩해졌다.
자신도 희훈과 같은 함정에 빠질까 봐.
“왜? 소유 그 계집애한테 환심 살 때는 덜컥 사귀자고 하더니 이제 내가 필요 없어졌니? 그럼 내가 순순히 물러날 줄 알았어?”
“…….”
“내가 모를 것 같았니? 네가 좋아하는 건 내가 아니라 정소유라는 거. 단 한 순간도 날 좋아해 준 적 없다는 거.”
다해가 손을 뻗어 의사 가운을 만족스럽다는 듯 쓰다듬었다.
“그래도 괜찮아, 재현아. 난 다 이해해. 그러니까 날 책임져.”
재현은 냉정하게 그녀의 손을 내쳤다.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 나는 이제 집도 없어졌고, 주머니엔 600원뿐이야.”
“돈이 없으면 아르바이트라도 해. 이 주변에만 나가도 아르바이트 자리는 널렸어.”
“어머, 재현아. 나 그런 거 못 해. 그런 건 정소유처럼 독한 애들이나 하는 거지. 나처럼 곱게 자란 애들이 어떻게 하겠니?”
그 말에 재현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마치 자신이 태생부터 부유한 집안의 딸인 척하는 것이 우스웠기 때문이다.
그녀가 밑바닥 생활에서 벗어난 것은 희훈과 연옥이 재혼을 했던 19년 전부터였다.
11살까지 그녀는 술집 마담인 연옥의 밑에서 험하게 자라 왔을 테다.
“우리, 결혼하기로 했었잖아. 예정대로만 하면 돼. 어?”
재현은 더 이상 거북한 다해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다신 찾아오지 마. 그리고 임신이라느니 헛소리하면서 사람 우습게 만들면 고소할 줄 알아.”
재현은 매정하게 말하고서 비상계단 문을 열었다.
그러나 다해는 마지막까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제 가운 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는 다해의 손길에 재현이 한숨이 쉬었다.
“너 진짜…….”
“소유, 이제 그 남자랑 다시 살아.”
“…….”
하지만 이어진 말에 재현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다해는 소유에게 무력하게 휘둘리는 제 남자를 보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빠가 허락해 주셨거든.”
“…….”
“이대로 물러나도 돼? 네가 그 남자보다 먼저였는데?”
다해가 재현의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지갑을 쏙 빼냈다.
“나라면 망가뜨려 놓을래.”
“…….”
“어차피 못 가질 거.”
다해가 지갑을 흔들며 윙크했다.
“자기야. 이건 잘 쓸게. 조만간 또 봐.”
* * *
오늘 밤 소유는 회식이 있다고 했다.
“나 회식 가도 돼?”
“당연하지. 그런 걸 왜 물어. 사회생활인데.”
너그러운 척하면서 소유를 보내 줬지만 내심 초조했다.
소유가 없는 저녁은 이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금단증상이 이런 건가.
손이 덜덜 떨리고, 머릿속에서 한 가지 생각만 둥둥 떠다니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고.
이런 기분은 처음이라 태오는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태오의 비서는 그런 상사를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다.
오늘따라 왜 저래.
소유는 10시까지 돌아오기로 했다.
혼자 집에 있자니 소유의 생각만 더 날 것 같아 회사에 남았다.
밀린 일이나 할 겸.
그래서 비서도 덩달아 야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제 상사는 도통 일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내내 휴대폰만 보고 있고, 혼잣말처럼 욕을 내뱉으며 손끝으로 책상을 툭툭 쳤다.
저럴 거면 그냥 집에 가는 게 낫지 않나, 라는 생각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손 비서.”
마침 딱 그 타이밍에 태오가 비서를 불렀다.
저 귀신 같은 양반이 이제 남의 생각도 읽을 수 있나.
“……네?”
비서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답을 했다.
“왜 답장을 안 하지? 아무리 10시가 안 됐지만, 그래도 메시지 하나 정도는 보낼 수 있잖아? 너무 재밌어서 날 까먹은 건가?”
……뭔 소리야?
“까먹어? 어떻게, 나를? 난 좋은 일이 있을수록 더 생각나는데. 이런 걸로 서운하면 나 너무 치졸한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앞뒤 설명 하나도 없이 그렇게 말하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사실 태오도 딱히 비서의 대답을 들으려 한 질문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휴대폰 잠금 화면을 풀었다.
[재밌게 놀고 있어?]
9시에 보낸 메시지다.
[나는 야근 중.]
9시 25분에 보낸 메시지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재밌게 놀아.]
5분 전에 보낸 메시지다.
소유는 연이은 메시지에 답장은커녕 확인하지도 않았다.
술도 약한 애가 위험하게 뻗어 버린 건 아닌지.
무슨 사고라도 난 건 아닌지.
아니, 사실은 그런 걱정보다도 그녀가 보고 싶어 애가 달았다.
금단증상이 맞는 모양이다.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몹시 신경 써 주면 좋겠어.
담배를 끊어도 이것보단 쉬울 듯했다.
당장이라도 소유의 몸을 끌어안고, 그녀에게 진한 키스를 날려 주고 싶었다.
하루 종일 그리웠던 마음도 마음껏 표현하고.
이대론 안 되겠다.
정말 하얗게 타 버릴 것 같아 태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간은 막 9시 4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네가 안 온다면 내가 찾으러 가야지.
“손 비서, 퇴근해.”
“네? 하지만…….”
아무것도 한 게 없잖아요, 지금까지.
“퇴근해. 괜찮아.”
우리 상사가 드디어 미쳤어요.
* * *
너무 집착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정확히 어느 고깃집인지는 묻지 못했다.
그래서 태오는 유아 물산 근처를 다 돌아 보는 수밖에 없었다.
차를 주차했을 때가 딱 9시 50분이었으니 10분 내로 소유를 찾고, 제 차로 데려갈 요량이었다.
태오는 직장인들이 보이는 식당엔 죄다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렇게 돌아다니기를 한참, 맞은편의 한 소고깃집에서 익숙한 무리가 보였다.
지난번 유아 물산에 찾아갔을 때 한 번씩 봤던 직원들이었다.
그렇다면 저기에 소유도 있단 이야기다.
태오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길을 막 건너려던 찰나 태오의 예상대로 소유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어째 상태가 좀 이상했다.
걸음은 비틀거리고, 눈은 나른하게 감기고, 볼은 빨갛게 변해 있었다.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취했구나.”
술도 약한 애가 팀장 된 기념으로 따라 주는 술을 거절하지 못하고 모두 마셨을 테다.
상태가 저러니 오늘은 뽀뽀밖에 못 하겠네.
아쉬웠지만, 그래도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금단증상은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고, 초조함이 사라졌다.
역시 정소유는 내 옆에 둬야 해.
태오가 흡족하게 웃으며 긴 다리를 뻗었다.
도로를 거의 반쯤 건넜을 무렵, 소유의 구두 굽이 꺾여 휘청댔다.
당장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저 딱딱한 바닥에서 넘어지면 틀림없이 상처가 생기겠지.
태오가 황급하게 달려갔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빨리 소유의 어깨를 감싸 잡는 이가 있었다.
“소유야, 괜찮아?”
덕분에 소유가 다치는 꼴은 면했지만, 태오의 시야에 소유를 잡아 준 사람이 들어왔다.
남자였다.
그것도 꽤나 훈훈하게 생긴.
“어, 강 부사장님.”
느닷없이 등장한 태오를 보며 직원들이 반가워했지만, 지금 태오의 눈엔 아직도 닿아 있는 소유의 어깨와 남자의 손밖에 보이지 않았다.
“감히 누굴 만져?”
태오가 으르렁대며 말했다.
“네?”
그러자 남자가 당혹스럽다는 표정으로 태오를 보았다.
“혹시 소유 남편분…….”
“손 안 떼?”
난 분명 경고했다.
당장 닥칠 일도 모르고 남자가 사람 좋게 웃었다.
“아, 무슨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저는…….”
“손 떼라고, 이 새끼야.”
태오는 남자의 말을 다 들을 겨를도 없이 그의 멱살을 잡았다.
남자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캑캑댔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 해도 유부녀한테 치근덕대? 몹쓸 놈이네, 이거.”
나른하게 눈을 깜박이던 소유가 그 광경을 보고서 술이 홀라당 깼다.
그리고 있는 힘껏 태오의 이름을 불렀다.
“강태오.”
태오가 씩씩대며 놀란 소유를 쳐다보았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