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질투의 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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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질투의 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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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질투의 화신
2022.07.11.
“소유야. 괜찮아? 저놈이 너한테 다른 짓은 안 했어?”
태오가 남자의 멱살을 던지듯 놓고 소유에게로 달려갔다.
남자는 휘청거리다 옆의 직원에게 부축을 받았다.
태오는 소유를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태오야.”
그런데 태오를 바라보는 소유의 시선은 평소와 달리 차갑기만 했다.
다른 사람에게 항상 그런 시선을 쏘는 태오였지만, 막상 제가 그 시선을 받으니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과해.”
“너 지금, 내 앞에서 다른 남자 편드는 거야?”
태오의 입장에서는 그런 소유가 이해되지 않았다.
이 남자는 분명 취한 너에게 치근댔고, 내가 그 광경을 목격해 버렸는데 돌아 버리지 않을 수 있겠냐고.
“정소유.”
공연히 주위에 서 있던 직원들만 머쓱해졌다.
빠져 드려야 하나, 이대로 있어야 하나.
“아무리 내가 잘못했어도…….”
“그게 아니라.”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그때로 돌아갔다.
결혼하기 전, 재현과 소유의 사이를 오해했던 그 당시의 태오로.
숨어 있던 그의 살벌한 소유욕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소유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사람 말 좀 들어.”
“술도 못 마시는 애가 연락도 안 되고, 나는 걱정이 되고.”
“아, 그런 게 아니라 저 사람 우리 사촌 오빠란 말이야!”
술도 마셨겠다, 소유가 버럭 소리를 질러 버렸다.
“……뭐?”
“내 사촌 오빠라고.”
그에 당황한 태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직원들이 웃음을 참느라 먼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 부사장님, 보기보다 사랑꾼이시네.
뉴스나 기타 매체로만 접했던 차가운 재벌 4세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소유는 부끄러운 나머지, 고개도 들지 못하고 끙끙 앓았다.
자, 그럼 내가 나설 차례인가.
태오에게 멱살을 잡혀 옷이 다 늘어난 남자가 태오에게로 다가갔다.
“정도진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너그러운 도진이 먼저 팔을 뻗었다.
그제야 제가 뭔가 단단히 사고를 쳤다는 사실을 깨달은 태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방금 들었다시피 소유의 사촌오빠이고, 얼마 전까지 호주에서 살다가 한국 들어왔습니다. 소유 혼자 회사를 물려받으면 어려움이 많을 것 같아서 도와주려고.”
X 됐다.
순간 태오의 머릿속에 그 세 글자가 연달아 스쳐 지나갔다.
“오늘은 제 환영식 겸 회식이기도 하고요.”
도진이 여유롭게 웃었다.
하지만 태오는 전혀 여유롭지 못했다.
“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5년 전에 결혼했고, 애가 둘입니다.”
태오가 유일하게 약해지는 존재가 바로 소유와 소유의 가족들이었기 때문이다.
소유를 돕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사촌 오빠의 멱살을 잡아 버렸으니.
게다가 아까 욕도 좀 했던 거 같은데.
“우리 소유가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모양이에요. 오빠로서 기쁘네요.”
그러고 보니 웃을 때 입 모양이 많이 닮아 있었다.
더불어 순해 보이면서 할 말은 다 하는 성격까지.
태오가 난감한 듯 눈썹뼈를 어루만졌다.
“옷은 걱정하지 마세요. 9,900원짜리라.”
“죄송합니다, 형님.”
결국 태오가 드물게 먼저 사과를 했다.
도진은 흐뭇하게 태오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고 한들 상대가 어마어마한 재벌가라 내심 걱정했는데, 적어도 남편 문제로 걱정할 건 없을 듯했다.
“나중에 따로 인사하고 싶어서 소유에겐 비밀로 해 달라고 했으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다음에 시간 되면 셋이 같이 밥이나 먹을까요?”
“네.”
“와, 근데 나 태어나서 재벌 처음 봐요. 신기하다.”
차라리 욕을 하십시오, 형님.
웃으면서 사람 먹이는 건 이 집안 전통인가 보다.
* * *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태오는 집으로 오는 내내 소유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소유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다짜고짜 멱살을 잡으면 어떡해? 적어도 한 번은 참았어야지.”
아무리 사랑 때문이라고 해도 태오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세리의 말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꼴이 되는 것만 같아 속상했다.
“형님인지 모르고 그랬지.”
소유가 2층 소파에 털썩 앉자, 태오가 그 옆에 슬그머니 앉았다.
“설령 오빠가 아니었더라도…….”
“형님이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났지.”
태오의 얼굴이 서늘해졌다.
문득 예전 태오의 말이 떠올랐다.
‘만약에 네가 바람이 난다면, 그 상대가 누구든 내가 팔다리를 다 분질러 놓을 거니까 조심하고.’
태오는 빈말은 안 하는구나.
“태오야. 우리 오빠가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 그랬다가 신고라도 당하면…….”
“상관없어.”
“난 상관있어! 난 걱정된단 말이야.”
소유가 태오의 손을 붙잡고 어린 강아지 길들이듯 타일렀다.
이런다고 길들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네가 어떤 모습이든 사랑하지만, 네가 너무 타인에게 무섭게 굴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그렇게 교육받으면서 컸어.”
이 부분에선 부부가 팽팽하게 대립했다.
“날 위협하는 사람들은 철저히 눌러 두라고. 다시는 설칠 수 없게.”
태오는 한 그룹의 후계자로서 혹독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보통 사람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점들도 분명 있었다.
“난 너를 건드리거나, 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들은 내 방식대로 처리할 거야.”
강태오 부사장다운 발언이었다.
인정사정없고 모두의 위에서 군림하는 강화 그룹의 장남, 강태오 부사장.
아무에게도 고개를 숙일 필요 없는, 모두가 두려워하는 이 남자.
소유는 제게는 익숙하지 않은 모습의 태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네가 잘했다는 거야?”
그 한마디에 태오는 곧바로 소유가 알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니. 내가 잘했다는 건 아니고.”
“피곤하다. 내일 이야기하자.”
소유가 초강수를 뒀다.
소유는 태오를 남겨 두고 그대로 뒤로 돌아 침실로 걸어갔다.
그녀도 하루 종일 태오가 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침실에 딸린 드레스룸에서 귀걸이를 빼고, 시계를 풀고 있을 때쯤 태오가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그렇게 화낼 일이야?”
“화난 거 아니야. 그냥 말이 안 통하잖아. 서로의 생각이 달라서.”
“너라면 다른 여자가 나한테 추파 던지면 어떡할 건데? 그냥 참을 거야?”
순간 소유의 머릿속에 세리의 얼굴이 떠올라서 기분이 상했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그냥 넘어가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다짜고짜 머리채는 안 잡을 거야. 나중에 물어보겠지. 무슨 사이야? 그 여자가 너한테 왜 그렇게 행동했어? 다 들어 보고 화를 낼래.”
“그게 어떻게 가능해? 보자마자 미쳐 버리겠는데? 그런 생각할 여유가 어디 있어.”
“네가 뭐 질투의 화신이야?”
“이래서 더 사랑하는 사람이 을이지.”
“뭐? 이야기가 갑자기 왜 그렇게 돼?”
전혀 웃을 생각이 없었는데, 자존심 상하게도 웃음이 픽 새어 나와 버렸다.
그러나 태오는 진지했다.
“내가 널 더 사랑하는 건 맞잖아. 그러니까 넌 그렇게 침착할 수 있겠지.”
“야, 네가 내 사랑의 크기를 봤어?”
“안 봐도 딱 알겠어. 내가 널 더, 더, 더, 사랑하는 게 분명하다고.”
나를 놀리는 것 같기도 하고, 진심인 것 같기도 하고.
“서럽다, 서러워.”
“…….”
“보고 싶어서 문자 했더니 답장도 없고, 나 혼자 안달 나서 찾아갔더니 뽀뽀 한번도 안 해 주고.”
“나 지금 웃을 기분 아니야.”
그러면서 소유의 입꼬리는 슬슬 위로 올라갔다.
“웃으라고 하는 소리 아니야. 내가 뭐 어떻게 할까. 손들고 벌이라도 설까? 무릎이라도 꿇어?”
태오의 서러움이 폭발했다.
이 무시무시한 남자가 한없이 귀여워 보이니 소유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그 사이 태오는 정말 무릎이라도 꿇을 요령인지 바닥에 앉았다.
“야아, 하지 마.”
안절부절못하던 소유가 그의 앞으로 달려갔다.
어쩌다 보니 서로를 보며 무릎을 꿇고 앉는 꼴이 되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한 번만 참아 달라고. 진짜 딱 한 번만. 너를 뜯어고치겠다는 게 아니라 딱 그 정도만 바란다고.”
소유가 태오를 꽉 끌어안았다.
“사람들이 너를 오해하잖아. 너는 이렇게 좋은 사람이고, 사랑스러운 사람인데.”
결혼이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 서로에게 조금씩 맞춰 가는 과정이라고 했던가.
어쩌면 그 첫 번째 관문인지도 모른다.
그 과정을 모두 겪어야 우리는 진짜 하나가 되고, 진정한 가족이 되어 간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너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거 싫어.”
“알았어. 이제 앞으로 한 번 정도는 참을게. 대신 너도 약속해. 회식하는 건 좋은데 내 메시지 씹지 마. 걱정되니까.”
“응. 나도 알겠어.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신혼부부답게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였다.
금세 풀린 태오도 소유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회식 끝날 때쯤에 그 근처에서 서성이면, 나 너무 집착하는 남편 같나?”
그 말에 소유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괜찮아. 네가 걱정된다면 그렇게 해.”
그리고 속으로 몰래 다짐했다.
앞으로 회식은 최대한 참석 안 해야겠다.
이러다 우리 태오 숨넘어가겠네.
“그렇게 힘들어할 거면 애초에 회식 가지 말라고 하지 그랬어.”
“그럼 내가 너를 너무 구속하는 거 같잖아.”
“이미 질투, 집착, 구속 다 해 놓고, 무슨.”
태오가 은근슬쩍 소유를 뒤로 눕혔다.
소유의 뒤통수는 안락하게 태오의 손바닥 위에 안착했다.
“그래서 싫다고?”
“아니. 사실은 좋아.”
우린 천생연분인가 봐.
남들 눈엔 비정상으로 보일 부분조차 애정의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보니.
“Hazel, 네가 이제 나 평생 책임져야 해.”
분위기가 풀리자 태오가 적반하장으로 뻔뻔하게 굴었다.
“뭐?”
“네가 이렇게 나 구제 불능으로 만들었잖아.”
짜증은 나는데 귀여워서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네가 나 평생 책임져야 한다고.”
“어쩔 수 없네. 특별히 내가 책임져 줄게.”
소유가 태오와 이마를 맞대며 키득키득 웃었다.
그런 소유를 진득해진 눈으로 내려다보던 태오가 물었다.
“우리 화해한 거지?”
“응.”
“그럼 나 뽀뽀해도 되나?”
“너는 나 보면 그런 생각밖에 안 해?”
“너 안 볼 때도 그런 생각해.”
“아직 혈기 왕성하다, 우리 Noah.”
태오는 소유의 얼굴을 감싸 쥐고 자신의 입술을 꾹 눌렀다.
오늘따라 바른 립스틱이 예쁜 건지, 아니면 그냥 얘가 예쁜 건지 참을성 없이 입을 맞췄다.
그래도 철저한 과외 덕에 이젠 소유도 이런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익숙해졌다.
키스로 혼을 쏙 빼놓더니 이번엔 블라우스 단추에 손을 대길래 소유가 황급히 그를 막았다.
“여기는 바닥이 딱딱해.”
“괜찮아.”
“뭐가 괜찮아.”
혼자 괜찮으면 다야?
소유는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태오의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다시 입맞춤을 시도했지만, 소유가 고개를 돌려 피했다.
“침대로 가.”
“…….”
“내 새끼, 착하지.”
소유가 태오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태오가 한숨을 쉬며 소유를 안아 들었다.
“말은 똑바로 해. 네가 내 새끼지.”
“아니지. 네가 내 새끼지.”
두 사람은 시답잖은 걸로 티격태격하며 침대로 향했다.
“어째 욕 같다?”
“그럼 넌 네 새끼 하고, 난 내 새끼 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네가 내 새끼라 의미가 있는 거지.”
“맞다. 그러고 보니까 너 아까 도진이 오빠한테도 ‘이 새끼’라고…….”
말이 더 길어지기 전에 태오가 다시 키스를 퍼부었다.
가뜩이나 술에 취하면 체력이 약해지는 소유인데, 대화가 더 길어졌다간 그대로 잠이 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잔뜩 성난 저를 두고서.
“이제 집중해.”
내 새끼, 오늘 내가 다 잡아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