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 김장 비극사 (31/95)


31. 김장 비극사
2022.07.15.


소유는 태오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다 슬그머니 옷을 챙겨 입었다.

오늘은 대망의 김장 날이다.

단정한 귀걸이를 끼고서 소유가 심호흡을 했다.

체력이든, 정신이든 남아나지 않을 날이란 것이 쉽사리 예상되었다.

정신 차려, 정소유. 이제 시작이야. 어려울 거 없어. 지금껏 더 힘든 일도 잘 견뎌 냈잖아.

작게 주문을 외우고서 드레스룸을 나왔다.


“그래도 뽀뽀는 해 주고 가야지.”

이렇게라도 에너지 충천은 하고 가야 할 것 같다.

소유가 아기 같은 얼굴로 곤히 잠든 태오에게로 다가갔다.


“혼자 잘 놀고 있어. 금방 다녀올게.”

그 순간, 태오가 눈을 번쩍 떴다.


“그러니까 어딜 가는 건데.”

그의 눈엔 졸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깨어 있었던 거지.


“깜짝이야. 안 잤어?”

“왜 대답을 안 해 줘.”

소유가 침대에 털썩 앉아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람 좀 놀라게 하지 마.”

“너 진짜 바람이라도 피우러 나가?”

실은 지금 태오는 살짝 토라진 상태다.

황금 같은 주말에 데이트도 안 하고 홀랑 나가 버리는 것도 모자라, 도통 목적지를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야. 남자는 절대 없는 곳이야. 맹세.”

소유가 맹세하듯 손을 들었다.

그것만은 확실히 말해 줄 수 있었다.

남자는, 없다.

사실 그래서 더 침울했다.

무거운 절인 배추를 언제 다 옮겨.

내가 어리다고 나한테 다 시킬 것 같은데.


“그런데 왜 말을 안 해 주냐고.”

소유의 마음을 알 리 없는 태오는 애가 달았다.

말을 하면 네가 안 보내 줄 게 뻔하니까.


“갔다 와서 말해 준다고 했잖아.”

“지금은 안 되고, 갔다 와서는 말해 줄 수 있어?”

“응.”

들으면 들을수록 미스터리해지는 외출이다.


“너 요즘 나 너무 혼자 두는 거 아니야?”

“뭐가. 평일엔 내내 붙어 있었잖아.”

소유는 부스스한 태오의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겨 줬다.


“평일이랑 주말이랑 같아?”

아, 잘생겼다. 내 남편.

우리 잘생긴 남편 때문에 내가 오늘 골병들 거 알면서도 거기 간다.


“사랑해.”

“이 상황에서 그런 말 한다고, 내가 넘어갈 것 같냐?”

“내일은 하루 종일 데이트하고 놀자.”

만약 내일까지 내가 살아 있다면 말이야.


“술은 마시지 마.”

“술 마시는 자리 아니야.”

“너무 늦진 말고.”

“그건 잘 모르겠어.”

소유는 태오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립스틱을 바른 걸 잊고 한 탓에 그의 입술도 덩달아 붉게 물들었다.


“미안. 립스틱 다 묻었다.”

소유가 배시시 웃으며 태오의 입술을 닦아 줬다.


“여기도 해 주고 가.”

태오가 오른쪽 볼을 툭툭 두드렸다.


“흔적이라도 남기고 가야 내가 덜 외로울 거 아니야.”

태오가 소유에게로 다가왔다.

쪽.

뭔가 이상한 뽀뽀였다.

입술이 볼에 닿은 것이 아니라, 볼이 입술에 먼저 닿았다.

덕분에 도장처럼 선명한 입술 자국이 태오의 볼에 남았다.


“나 오늘 세수 안 해야지.”

아침부터 지나치게 선정적인 장면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태오가 만족스럽게 씩 웃었다.


“나 갈게. 늦었어.”

소유가 갑자기 서둘렀다.

사실 시간은 여유로웠지만, 더 있다가는 제가 태오를 확 덮쳐 버릴 것만 같았다.

강태오는 아침부터 너무 치명적이야.

곤란하게.

소유는 달아나듯 쪼르르 사라져 버렸다.

멍하니 사라지는 소유의 등을 보고 있던 태오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쟤 설마 우리 어머니 만나러 가는 건 아니겠지?”

황급히 소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소유의 휴대폰은 이미 꺼진 뒤였다.

뒤늦게 새로운 메시지를 확인한 태오가 심란한 표정이 되었다.


[나 잠깐 전화 꺼 둘게. 미안.]

다급하게 차 키를 챙겨 들고 나서던 태오는 우두커니 멈춰 섰다.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 말 안 들으면…….


“화내겠지?”

소유에게 미움받는 건 정말 싫었다.

그래. 장인어른과 관련된 볼일일 수도 있고.

조금만 침착하게 믿고 기다려 보자.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태오가 문득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바라보았다.

입술엔 립스틱 자국이 다 번져 있고, 볼엔 입술 자국을 묻힌 채 서 있는 처량한 남자가 보였다.


 


“강태오, 꼴 한번 우습네.”

어쩌다가 이렇게 됐냐.

멋은 좀 사라졌지만, 그래도 이 변화가 못마땅한 것은 아니었다.

소유를 사랑하며 얻은 게 더 많았기 때문이다.

설렘, 안정감, 온기, 편히 쉴 집, 미각, 소소한 행복.

이제 소유가 사라진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동안의 삶이 얼마나 무미건조했는지 이제는 알게 되었으니까.

그러니 미움받을 일은 웬만하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긴 하루를 뭘 하면서 보내야 할까.

태오는 혀를 쯧 차다가 다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안녕, 손 비서. 나야. 강화 설립 이래 최악의 상사 강태오. 오늘 뭐 해?”

― ……또 사모님 외출하셨습니까?

“심심하면 우리 얼굴이나 볼까?”

심심할 리가 있겠냐, 이 주말에.

손 비서가 이를 꽉 깨물고 웃느라 어금니가 깨졌다는 소문이 강화 호텔에 널리 퍼졌다.

* * *

예상대로 소유는 인사를 하자마자 그야말로 ‘탈탈’ 털리기 시작했다.


“아버지 회사 이름이 뭐라고 했지?”

“유아 물산입니다.”

소유의 대답에 태오의 고모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유아 물산? 그런 회사가 있었어?”

“뭐, 되게 작은 회사인가 보지.”

“그래? 그렇게 작은 회사 딸이랑 태오가 왜 결혼을 했지?”

“난 세리가 딱 좋았는데. 둘이 잘 어울렸잖아. 집안 수준도 맞고.”

그녀들은 소유가 앞에 서 있든 말든 딱히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이게 바로 재벌로 시집온 평범한 여자들이 겪는 서러움인가.

소유는 입에 경련이 날 정도로 억지로 웃었다.


“그런데 애는 안 가지니?”

“맞아. 젊을 때 낳아야 애도 똑똑하다던데.”

“우리 집안은 후계자가 중요한 집안이야.”

“네 시어머니가 보약도 안 지어 주셨니?”

참을 거야.

참아 낼 거야.

물론 그렇다고 정신적으로만 힘든 것은 아니었다.


“새아가, 배부터 갈아라. 절대 믹서기는 쓰면 안 돼. 정성이 중요해요. 요즘 것들은 자꾸만 기계에 기대려고 해서 큰일이라니까.”

“네.”

신체적으로도 경악스러울 정도로 힘들었다.

신고식이라도 하는 건지, 친척들은 잠시라도 소유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게다가 서령의 ‘500포기 발언’이 거짓은 아닌 듯 절인 배추가 탑처럼 쌓여 있었다.


“할머니가 아직 살아 계셨다면, 제대로 교육해 줬을 텐데.”

“그러게나 말이야. 아, 새아가. 수육 어느 정도 삶아졌는지 확인하고 와라.”

“……네.”

배추들보다 더 절여진 소유의 대답에 점점 기운이 없어졌다.

바짝 묶은 머리로 인해 훤히 보이는 목덜미는 시뻘겋게 변했다.

내일 몸살 예약이다.

커피, 계피, 파 등과 함께 삶고 있는 수육을 확인하고 있자니 눈앞이 뿌예졌다.

이게 눈물인지, 수증기인지.

소유가 괜히 훌쩍거리고 있는데, 그 옆으로 서령이 다가왔다.

오늘만큼은 서령도 예외가 없었다.

그녀도 허리에 앞치마를 두르고서 배추에 양념을 묻히고 있었다.


“할 만하니?”

아무리 저를 싫어하는 서령이라도, 그 와중에선 그나마 반가운 얼굴이었다.


“어머니.”

“울먹이지 말고, 힘들면 나가렴. 뒷문 열어 뒀어.”

서령은 소유가 슬슬 도망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저조차도 시집온 후 첫 김장 때, 몰래 도망쳤다가 붙잡혀 들어오곤 했다.

소유에겐 굳이 하지 않은 말이지만 새 사람이 들어오는 해의 김장은 평소의 김장보다 더 힘든 편이었다.

서령은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소유의 마른 몸에 한계가 찾아왔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남의 집 딸을 가학적으로 괴롭힐 생각은 없단다. 그러니 너의 의지로 나가.”

그러나 소유는 허리를 바로 세우고,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지금까지 한 게 아까워서라도 못 가요.”

서령이 팔짱을 끼고서 웃음을 터뜨렸다.


“제법이네.”

며느리가 예쁘진 않았는데 우습긴 했다.


“배, 제가 직접 다 갈았어요. 올해 김치는 더 맛있을 거예요.”

“네가 갈아서 맛있겠니? 그냥 배가 맛있는 거지.”

서령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 가녀린 아이가 당장 도망가면 좋을 것 같으면서도, 막상 도망치면 굉장히 실망스러울 것 같다는 그런 기분.


“그래도 전 어머니 좋아요.”

“미안하지만, 나한테 그런 여우 짓은 안 통한단다.”

요망한 것이 자꾸만 나를 꾀려 든다.

제 아들처럼 쉽게 넘어갈 것 같았는지.

어림도 없지.


“제가 마음에 드실 때까지 포기 안 할 거예요.”

소유가 당차게 말하고 있을 때쯤 저 멀리서 아우성이 들려왔다.


“얘, 새아가. 수육 확인하라고 했더니 왜 아직 소식이 없어?”

“직접 돼지라도 잡아 오는 거야?”

소유는 다시 울상이 되어 달려갔다.


“수육은 조금 더 익혀야 할 것 같아요.”

“그럼 앉아서 속 마저 묻혀라.”

이곳은 지옥이었어, 김장 지옥.

소유는 끊어질 듯한 허리를 부여잡고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이제 한 300포기 정도 담갔으려나.


“근데 보기보다 손이 야무지네. 돌아오는 제사를 맡겨도 되겠어.”

“그러게. 이제 나도 좀 편해지겠네.”

“아예 일임하자고.”

까르르 웃는 사모님들의 웃음 사이에서 소유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기계적으로 양념을 묻히며 잠시 이성이 끊겼다.


“그나저나 밥은 있나? 이런 김치는 뜨끈한 쌀밥에 먹어야 맛있는데.”

“그러네. 아가, 이따가 밥도 넉넉하게 얹히렴.”

그래서 속에 있던 말이 그대로 나와 버렸다.


“그런데 남자들은 김치 안 먹나요?”

순간 화기애애하던 집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바깥에선 쉽게 가질 수 있는 의문이 이 구시대적이고 보수적인 집안에선 금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누구나 생각은 했을지 모르나 아마 입 밖으로 내뱉은 건 소유가 처음일 테다.


“그럼 김장도 공평하게 다 같이 해야…….”

깜짝 놀란 서령이 달려와 소유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애석하게도 분위기는 이미 와장창 깨졌다.


“어머나, 얘가 너무 힘들어서 실성을 했나 봐요.”

제가 내뱉은 말의 파장도 모르는 소유는 눈이 반쯤 풀려 있었다.


“저, 저, 말하는 본새하고는…….”

“요즘 애들 정말 당돌하다니까.”

 

* * *

소유가 발칙한 반란을 일으키고 있을 때쯤, 태오는 못마땅한 얼굴로 강화 호텔에 나타난 강화 전자의 강선오 이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태오의 첫 번째 동생이자, 강준영 회장의 첫 번째 서자였다.

한마디로 태오의 이복동생이었다.

여느 이복형제가 그렇듯 둘의 사이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태오가 긴 다리를 쭉쭉 뻗어 선오에게로 다가갔다.


“네가 여긴 무슨 일이지?”

“그러는 형님이야말로 지금 여기서 뭐 하는 중입니까?”

“대가리에 총 맞았냐? 여기 내 호텔이야.”

“오늘 본가로 출동할 줄 알았는데. 의외네.”

둘이 금실이 좋다 못해 꼴값이라는 소문이 파다한데.

와이프 거기다 두고 출근을 해?


“설마 잊으셨나? 우리 강화 가(家)엔 세 개의 명절이 있다는 거.”

닮은 듯 다른 눈동자가 태오를 응시했다.


“설날, 추석, 그리고…….”

딱 거기까지 말했을 때 태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선오가 가소롭다는 듯 그를 비웃으며 답을 말했다.


“김장하는 날.”

태오가 작게 욕을 읊조렸다.

그걸 왜 생각 못 했지.


“형수님 무사하시려나? 형수님이 먼저 파김치가 되어 실려 나올 것 같은데.”

선오가 즐겁다는 듯 휘파람을 불었다.

태오를 처음으로 한 방 먹였다.


“표정이 말이 아니네요, 형님.”

선오는 얄밉게 웃고서 태오를 스쳐 지나갔다.


“그럼 수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