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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발칙한 반란 (32/95)


32. 발칙한 반란
2022.07.18.



 
한마디를 했다가 백 마디의 꾸지람을 들은 소유는 시무룩하게 구석에 박혀 있었다.

귀가 본능이 발동했으나 아직 소유를 기다리고 있는 절인 배추는 켜켜이 쌓여 있었다.

아까 너무 큰소리를 쳐 놨나.

말을 번복해서 부끄럽지만, 태오가 자신을 구하러 와 줬으면 좋겠다는 헛된 희망마저 생겨났다.


“거기 속 제대로 묻혔니?”

“허여멀건 게 백김치가 따로 없구나. 다시 하렴.”

본의 아니게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게 된 소유는 절인 배추와 사투 중이었다.

올해는 김치를 안 먹어도 될 것만 같아.

보는 것만으로도 질렸어.

그때, 기적 같은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올 사람이 없는데.”

“그러게. 절인 배추가 덜 왔나?”

의아해하는 목소리 사이로 집주인인 서령이 걸어 나갔다.

그리고 문을 벌컥 여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서령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네가 왜 여기엔 웬일이니?”

금남의 구역에 발을 들인 남자, 태오였다.


“어머, 태오 왔니?”

“여긴 무슨 일로 왔어?”

고모들이 태오를 보며 반가운 기색을 내비치면서 한편으로는 소유를 흘겨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유는 태오의 등장이 반갑기만 했다.


“혹시 네 마누라 데리러 온 건…….”

“아, 오늘 김장하는 날이었구나. 몰랐네요.”

태오가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그러고선 저를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어머니를 쓱 피해 안으로 들어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김치들에 파묻혀 있는 가여운 소유였다.

몇 시간 사이에 어찌나 핼쑥해졌는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저는 어머니가 불러서 온 건데.”

태오가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내가?”

서령이 이를 악물고 되물었다.


“네.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다고 그러셨잖아요? 잊으셨어요?”

태오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서령은 골이 아픈지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올케, 오늘 같은 날 태오는 왜 부른 거야? 뭐, 엄마 이렇게 고생하고 있다고 유세라도 떨려고?”

“그럼 안 되지. 우리가 누구 덕에 이렇게 잘 먹고 잘사는데. 다 남자들이 힘들게 바깥일을 해서 그런 거 아냐.”

결국 모든 힐난은 서령의 몫이 되어 돌아왔다.


“참, 내 아들이지만…….”

이 영악한 걸 보고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모자 사이에 의문의 불꽃이 팡팡 튀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김장을 거하게 하시는지 몰랐네요.”

“넌 이만 가라. 이건 여자들만의 행사이니.”

“에이, 그럴 순 없죠. 매년 김치 받아먹는 처지에, 저도 거들어야죠. 어머니, 이야기는 김장 끝나고 해요.”

태오는 재킷을 벗고 절인 배추들을 손수 옮기기 시작했다.


“태오야!”

“너 지금 뭐 하니!”

그러자 고모들이 경기를 일으켰다.

강화 가(家)의 유서 깊은 전통이 단숨에 깨지는 현장이었다.


“넌 이런 거 하면 안 돼.”

“왜요? 저도 일가의 일원으로서 돕고 싶은데.”

왜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마는.


“설마 제가 남자라서 안 된다는,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시는 건 아니겠죠?”

태오가 정곡을 찔렀다.

이 젊은 부부의 연이은 반란에 보수적인 어른들은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이참에 아버지랑 동생들도 다 부를까 봐요. 아, 고모부랑 작은아버지도.”

“올케, 태오 취한 거 아니지? 좀 말려 봐요!”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 얘야.”

그 소란 속에서, 서령은 입을 손으로 가리고 소리 없이 웃었다.

콧대 높은 강화 가(家) 여자들이 태오의 한 마디에 안절부절못하는 꼴이 우스웠다.


“그럼 저라도 도울게요.”

거의 반협박식이었다.

태오가 더 큰 사고를 치기 전에 허락해 줄 수밖에 없을 테다.

태오는 망설임 없이 소유의 옆에 털썩 앉았다.

제가 고무장갑을 낀 모습을 보고 고모들이 거품을 물고 쓰러지기 직전이라는 사실도 모르는 태오는 소유에게 속삭였다.


“괜찮아?”

그 다정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정말 눈물이라도 날 것 같았다.

소유는 입술을 앙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할게. 몰래 쉬어.”

덩치가 큰 태오에게 가려진 소유는 몰래 숨을 돌렸다.

태오는 비싼 명품 셔츠에 양념이 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투박하게 배추에 양념을 묻혔다.


“이렇게 하는 거 맞나?”

그리고 자랑하듯 자신의 첫 김치를 들어 올렸다.


“올케. 진통제, 진통제 좀 가져와요.”

“아이고, 머리야.”

“오, 주여.”

다들 진통제와 각자 믿는 신을 찾고 난리가 났다.

그래도 힘이 센 태오의 등장으로 속도가 붙었다.

이 기나긴 김장도 슬슬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커피 사 왔습니다. 잠시 쉬고 하시죠.”

“손 비서도 앉아. 김치 싸 줄게. 또 우리 고모님들이 최고급 재료들로 엄선해서 고른 거라 시중에 파는 김치랑은 차원이 다를걸?”

“…….”

거기다가 커피 배달하러 왔다가 엉겁결에 남의 집 김장에 합류하게 된 손 비서까지.

어느새 김장의 주도권은 젊은 사람들에게로 넘어갔다.


“손 비서 수육 좋아하나?”

“사직서가 더 끌리네요, 지금은.”

“거참, 농담도.”

그렇게 말하면서도, 손 비서는 보너스를 두둑하게 챙겨 줄 태오를 알고 있었다.

사실 그런 것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상사에 대한 깊은 애정이 깔려 있어서 기꺼이 돕고 싶었다.

태오가 전혀 밉지 않았다.


“유급 휴가 하나 더 챙겨 주십시오.”

“하는 거 봐서.”

순식간에 뒷방 늙은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던 강화 가(家) 여자들은 우두커니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내년엔 온 가족이 모여서 하시죠. 그러면 훨씬 더 빨리 끝날 것 같은데. 가족 간의 정도 좀 쌓고요.”

그땐 몰랐지.

그렇게 무시하던 보잘것없는 집안의 여식이 강화 가(家)를 확 바꿔 놓을 줄은.

반란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 * *



“태오가 뭘 했다고?”

선오와 업무 이야기 겸 식사를 하고 있던 강준영 회장은 비서를 통해 날아든 소식에 인상을 썼다.


“그러니까, 그…… 김장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똑바로 말해. 김장 사업을 시작했다는 거야, 뭐야?”

“아, 아니요. 오늘 집에서 김장을 같이 하셨다고.”

강 회장의 낡은 가치관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수저를 내려놓은 강 회장이 물었다.


“……왜?”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자 가만히 있던 선오가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뜬금없는 웃음에 강 회장과 비서의 눈이 동시에 그에게로 향했다.


“아, 죄송합니다. 보기 좋아서요. 형이 형수님을 정말 사랑하나 봐요.”

강태오, 이 미친 X끼. 골 때리네.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정말 예상조차 못 했다.

그곳에서 형수를 데리고 나올 거라고만 생각했지, 같이 앉아서 김장을 하고 있을 줄이야.


“그나저나 걱정이네요. 그런 팔불출에게 우리 강화 그룹을 맡겨도 될는지.”

아니, 상상이 안 되잖아.

그 큰 덩치로 쭈그리고 앉아 김치를 담그고 있는 강태오의 모습은.


“넌 형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죄송합니다. 다만 전 걱정이 돼서.”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만. 그놈이 언제부터 그렇게 애처가였어?”

강 회장은 식사까지 멈추고 골똘히 생각했다.

현재 그의 심정은 복잡했다.

후계자로서의 위엄을 던져 버린 장남에 대한 불편한 심기 반.

또, 한편으로는 자신과 달리 와이프와 금실이 좋은 것에 대한 안도 반.

어느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할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알 것 같다.

* * *

다행히도 저녁 즈음에 김장이 모두 끝났다.

얼빠진 어른들을 뒤로한 채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왔다.

챙겨 온 김치를 냉장고에 넣은 태오가 슬그머니 소유에게로 다가갔다.


“화내지 마. 나 진짜 어머니가 불러서 간 거야. 오늘 김장하는 줄도 몰랐어.”

“야, 강태오.”

아까 그 당당하던 강태오는 어디 가고, 꼬리를 말곤 소유의 눈치를 보는 강아지만 존재했다.


“Don’t lie to me.”

“……미안해.”

“거짓말이 제일 나빠.”

큰일이다.

소유는 엄격하고 진지하고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그 모습마저 귀여워서.


“그런데 너 되게 똑똑하더라.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

“나 원래 남 엿 먹이는 거 잘해.”

태오가 잘생긴 입술을 길게 늘여 웃었다.


“그런 말을 웃으면서 하진 말아 줄래.”

그러다 소유가 태오를 꽉 끌어안았다.


“고마워. 나 아까 진짜 탈출하고 싶었거든. 근데 또 거기서 도망치면 너를 덜 사랑하는 꼴이 되는 것 같아서 죽을힘을 다해 참고 있던 찰나에 네가 왔어. 나를 구하러.”

너는 언제나 날 구해 주네.

멋진 왕자님처럼.

신데렐라는 싫지만, 너 같은 왕자님이라면 기꺼이 신데렐라가 될래.


“나랑 결혼한 거 후회해? 나 때문에 이런 형편없는 시댁을 만났잖아.”

소유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아닌 다른 이유로 널 사랑한 걸 후회하진 않을 거야. 그리고 잘못된 건 우리가 바꿔 나가면 되잖아. 우리 애들은 이렇게 힘들지 않도록.”

소유의 당찬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더욱 확실한 명분이 생겼다.

장남으로서 잘못된 건 제대로 바로잡아야겠다는 명분 말이다.


“그나저나 너 옷 다 지저분해졌다. 이거 잘 지워지지도 않을 건데.”

소유가 여기저기 튄 양념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무슨 상관이야. 또 사면 되지.”

태오와 평범하게 사랑을 하다 보면 그가 재벌이라는 걸 가끔 잊게 되는데, 이럴 때면 또 새삼스럽게 실감이 되곤 한다.

아, 맞아. 얘 어마어마한 부자였지.


“내 옷은 둘째치고, 넌 아픈 덴 없어? 안색이 안 좋아.”

“아니. 온몸이 아파. 누구한테 세게 맞은 것처럼.”

얼마나 기운이 없었으면 위층으로 올라가지도 못하고 계단에 널브러져 있었을까.

태오는 제가 잡아 주지 않으면 그대로 축 늘어져 버리는 소유의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소유도 이젠 꽤 익숙하게 태오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내가 씻겨 줄까?”

“……어?”

“내가 구석구석 다 씻겨 줄게. 넌 가만히 있어. 오늘 고생에 대한 보상이야.”

부부로서 많은 밤을 함께 보냈지만, 같이 씻는 건 처음이었다.

어쩐지 부끄러워 소유가 매일 욕실 문을 꼭 걸어 잠갔기 때문이다.


“아니, 그건 좀.”

“부부 사이에 그런 내외 하는 것도 웃기지 않아? 그리고 누가 허튼짓한대? 그냥 씻겨 준다고. 너 당장이라도 쓰러질 거 같아서.”

다리가 길어서 그런가. 두 사람은 어느새 욕실에 도달해 있었다.


“내가 짐승도 아니고, 이렇게 힘든 애를 괴롭히겠냐.”

짐승 맞는 거 같은데.

태오는 망설이는 소유를 욕조 끝에 조심스럽게 앉혔다.

그리고 욕실에 따뜻한 물을 받기 시작했다.

뜨거운 수증기가 올라오자 벌써부터 피로가 풀리면서 몸이 노곤해졌다.

눈이 반쯤 풀린 소유에게 물었다.


“네가 벗을래, 내가 벗길까.”

“뭐, 뭘!”

“옷.”

과민 반응을 하는 소유에 비해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의 태오가 단숨에 셔츠 단추를 풀어냈다.

난 몰라.

소유가 부끄러운지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너 이상한 생각 하지 마. 욕조에 옷 입고 들어갈 수 없으니까 벗는 거니까.”

그래도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 소유를 일으켜 세우고, 곱게 묶은 그녀의 머리 끈을 풀어냈다.

풍성한 머리카락이 파도처럼 몰려와 아래로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이상한 생각 하는 내가 이상한 거야?

소유의 마음을 읽은 태오가 놀리듯 말했다.


“가만 보면 네가 나보다 더 음흉할 때가 있어.”

태오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소유가 냅다 눈을 감았다.

그런 소유를 보며 킥킥 웃던 태오가 그녀의 이마를 툭 건드렸다.


“입욕제 풀어 줄 테니까 씻을 준비나 하세요.”

거품이 보글보글 생기고, 색이 있는 입욕제를 풀면 덜 창피해하겠지.

태오는 뒤로 돌아 욕조에 입욕제를 풀기 시작했다.

아무런 사심 없는 그 뒷모습을 보고서 소유가 빤히 바라보았다.

맞아. 오늘은 내가 더 음흉한 날인가 봐.


“됐다. 이제…….”

만족스럽게 준비를 마친 태오를, 소유가 뒤에서 꽉 끌어안았다.

딱딱한 근육에 더욱 애가 달았다.

태오가 멈칫했다.


 


“안 하려고 하는데, 그래도 이상한 생각이 자꾸 들면 어떡해?”

소유가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태오가 소유의 손을 잡고 돌아섰다.

그의 시선은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 억지로 참고 있는데, 왜 자꾸 자극해.”

진짜 어떡해. 어떡하지.

지금 네가 너무 섹시해, 태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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