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미친개를 쫓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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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미친개를 쫓는 법
2022.07.29.
“태오야.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아.”
소유가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태오의 손목을 잡았다.
“괜찮아.”
그러자 태오가 안심하라는 듯 짧게 웃었다.
태오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다해는 곁눈질로 네 개의 숫자를 훔쳐보았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저택’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다해가 높은 천장에 달린 화려한 조명을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재현의 카드로 그나마 얻게 된 자신의 모텔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호화로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날, 태오와의 맞선자리에 소유가 아닌 제가 나갔다면.
태오와 팔짱을 끼고 식장에 들어간 게 소유가 아니라 저였다면.
현재의 이 모든 반짝반짝 빛나는 것들이 나의 것이었을까.
그래.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의사보다는 재벌가 장남이 낫지.
그냥 석재현을 정소유에게 넘겨줘 버릴걸.
다해가 헛된 생각을 하는 사이 태오는 가사도우미에게로 갔다.
“저녁 한 사람분만 더 준비해 주세요.”
항상 요리를 넉넉하게 하는 편이었기에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그것도 모자라 태오는 와인 셀러에서 가장 비싼 와인을 꺼내 들었다.
태오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소유가 그를 만류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욘 없어.”
“그래도 처형한테 해 드리는 첫 대접인데, 신경 써야지.”
“태오야. 난 저 사람 내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누구보다 소유의 가까이에서 사건의 진상을 본 태오라 그 사실을 모르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알아. 그러니까 넌 편히 앉아 있어. 오늘은 나한테 맡겨 두고.”
태오는 소유를 주방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마침 반찬을 인원수대로 소분하고 있는 가사도우미에게 말했다.
“손님 건 제가 마무리할게요.”
“네?”
처음 있는 일이라 가사도우미가 어리둥절하게 반문했지만, 태오는 묵묵히 손님의 트레이 앞에 섰다.
이 집은 모든 반찬을 한 곳에 놓고 같이 먹지 않았다.
각자의 트레이에 개인의 반찬을 두고 먹었다.
그러니 손님 것도 마찬가지였다.
다해 혼자 먹을 적은 양의 국과 밥, 반찬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태오는 그것을 우두커니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그늘이 져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일단 지시대로 태오와 소유의 몫만 준비하고 있던 가사도우미가 문득 옆을 보고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부사장님!”
그러나 태오는 태연한 표정으로 입술을 검지에 가져다 댔다.
그는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에 소금으로 추정되는 가루를 탈탈 털어 넣고 있었다.
사르르 녹아가는 가루를 보며, 가사도우미는 생각했다.
저건 더 이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라고.
“미친개가 집에 들어왔어요.”
태오의 목소리는 무척 차분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런데 그 미친개에게 맛있는 음식을 내어주면 또다시 찾아오지 않겠어요? 오히려 염치도 모르고 다음엔 더 맛있는 걸 내어놓으라 하겠죠.”
남은 소금은 모두 국에다 쏟아 넣었다.
“그러니 똑똑히 알려 줘야죠. 이곳은 네가 감히 들어올 곳이 아니라는 걸.”
가사도우미는 섬뜩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태오는 씩 웃고서 다해의 트레이를 들고 다이닝 룸으로 나갔다.
“식사하시죠, 처형.”
장식장 안의 값비싼 장식품을 몰래 주머니에 넣고 있던 다해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로 돌았다.
태오는 따뜻한 밥과 고급스러운 반찬이 담긴 트레이를 내려놓았다.
정말 이렇게까지 극진한 대접을 받을 줄은 몰랐는데.
다해는 얼떨떨한 나머지 술기운이 전부 날아가는 것 같았다.
“입맛에 맞으셨으면 좋겠군요.”
그다음에 나온 가사도우미는 태오와 소유의 식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여사님은 이만 들어가세요. 뒷정리는 알아서 할게요.”
태오가 와인을 따면서 가사도우미에게 말했다.
조용히 고개를 숙인 가사도우미가 사라지고, 넓은 다이닝 룸에 세 사람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화기애애한 만찬에나 어울릴 법한 음식들이었으나, 사실 실제 분위기는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태오는 말없이 두 여자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다해는 오랜만에 보는 잘 차려진 음식에 넋이 나가 있었고, 소유는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다해를 주시하느라 바빴다.
“너무 조용하네.”
태오가 근처에 있는 LP 플레이어를 작동시켰다.
그러자 LP 특유의 잡음과 함께 고풍스러운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와인 따르는 소리만 가득하던 다이닝 룸이 한층 풍성해졌다.
“자, 그럼 식사하실까요?”
이런 상황에서 밥을 먹으면 체할 것 같았지만, 소유는 마지못해 수저를 들었다.
얼른 이 자리를 파하고 다해를 내보내고 싶었다.
이곳은 태오와의 소중한 공간이다.
다해가 있는 것만으로도 오염이 되는 것 같았다.
입 안에 하얀 쌀밥을 집어넣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소담스러운 풍미가 느껴졌다.
이곳 가사도우미는 소유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요리 솜씨가 좋은 사람이었다.
뒤이어 다해도 허겁지겁 입에 음식을 집어넣었다.
얼마만의 집밥이던가.
배달 음식이라든가, 편의점 음식은 이제 지겨웠다.
태오가 웃음을 꾹 참고,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캑캑.
잠시 후 다해에게서 소유와 상반된 반응이 나타났다.
미간을 짝 찌푸린 다해가 소유를 쳐다보았다.
소유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음식을 씹고 있었다.
저 계집애가.
다해가 화가 난 듯 모든 반찬을 한 입씩 맛보았다.
그러자 쓰게 느껴질 만큼 짠 음식들이 입 안에 가득 들어찼다.
결국 참다못한 다해가 입속의 음식을 테이블 위에 퉤 뱉었다.
그 무례한 행동에 소유의 표정이 굳었다.
“이걸 음식이라고 내왔니?”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영문을 모르는 소유는 화가 났다.
여사님이 정성스럽게 준비해 준 저녁을 이딴 식으로 뱉어 버리다니.
아무리 제게 감정이 안 좋다고 해도 말이다.
두 여자의 불꽃 튀는 시선 사이로 나른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처형 입맛엔 안 맞으시나 봐요.”
“장난해, 지금? 이딴 음식이 누구 입맛에 맞겠어!”
“흠. 그렇게 말씀하시니 굉장히 서운하네요. 우린 이딴 음식을 매일 먹고 사는데.”
태오가 턱을 괴고 반대편 손으로는 와인 잔을 쓰다듬었다.
다해는 차오르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었다.
이것들이 짜고서 나를 골탕 먹이는 것이 틀림없다.
그들 사이의 긴장감을 읽기라도 하듯 클래식 음악의 박자도 점점 빨라졌다.
“언니. 미안한데, 이만 나가 줘.”
소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 모욕하는 건 상관없지만 우리 태오까지 모욕하는 건 못 참겠어.”
지금 모욕을 당한 게 누군데.
다해는 소유를 쏘아보며,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그릇을 집어 들었다.
“나는 언니가 이 집에 들어오는 것도 싫었지만, 그래도 태오는 언니를 정성스럽게 대접했어.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더 이상 저녁을 같이 먹을 이유가 없잖아.”
다해는 당장이라도 국을 소유의 얼굴에 끼얹어 버리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다해의 의도를 어떻게 읽은 건지 태오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뜨거운 국은 소유의 얼굴에 닿지도 못하고, 오히려 다해의 손등에 튀었다.
“아.”
짧은 신음과 함께 손등이 붉게 물들었다.
태오가 한심하다는 듯 보다 소유에게 말했다.
“소유야. 잠깐만 올라가 있을래?”
다해에게 하던 것과 달리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처형과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래.”
태오가 씩 웃었다.
부드러운 부탁이었지만 어쩐지 소유는 거절할 수 없었다.
망설이던 소유는 뒤로 돌아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태오가 걱정되긴 했지만, 그를 믿기로 했다.
둘만 남았을 때, 태오는 거칠게 다해의 손을 놓았다.
그러자 다해가 다시 억지로 태오의 손을 끌고 와 세게 잡았다.
“만약 선 자리에 내가 나갔다면 내가 제부와 함께 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니까 참 묘하지 않아요?”
태오는 별다른 대꾸 없이 새로운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아, 좀 후회되려고 하네. 내가 대신 나갔으면 그 다정한 시선도, 말도 다 나를 향했을 텐데.”
너무 가소로운 나머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사람의 일이란 건 참 이렇게 웃겨요, 제부.”
“야.”
그때, 소유의 앞에서는 꼭꼭 감춰 두었던 태오의 진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너, 내가 소유한테 꼼짝 못 한다고, 우스워 보이지?”
“제부, 말이 좀 세네?”
“너 하나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거, 애석하게도 나한텐 일도 아니야.”
태오의 무시무시한 말과 클래식 음악이 적절히 어우러져 오히려 더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런데도 너를 아직도 살려 두는 건 내가 너그러워서가 아니야.”
태오가 불결하다는 듯 다해에게 잡힌 제 손을 세게 빼냈다.
“네가 한때 소유의 언니여서도 아니야.”
“…….”
“네가 아직 네 죗값을 덜 받아서야. 벌써 죽어 버리면 아쉽잖아? 소유가 아팠던 만큼 너도 똑같이 아파야 하는 건데. 안 그래?”
태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느긋한 걸음으로 다이닝 룸 내부를 배회했다.
그러다 그가 고의로 와인 잔을 툭 떨어뜨렸다.
파편과 함께 빨간 와인이 사방으로 튀었다.
깨끗한 바닥이 빨갛게 물드는 이질적인 광경에 다해가 순식간에 두려움에 빠져 허우적댔다.
와인 잔의 파편은 자신의 육체, 새빨간 와인은 자신의 피인 것만 같은 환각이 아른거렸다.
태오가 그 환각 속에서 완벽한 모습으로 웃었다.
“소유와 똑같은 시간만큼, 똑같이 아파. 그다음엔 이렇게 발악 안 해도 내가 알아서 죽여 줄 테니까.”
더 큰 고통을 느끼게 해 주기 위해 숨통을 끊어 놓지 않는다, 라.
얼마나 두려운 말인가.
차라리 ‘너를 죽이겠다’라고 선언하는 것이 덜 무서울 것이다.
그는 저와 똑같은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짐승의 피가 섞인 다른 차원의 존재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뭐? 네가 대신 나왔다면 내가 너에게 다정했을 거라고? 꿈도 참 크지.”
“…….”
“이봐. 진짜 우스운 건 네 그 같잖은 착각이야.”
다해가 불현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맞은편의 소유의 반찬을 손으로 집어 먹었다.
자신의 것과 달리 몹시 군침 돌고, 향기로운 음식이었다.
방금 전 소유의 반응으로 보아 제 음식만 달랐다는 것을 모르는 듯했다.
그 사실을 아는 건 오로지 태오뿐이었다.
이 악랄한 남자가 제 음식에만 무언가를 섞은 것이 분명했다.
소유 몰래.
다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태오가 그런 다해를 비웃었다.
“내가 너한테 해 줄 수 있는 대접은 그 정도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대접을 받고 싶거든 언제든 찾아와.”
“너, 너…….”
다해가 무어라 소리를 치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개 같은 처형. 미친개를 쫓는 방법을 알아요?”
다해의 주머니에서 훔친 장식품이 툭 떨어졌다.
태오가 눈썹 뼈를 만지작대며 혀를 찼다.
다해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테이블을 짚었다.
“미친개가 물기 전에 내가 먼저 무는 거지.”
태오는 그녀의 털끝 하나 손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두려움에 잠식당했다.
이 세상엔 물리적인 폭력보다 무서운 언어가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광견병에 걸린 개X끼한테 물려서 신세 망치면 나만 손해잖아?”
다해가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막 재밌어지려던 참인데, 벌써 가시려고요?”
미친놈.
진짜 미친놈은 제가 아니라 이놈이다.
다해는 전속력으로 현관문을 향해 달려갔다.
“그럼 또 오세요, 처형. 그땐 두 번 다시 ‘대접’의 ‘대’자도 못 꺼내게 성대히 대접해 드릴 테니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생글생글 웃던 태오가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다해의 식기를 싱크대에 세게 던져 깨부수고, 자신의 손을 벅벅 닦았다.
손 비누, 수세미, 세제 등을 총동원해서.
손이 뻘게질 정도로 세척하고 나서야 만족하고 물기를 털었다.
미친개와 닿은 손으로 소중한 소유를 만질 수는 없으니까.
태오가 와인 잔의 잔해를 모두 치우고 나서야 소유가 슬그머니 아래로 내려왔다.
“갔어?”
“응.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긴 모양이시던데?”
소유가 한숨을 푹 쉬었다.
태오가 그런 소유를 꽉 안았다.
“한숨 쉬지 말고, 맛있는 디저트 먹자. 기분 풀리게.”
그는 소유가 아는 모습으로 감쪽같이 돌아와 있었다.
“너한텐 정말 정말 미안해.”
“부부끼리 뭐가 미안해. 괜찮아.”
“언니가 너를 만만하게 보고 또 이런 짓을 한다면 그땐 내가 진짜 제대로 한마디 할게.”
“……뭐, 그래.”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섬찟한 속마음을 감추고서 태오가 다정하게 웃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유에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웃음, 모든 걸 아는 다해에겐 더할 나위 없이 소름 돋을 웃음이었다.
태오는 웃음 아래 많은 것을 감추고서 소유와 달콤한 디저트를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