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 나의 사계절이었던 (36/95)


36. 나의 사계절이었던
2022.08.01.



 
늦은 저녁, 누군가가 재현의 현관문을 약하게 두드렸다.

초조한 기분으로 기다리고 있던 재현은 문을 벌컥 열었다.


“나야. 재현아.”

어쩐지 겁에 질린 모습의 다해가 인사를 건넸다.

재현은 성가시다는 듯 대꾸도 없이 등을 돌렸다.

다해가 재현에게 애절하게 매달렸다.


“재현아. 내가 잘할게. 네가 했던 행동, 다 잊을게. 그러니까 우리 그냥 다시 돌아가자. 다 그만두고…….”

태오의 진짜 모습을 본 순간 모든 결의를 잃었다.

소유를 망가뜨리기 위한 재현과의 공모조차 소용이 없게 느껴졌다.

도저히 그 무시무시한 남자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놔.”

그러나 재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녀를 툭 밀쳤다.

다해의 익숙한 패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 좋았잖아.”

이제 저런 가증스러운 연기에 속아 주는 척하기도 지쳤다.


“소유도 그 남자랑 좋아 보이더라.”

“너 설마 소유한테 또 손을 댄 건 아니겠지?”

“아니야. 정말 아니야.”

다해가 양팔을 흔들며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재현이 한숨을 쉬며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마셨다.

다해는 부들부들 떨리는 제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한기에 꽁꽁 언 몸은 아직도 녹지 않았다.


“1231.”

다해가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뭐?”

“그 집 비밀번호 말이야.”

칭찬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공을 알아주리라 생각했다.

그 무서운 남자가 사는 집에 홀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말 숨이 막힐 듯한 공포를 느꼈다.

당장이라도 제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소유 생일이잖아.”

“……뭐?”

하지만 재현에게서 들려온 말은 뚱딴지같은 것이었다.

다해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밀번호 말이야.”

다해가 헛웃음을 지었다.

비밀번호를 직접 훔쳐본 건 저였지만, 소유의 생일인 줄은 몰랐다.

아니, 애초에 소유의 생일 따위 기억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재현은 단번에 그것이 소유의 생일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너, 내 생일은 기억하니?”

그 오랜 기간 사귀면서 재현이 먼저 다해의 생일을 챙긴 적은 없었다.

며칠 전부터 다해가 갖고 싶은 선물을 조르면 마지못해 사 주는 게 전부였다.

사실 그 똑똑한 석재현이 자신의 생일조차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제가 먼저 호들갑을 떨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소유 생일은 그렇게 바로 떠올려?


“넌 정말 나를 한 번이라도 좋아한 적 없니?”

재현이 맥주를 세게 내려놓았다.

그러자 캔 입구에서 튀어나온 맥주가 사방으로 튀었다.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나. 너랑 사귄 것도, 너랑 헤어진 것도 전부 소유 때문이라고.”

일말의 진심도 없이 저와의 연애를 이어온 것이라면 재현은 정말 찌질한 남자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내가 소유를 괴롭힐까 봐 나와 사귀었다고 하지만, 사실 너는 은근슬쩍 소유의 질투심을 자극하려고 했는지도 모르지.

소유를 향한 백 프로의 진심이라고 포장했지만, 너에겐 은밀한 욕심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유아 물산과 첫사랑.

맹세컨대 넌 단 한 번도 그 두 개를 두고 저울질한 적 없을까?


“재밌다, 석재현.”

난데없이 다해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재현이 마시던 맥주를 빼앗아 마셨다.

방금 전의 겁먹은 모습과 상반되는 태도였다.


“찌질이 새끼.”

사이코와 찌질이.

누가 더 똥차일까.

적어도 사이코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계산대에 올려 놓고 바코드를 찍진 않는다.

오히려 무서울 정도의 집착으로 사랑에 목숨을 걸지.

확실한 건 찌질이가 사이코보다 연인으로서 나은 점은 조금도 없다는 것이다.


“뭐라고?”

다해의 경멸을 읽어 냈으면서 애써 모른 척한 재현이 시치미를 뗐다.

11살. 순수하다면 순수한 나이에 씌었던 콩깍지가 이제야 떨어져 나갔다.

나의 전부였고, 나의 사계절이었고, 나의 세상이었던 석재현은 드디어 죽었다.


“재현아. 나는 네가 왜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줄 알았을까.”

그것 하나만 깨우쳤더라도 이 기나긴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어릴 적에 보았던 어른스럽고 정의로운 네가 영영 변색되지 않을 줄 알았지 뭐야.

너도 어른이 되며, 결국 이렇게 일그러지는구나.


“정다해.”

“비밀번호 알려줬으니, 난 할 만큼 했어.”

정소유처럼 착한 애였다면 지금쯤 이렇게 생각했겠지.

아…… 앞으로는 더 이상 어리석은 행동 하지 말고, 당당하게 나만의 인생을 살자.

그런데 난 정소유가 아니거든.


“내 역할은 여기까지.”

알다시피 난 정다해거든.

네가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던 너의 그 비겁한 모습을, 스스로 목격하는 꼴을 봐야겠어.


“이제 네 차례야.”

최선을 다해 망가져 주라.

나의 전부였고, 나의 사계절이었고, 나의 세상이었던 재현아.


“이제 와서 발 뺄 생각은 아니겠지.”

강태오란 사이코의 바위에 부딪혀 이리저리 산산조각 깨지는 달걀 신세가 되어 주라.

형태도 없이 처참하게 뒹굴어 주라.


“내 손을 잡은 순간, 우린 같은 배에 탄 거야. 뒤로 되돌릴 수 없어. 이미 항구에서 떠난 배를 무슨 수로 되돌리겠어?”

그러면서 그 얄미운 정소유도 함께 추락시켜 주면 정말 고맙겠지만.


“잘해. 실수 없이. 우리 자기는 똑똑하잖아.”

거짓 감정으로 내 고백을 받아 주었을 때부터 너는 이렇게 될 운명이었어.

난 내가 가질 수 없다면 그게 무엇이든 형편없이 망가뜨려야 속이 풀리거든.


“강태오쯤은 아무것도 아니잖아? 응?”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내가 너에 대한 감정을 스위치 끄듯 끌 수 있는 날이 올 줄이야.


“참, 카드 정지시켜 놨더라? 풀어. 더 우스운 꼴로 만들기 전에.”

 

* * *



“꼬모!”

“아이고, 훈이. 고모한테 오세요.”

어린아이들은 정말 하룻밤 새에도 훌쩍 커 있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도진이 한국에 막 돌아왔을 때 마지막으로 훈이를 봤는데, 그 새에 또 팔, 다리가 길쭉해져 있었다.

도진을 닮아서 키가 천장에 닿을 정도로 크려나.

소유가 어린 훈을 꽉 끌어안았다.

아기 향이 나는 보드라운 작은 몸이 좋아서 소유가 배시시 웃었다.

아기를 보고 귀여워하는 소유를 보고 귀여워하는 나.

태오가 소유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도진이 헛기침을 했다.

태오가 다소 어정쩡한 자세로 도진에게 인사를 건넸다.

도진은 태오의 품에 무거운 가방을 잔뜩 안겨 주었다.


“분유랑 기저귀, 장난감, 간식 같은 거 좀 담았어요.”

“말 편하게 하십시오.”

“마음이 안 편한데?”

지은 죄가 있는 태오는 다시 공손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그땐 다시 한번 정말 죄송했습니다, 형님.”

“그럼 우리 퉁 칠까요? 그때 강 서방은 내게 실례를 했고, 오늘 나는 강 서방에게 신세를 지고.”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는 것인지 도진이 전혀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 거래를 시도했다.


“그래 주신다면 전 정말 고맙죠.”

“그래요. 그럼 앞으로 편하게 지내요.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고. 내가 금전적인 문제는 못 도와주겠지만, 부부 생활은 선배니까.”

태오의 마음이 한층 가벼워졌다.

도진이 팔짱을 끼고서 어린 조카와 잘도 노는 소유를 바라보았다.


“내가 강 서방의 심리를 좀 분석해 봤는데.”

“네?”

“아, 내가 대학교 부전공이 심리학이라.”

도대체 이 형님은 정체가 뭐야.


“원래 경영 자체가 사람의 심리와 밀접해 있으니까.”

“아…….”

“아무튼, 강 서방은 지금 아이를 낳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너무 힘들게 소유를 잡았기에 더 강한 결속력을 원하는 거죠?”

전공은 경영학과이고, 부전공은 심리학에다, 취미로는 신점을 보시나.

무속신앙 같은 건 믿지 않는 태오였지만 왠지 소름이 돋았다.


“거기다가 그런 마음을 전혀 알아주지 않는 소유를 향한 서운함까지.”

“……그게 심리학만으로 알 수 있는 부분입니까?”

“보기보다 웃기네, 강 서방.”

난 지금 되게 진지하다고.

태오의 어깨를 제 어깨로 툭 치던 도진이 말했다.


“소유가 좀 그런 면이 있죠? 착해. 되게 착한데, 은근히 사람을 멕여. 악의가 없어서 뭐라고 타박하기도 애매해.”

“…….”

“그리고 또 방금은 내가 어쩐지 소유를 험담한 거 같기도 해서 기분이 살짝 상했어.”

“무서운데요, 형님.”

태오가 한 걸음 물러났다.

정씨 집안 사람들이라고 다 눈치 없고 둔한 게 아니네.

웃으면서 말하니까 더 수상하잖아.


“얼굴에 표정이 잘 드러난다는 말, 들어 본 적 없어요?”

“처음 듣습니다.”

소유와 관련된 일에서만 이렇게 허점을 잘 드러내는 사람인가 보군.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얼마나 좋아해야 이렇게까지 되는 걸까.

태오의 사랑은 성숙한 도진조차 감탄하게 만들었다.

이런 사랑을, 저는 죽을 때까지 경험해 볼 수 없을 테다.


“소유가 저렇게 밝아 보이지만, 아직 큰일을 겪은 지 얼마 안 됐어요. 그전까지는 정상적인 사고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생활을 했고.”

사뭇 진지해진 도진이 말했다.

그사이 소유는 훈이에게 머리카락을 쥐어뜯기고도 좋다고 웃고 있었다.


“나도 사실 작은아버지랑 소유 이야기 듣고 많이 놀랐어요. 저 순한 애가 그 모진 일을 어떻게 견뎌 냈는지도 신기했고. 도통 티를 안 냈거든.”

그래서 안정된 호주 생활을 모두 접고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다시는 그런 일에 휘말리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어서.


“그런 소유에게 강 서방이 내민 손은 유일한 구원이었을 테지. 덕분에 많이 밝아졌어요. 그래도 아직은 덜 아문 곳이 있을 거예요. 그래서 불쑥 아프고 쓰라릴 때가 있을 테고.”

“…….”

“아픔이 없는 우리는 절대 모르겠지.”

태오가 잔잔해진 눈동자로 소유를 눈에 담았다.


“어쩌면 본능적으로 부모자식간의 관계 자체를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 트라우마라고 하죠.”

그렇게까진 정말 생각해 보지 못했다.

누군가의 부모가 되고, 누군가의 자식이 되는 것이 소유에겐 또 하나의 트라우마일 줄은, 정말.


“그러니까 우리 조금만 더 시간을 줍시다. 소유가 완전히 극복할 때까지.”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오늘 도진은 사실 이 말을 하려 찾아온 건지도 모른다.


“제삼자니까 해 줄 수 있는 이야기지. 나도 강 서방 상황이었다면 몰랐을 거예요. 오히려 더 든든한 가정을 만들어 주려고 서둘렀을지도. 그게 유일한 방법인 줄 알고.”

때론 돌아가야 하는 길도 있는 법이다.


“자, 수다가 너무 길었네. 이만 가 봐야겠다. 아, 그리고 직접 경험해 보면 애 낳자는 말 쏙 들어갈지도 몰라. 어린 애 보는 거, 제법 중노동이거든.”

분위기를 풀어 주려는 듯 도진은 짓궂게 말했다.

그리고 제 아들과 사촌 동생에게 인사를 했다.


“훈이, 아빠 간다.”

“앙농.”

훈이가 앙증맞은 손을 흔들었다.


“소유야. 갈게.”

“벌써 가? 차라도 마시고 가지.”

“와이프 기다려. 어떻게 찾은 자유인데. 간다. 훈이 봐 줘서 고맙다. 올 때 특산물 같은 거 좀 사 올게.”

“경기도 가면서 특산물은 무슨. 운전이나 조심히 해.”

소유는 훈이를 안은 채 도진을 배웅했다.

그러곤 우두커니 서 있는 제 남편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까 오빠랑 진지한 얘기 하던데, 무슨 이야기 했어? 오빠가 너 갈궈?”

“혹시 형님이 점 좀 보시나?”

“무슨 말이야?”

태오가 고개를 저으며 훈이와 소유를 한꺼번에 끌어안았다.

왠지 물을 먹은 것처럼 어두워졌지만, 태오가 아무렇지도 않게 굴기에 소유도 더 캐물을 수 없었다.


“숨 마켜요오.”

중간에 낀 훈이만 곤욕이었다.

조카가 낑낑대자 소유가 황급히 태오를 밀어냈다.


“훈이 터지겠어.”

“네가 훈이구나. 안녕? 난 네 고모부야. 정확히 말하자면 당고모부야.”

“어려운 말은 쓰지 마. 그냥 고모부 해.”

“그래. 난 그냥 네 고모부야.”

태오가 최대한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너 진짜 밤톨 같고 귀엽다. 구워 먹으면 맛있겠네.”

 

 
다소 과격한 애정 표현에 훈이가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

놀란 소유가 아이를 어르고 달랬다.


“훈이야, 왜 울어? 응?”

“무쩌워.”

“누가? 고모부가?”

다정함의 최고치를 끌어올린 인사였는데.

마음의 상처를 입은 태오가 가슴에 손을 올렸다.

뭐지. 이 실연의 아픔 같은 고통은.


“아니야. 봐 봐. 멋있지? 잘생긴 고모부 얼굴 좀 보세요.”

소유가 태오의 잘생긴 얼굴로 회유해보려 했으나 아이의 울음소리는 더 커질 뿐이었다.


“저리 가라고 해. 무써워.”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아이의 눈은, 정확했다.

그래. 잘생긴 거랑 무거운 건 별개는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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