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 호랑이 (37/95)


37. 호랑이
2022.08.05.



 


“훈아. 고모부랑 같이 맛있는 거 먹자.”

“시저!”

아이는 하루 종일 고모부를 피해 다니기 바빴다.


“훈아. 고모부랑 신나게 목욕을 한번 해 볼까나…….”

“저리 가아.”

고모의 옆에 딱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태오는 시무룩하게 소유에게 물었다.


“내가 그렇게 비호감이야?”

“그러게 구워 먹는다는 말은 왜 해!”

“너무 귀여워서 다 잡아먹고 싶다는 애정 표현이잖아?”

“꼬맹이한테 하기엔 너무 고차원적인 애정 표현 아니야?”

행여나 그 말을 듣고 또 울어 버릴까 봐 소유는 다급하게 훈이의 귀를 막았다.


“아무튼 난 훈이 씻기고 올게. 넌 설거지하고 있어.”

“알았어.”

태오는 고분고분하게 대답하고서 산발이 된 소유의 머리를 손으로 정리해 줬다.

본의 아니게 소유 혼자 고생을 다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유아식 만들기, 기저귀 치우기, 설거지 등 나머지 잡일은 태오가 도맡았지만, 체력적으로는 소유가 더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쟤를 혼자서 어떻게 씻겨.


“다녀올게!”

목욕만 하면 바로 잠이 드는 편이라 들었기에, 소유는 마지막 숙제를 하듯 결연하게 아이를 욕실로 데려갔다.


“힘내, 내 새끼.”

태오의 응원을 가슴에 새기며.


“훈아. 아빠 오리랑 엄마 오리랑 훈이 오리까지 다 있네. 훈이는 엄마, 아빠 안 보고 싶지?”

적당한 온도의 물을 받은 욕조에 오리 장난감을 동동 띄우고서 소유는 텐션을 높였다.


“꼬모.”

그런데 이 어른스러운 꼬맹이는 엄마, 아빠를 보고 싶은 기색을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엄한 표정으로 소유를 불렀다.


“응?”

“꼬모부가 꼬모도 잡아먹어?”

“……어?”

허를 찌르는 질문을 하는 게 아주 제 아빠를 꼭 빼닮았다.

잠시 얼떨떨한 표정으로 있던 소유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책에서 봤어, 나. 호랑이는 사람을 잡아먹는대.”

으스스한 이야기라도 하듯 훈이가 작게 떨었다.

소유는 훈이를 욕조에 살짝 담가 주고서, 열심히 맞장구를 쳤다.

이미 태오는 아이에게 호랑이 그 이상의 존재가 된 것 같았다.


“그래?”

“응. 그래서 호랑이가 나타나면 도망가라고 했어. 절대 싸우지 말고. 싸우면 나만 손해래.”

듣다 보니 절로 고개를 갸우뚱해졌다.

영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린아이가 깨우치기엔 너무나 통속적인 팁이었다.


“누가 그래?”

“아빠가.”

이 오빠가 진짜.

조기 교육 제대로 하네.

도진다운 교육에 소유가 킥킥 웃었다.


“그런데 너 손해가 뭔 줄 알아?”

“아니? 몰라!”

훈이가 해맑게 웃으며 고모를 꽉 끌어안았다.

덕분에 소유도 훈이만큼 물에 흠뻑 젖어 버렸다.

어차피 같이 씻을 각오 정도는 하고 있었기에 소유는 태연하게 훈이의 머리를 뒤로 넘겨 줬다.

이러니까 진짜 오빠 닮았네. 얼굴도, 성격도.


“그러니까 꼬모, 나랑 같이 도망쳐. 우리 집으로 가.”

이토록 사랑스러운 도주 제안이라니.

태오에겐 미안하지만,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다.


“도망치는 게 상책이래.”

“상책이 뭔데?”

“몰라!”

아이가 까르르 웃으며 오리를 꽉 쥐었다.

오리가 약하게 울었다.

소유는 조금의 그늘 없이 웃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했다.

우리 똑똑한 훈이는 나처럼 아픈 일을 필사적으로 견디는 일은 없을 것 같아서.

그래. 도망치는 게 상책이지. 버티면 나만 손해지.


“훈이야.”

“응?”

“아빠 말 잘 들어. 누가 훈이를 괴롭히거든 꼭 참지 말고 도망가, 알았지?”

“웅!”

울컥할 것 같은 마음을 꾹 내리누르고 아이의 얼굴을 물로 부드럽게 씻었다.


“그리고 고모는 너무 걱정하지 마. 고모부가 고모 잡아먹는 게 아니라 고모가 고모부 잡아먹어. 이 집에선 고모가 호랑이야.”

“히엑.”

놀란 듯 훈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린아이의 세계에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렇게 천사 같은 고모가 호랑이였다니.


“그러니까 고모부한테 잘해 줄래? 고모부 되게 불쌍해.”

“음…….”

“고모부는 훈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해.”

훈이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착하네. 그럼 마저 씻자. 너무 오래 있으면 감기 걸려요.”

 

* * *

장난감으로 난장판이 된 2층과 3층 거실을 모두 치우고 돌아오자 침실엔 적막이 흘렀다.

아이를 재우다가 소유도 같이 잠이 든 모양이다.

태오는 약한 스탠드 조명을 켜 두고서 살금살금 침대로 걸어갔다.

한쪽에 남겨 둔 자리는 태오를 위한 자리인 듯했다.

괜히 마음이 따뜻했다.

태오가 소유를 마주 보고서 속삭였다.


“수고했어.”

그러자 얕은 잠에 들었던 소유가 부스스 눈을 떴다.


“깼어? 미안해. 자.”

“아니야. 너 기다리려고 했는데 깜빡 잠든 거야. 장난감 치우느라 힘들었지.”

소유가 태오의 등을 토닥였다.


“어머니 보면 또 난리 나시겠다. 우리 귀한 아들 고생시켰다고.”

“고생은 네가 더 했지.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태오는 훈이가 잠들고 나서야 통통한 볼을 만져 볼 수 있었다.


“이제야 좀 허락해 주네. 너 이외에 이렇게 나 안달 나게 하는 사람 처음인 거 알지?”

훈이가 색색 숨소리를 내며 한쪽 다리를 이불 밖으로 내놓았다.

그러자 태오가 애정 어린 손길로 다시 이불을 덮어 줬다.


“그래도 너무 예쁘다. 난 아기가 이렇게 예쁜 건지 몰랐어.”

“나도. 고작 하루 보는 거랑 키우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겠지만, 그래도 예뻐. 잘 먹으면 뿌듯하고, 웃으면 같이 웃게 되고.”

신혼부부는 또 이렇게 새로운 단계로 발을 디뎠다.


“태오야. 우리 그러면…….”

“나 먼저 말할게.”

아이 낳을 준비를 시작하자는 말을 하려는데, 태오가 말을 막았다.


“응?”

“소유야. 우리, 아이는 천천히 낳자.”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에 소유가 잠시 말을 잃었다.

분명 태오는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


“왜 그래. 오늘 훈이한테 상처받아서 그래?”

“아니. 곰곰이 생각해 봤어. 내가 너에게 너무 몰아붙인 건 아닌가, 하는 생각.”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었다면 내가 미안해.”

태오가 고개를 저었다.

넌 나한테 미안해할 게 하나도 없어.

남편이랍시고 너를 그저 재촉만 하려던 내 잘못이지.


“너랑 엇갈렸던 시간이 너무 길어서 내가 불안했나 봐.”

헤이즐과 정소유는 다른데.


“우리가 지금처럼 서로를 아끼고 사랑한다면, 아이가 있든 없든 헤어질 일도 없을 텐데.”

노아와 강태오가 다르듯이.


“그러니까 우리, 진짜 준비가 되면 낳자. 내가 아니라 네가 준비가 되는 때.”

“…….”

“조금만 더 기다려 볼게. 너와 날 닮은 애가 너무 보고 싶은데, 잠깐만 참아 볼게.”

소유의 눈에서 눈물이 고이다 툭 떨어졌다.


“너 왜 사람 울리고 그래. 너 아까 도진이 오빠랑 무슨 이야기 했어.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사랑해.”

“…….”

“사랑해, 소유야.”

태오가 미안함을 담아 입술을 소유의 이마에 꾹 내리눌렀다.

그리고 부부 사이에 낀 아이를 꼭 안았다.

이렇게 중간에 아이가 있으면 더 깊은 스킨십도, 사랑의 대화도 하지 못하지만, 이것도 이것대로 괜찮네.

작은 호흡을 내쉬는 아이는 존재만으로도 어른들을 행복하게 해 줬으니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태어날 우리 아기도 이렇게 예쁘겠지.

* * *

소유 손보다는 한참 작은 고양이 발바닥 같은 작은 손이 태오의 볼을 꾹 눌렀다.

피곤함에 좀 더 잠을 청하려던 태오는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 밤톨, 아니, 훈이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왜? 배고파? 아니면 고모 깨워 줄까?”

행여나 또 저를 보고 울음을 터뜨릴까 봐 태오가 물었다.

그러자 고사리 같은 손이 입술을 틀어막는다.


“꼬모부, 나 안아.”

제법 당돌한 요구를 하는 꼬맹이였다.

하지만 태오는 기분이 나쁜 줄도 모르고 감격이 차올랐다.

나를 ‘꼬모부’라고 부르다니.

간밤에 요정이라도 다녀갔나.

왜 갑자기 마음을 열었지.

태오가 조심스럽게 훈이를 들어 안아 거실로 나갔다.

소유의 단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아이가 흥얼거리며 다리를 움직였다.

가벼웠지만 생각보다 묵직했다.

자그마해도 소중한 생명이라는 걸 증명하듯.

태오의 귀를 만지작거리던 아이가 거실의 끝으로 가서 말했다.


“내려 줘.”

태오는 왕자님이 울음을 터뜨릴까 봐 얼른 뜻대로 해 주었다.

그러자 훈이가 난데없이 뜀박질을 시작했다.

다다다, 빠르게 사라지는 아이의 등을 보며 태오는 어리둥절했다.

……뭐 하는 거야?


“따라 해!”

요즘 애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놀이인가.

영문도 모르고 태오는 훈이에게로 달려갔다.

그러자 이번엔 훈이가 반대편으로 다다다 뛰어갔다.

또래치고 긴 다리가 넘어지지도 않고 잘도 나아갔다.


“다시, 꼬모부!”

아이가 그 자리에서 방방 뛰며 재촉했다.

이게 무슨 20대 초반 훈련소를 회상하게 하는 극기 훈련인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땀 나게 달린 탓에 태오는 정신이 아득했다.


“이거 왜 하는 거야?”

태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호랑이가 깨물려고 하면 이렇게 도망치는 거야아!”

훈이가 비책을 알려준다는 듯 속닥거렸다.

한국에도 아직 호랑이가 있나?

얜 어떤 환경에서 자라고 있길래 호랑이 대비 훈련까지 하고 있는 거지?

떠오르는 질문이 한둘이 아니었다.


“도망치는 게 손해래. 싸우면 상책이야!”

“……어?”

무척 철학적인 문장에 태오는 마땅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보통 애였으면 그냥 말실수구나 하겠는데, 도진의 아들이니 또 그게 심오한 의미 같고 그랬다.


“그러니까 꼬모 호랑이 만나면 이렇게 뛰어. 알았지?”

고모 호랑이든, 호랑이 할아버지든 뛰어봤자 어차피 결론은 잡아먹히고 만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동심을 지켜 주고 싶기도 했고, 두 번 다시 밤톨이에게 미움을 받기 싫었다.


“자, 다시!”

훈이가 저 멀리로 우다다 달려갔다.

체력도 좋으시지, 우리 조카님.


“빨리이!”

어제 아이와 소유의 대화를 전혀 듣지 못한 태오는 그냥 하염없이 달렸다.

곤히 잠들어 있던 소유도 이윽고 우당탕탕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두 남자가 누워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화해라도 했나.

슬그머니 침실 문을 열자 아침 댓바람부터 운동회를 펼치고 있는 태오와 훈이 보였다.


“호랑이는 사람을 자바 머거.”

아직도 그 호랑이 타령인가.

소유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태오가 즐거우면 됐지, 뭐.

하나도 즐겁지 않은 태오를 혼자 오해하고서 묵묵히 아침 준비를 했다.


“잠깐만. 호랑이 만나기 전에 고모부 먼저 죽겠다.”

태오는 쓰러진 채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훈이가 햄버거 놀이를 하듯 그의 위로 펄쩍 뛰어들었다.

그제야 어제 도진의 말이 백 퍼센트 이해되는 태오였다.


“얼른! 빨리이, 일어나!”


‘아, 그리고 직접 경험해 보면 애 낳자는 말 쏙 들어갈지도 몰라. 어린 애 보는 거, 제법 중노동이거든.’

숨이나 돌릴 겸 태오가 말했다.


“훈아. 그런데 고모부한테 왜 화가 풀렸어?”

“화 안 나써.”

“어제 화난 거 아니었어?”

태오가 훈이를 번쩍 안아 제 배 위에 앉혔다.

건방진 꼬맹이 주제에 귀엽기는.


 


“나는 꼬모부가 호랑인 줄 알았는데 아니래, 꼬모가. 그래서 도망 안 가는 것뿐이야.”

“…….”

하아, 뭘까.

도대체 우리와 호랑이의 상관관계는.

태오의 의문은 점점 짙어졌다.


“어이, 거기 땀 냄새 나는 남자 둘. 얼른 밥 먹고 같이 씻어.”

소유가 1층에서 두 사람을 부르고서야 호랑이 논란은 일단락이 되었다.

아니, 사실 태오는 아직 의문을 풀지 못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