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나비의 폭풍 날갯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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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나비의 폭풍 날갯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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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나비의 폭풍 날갯짓
2022.08.08.
“훈이 빠빠이.”
“웅. 뺘뺘이.”
밥 먹고 소방차 놀이를 좀 해 주고 있으니 도진이 훈이를 데리러 왔다.
“수고했다. 이건 소소한 보답.”
“우와, 이거 한우야?”
통이 큰 도진은 부부의 품에 한우를 안겨 줬다.
“훈이가 좀 별나지? 너도, 강 서방도 고생 많았어.”
“별난 게 아니라 엄청 똑똑하던데?”
소유와 도진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훈이가 짧은 손가락을 까딱하며 태오를 불렀다.
태오는 허리를 한참 굽혀 아이와 마주 보았다.
“꼬모부, 호랑이 조심.”
“……응. 조심할게.”
더 이상 이해하기를 포기하기로 했다.
나중에 이 밤톨이가 크면 물어보는 게 빠르겠어.
그렇게 훈이가 돌아가고 시끌벅적한 집 안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진이 빠진 태오가 소파에 널브러졌다.
몸으로 놀아 주느라 체력의 한계가 제대로 찾아왔다.
“겨우 반나절인데.”
“응?”
태오의 앞머리를 뒤로 넘겨 주던 소유가 대답했다.
“형님은 1년 365일을 이렇게 산다는 거 아니야.”
“그럼 애 키우는 게 보통 일이겠어요?”
보모의 손에서 자란 태오였기에 일반적인 부모의 고충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래도 그 쪼그마한 게 있다가 없어지니까 허전하네.”
까르르 웃는 웃음소리가, 작은 발바닥 소리가 벌써 그리워지려고 한다.
원래 둘이서도 알콩달콩 잘 놀았으면서 괜히 허전하기도 하고.
“우리 다음 주에 밤톨이 데리고 놀이공원이라도 갈까?”
“훈이한테 빠졌네.”
처음엔 데면데면하더니.
그래도 그 모습이 썩 나빠 보이진 않아 소유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젠 나한테 집중해, 여보.”
“난 항상 여보한테 집중하고 있지.”
“웃기네. 방금 누가 봐도 난 뒷전이었어. 됐고, 옷이나 갈아입고 나와. 고생했으니까 소고기 먹자.”
입이 짧은 태오조차도 이 순간만큼은 군침이 돌았다.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허기짐이었다.
“술은? 와인? 맥주?”
태오가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오늘 같은 날은 맥주지.”
* * *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이고,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정 팀장님.”
오늘은 소유가 처음으로 뚫은 거래처와의 미팅 날이었다.
곤란하거나 부당한 일이 있는지 체크하려고 동석했던 도진은 흐뭇하게 웃으며 노트를 덮었다.
제 도움은 필요 없을 것 같다.
이제 사촌 동생은 어엿한 무역회사의 책임자처럼 보였다.
“기한만 맞춰 주신다면, 좋은 관계를 계속 이어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럼요. 그 부분은 특별히 신경 쓰겠습니다.”
무례하지 않게 상대방을 압박하는 고단수의 언변까지.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작은아버지.]
내심 초조하게 미팅 결과를 기다리는 희훈에게도 그렇게 문자를 보내 놓았다.
[수고했어. 아무것도 모르는 애 가르치느라. 나중에 맛있는 밥 사 줄게.]
[저보다는 강 서방한테 사야 할 것 같은데요?]
그사이 소유는 제법 카리스마 있게 사장에게 악수를 청했다.
보수적인 업계에서 ‘어린 여자’라는 이유로 몹쓸 처우를 받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소유는 잘해 낼 것 같다.
이 모습을 공연옥 그 여자가 봤으면 좋았을 텐데.
씁쓸한 기분으로 도진은 거래처의 정보가 든 파일을 다시 훑었다.
신생인 데다, 소규모로 운영되는 회사이긴 하지만, 사장은 대기업 생산 공장에서 오랜 근무 경험이 있었다. 그를 따라 나온 직원들도 대부분 경력직이었고.
잘만 맡기면 최고의 파트너가 될 수 있을 테다.
어디서 이런 알짜 회사를 찾아왔을꼬.
“저희,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인품까지 좋아 보이는 거래처 사장은 강화 그룹의 협력체와 계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에 감격한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공장이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서는 결정적인 순간이니까.
“우리 유아 물산도 사장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렇게 소유의 첫 번째 단독 미팅은 끝이 났다.
거래처 사장을 배웅하고 나서 도진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막 퇴근 시간이었다.
“수고했다. 이제 혼자서도 잘하네. 기념으로 같이 저녁이나…….”
쌩.
방금 내 앞으로 뭐가 지나갔지.
소유는 거래처 사장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지자마자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다급하게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뭐가 그렇게 급해?”
“오늘 회식은 오빠한테 좀 부탁할게.”
소유는 머리를 질끈 묶고 무너진 화장을 대충 손보기 시작했다.
도진이 파티션에 기대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 뭐가 그렇게 급하냐고.”
“아…… 나 오늘 제사.”
“어?”
“시댁 제사.”
사실 한 10분 전에 출발할 예정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미팅이 길어졌다.
한 마디로 소유는 지금 부리나케 달려 나가야 한다는 소리다.
노인네들에게 잔소리를 덜 들으려면.
“설마 제사 요리도 직접 해?”
“재벌가가 조상님들한테 더 정성이야.”
아휴, 우리 소유 시집살이 제대로 하네.
하나만 해도 힘든 무역회사 경영과 재벌가 며느리를 동시에 하려니.
도진은 그녀가 가여웠다.
“뭘 그렇게 필사적이야? 바쁘면 좀 늦을 수도 있고, 참석 못 할 수도 있지.”
“버티기로 했어. 말도 안 되지만 그게 어머님께 우리 사랑의 척도가 된다면 버텨야지.”
아아, 사랑의 힘이군.
“오빠. 미안. 좀 부탁해. 직원들 맛있는 거 사 줘!”
소유는 높은 구두를 신고서 잘도 달렸다.
인사를 하려고 손을 들었던 도진은 머쓱하게 아래로 내렸다.
바쁘다, 바빠. 현대 소유 사회.
소유는 태오에게 선물 받은 비싼 명품 가방도 조수석에다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차에 올라탔다.
아직 운전은 서툴렀지만, 오늘만큼은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어야 한다.
다행히도 도로가 주차장이 되는 피크 시간대는 가까스로 피했다.
중세시대의 성처럼 한없이 호화스러운 저택에 도착하자 경호원들이 소유의 차를 보고 비켜 줬다.
“사모님. 차는 저희가 주차할 테니 얼른 들어가 보세요.”
“다 오셨나요?”
“네. 전부 다.”
망했다.
소유는 저를 안타까워하는 경호원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기 전 빠르게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집안은 겉모습 또한 매우 중요시하게 생각하는 편이었으니까.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미팅이…….”
일단 들어가자마자 고개부터 조아렸다.
그러다 눈앞에 들어온 이색적인 광경에 그만 말을 잃고 말았다.
집안사람들이 한데 모여 전을 굽고 있었다.
정말, 단 사람도 빠짐없이.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제가 왜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시아버지부터, 얼굴에 불만이 가득한 첫째 도련님까지.
고모님들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드러누웠다.
“왔어? 수고했어. 좀 쉬어.”
아버지와 호박전을 굽고 있던 태오가 태연하게 말했다.
쉬긴 뭘 쉬어!
놀란 소유가 태오에게 눈으로 물었다.
“아, 생각해 보니까 우리 조상님 제사인데, 우리가 직접 음식을 하는 게 맞겠더라고. 안 그래요, 아버지?”
강준영 회장은 이를 악물고서 물었다.
“강화 그룹의 미래에 대해 할 말이 있다고 부르더니 늙은 아버지 일 시키려고 불렀냐?”
“이게 강화 그룹의 미래예요. 구시대적인 제도 타파, 효도는 셀프.”
사실 오늘 이 자리는 태오가 긴급회의를 할 게 있다며 불렀다.
이복동생을 입적시킨 이후 강 회장은 웬만하면 아들의 말을 들어주려고 애썼다.
덕분에 애꿎은 이복동생들과 작은아버지들까지 끌려온 것이다.
“요즘 시대에 딱 걸맞은 가정 문화 아닙니까? 이걸로 따로 기사도 내려고요. 그럼 우리 강화 그룹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도 더 생겨날 거라 예상됩니다.”
내 남편이지만 왜 얄밉지.
“강태오. 너…….”
“고모님들께도 말씀드렸다시피 이게 정 하기 힘들면 다음 해부터는 전문가분들께 맡기는 것도 나쁘진 않죠.”
작은 나비의 날갯짓과도 같던 작은 반란은 강화 가(家)의 근간을 뒤흔들고도 남을 거대한 폭풍이 되었다.
“아이고, 두야.”
시아버지가 금방이라도 쓰러지실 것 같아 소유는 다급하게 부엌으로 도망쳤다.
부엌에선 서령이 홀로 국을 끓이고 있었다.
“어머니.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서령은 입을 가리고 몰래 웃고 있었다.
“어머니?”
곧 참지 못하고 커다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몸져누운 고모들이 벌떡 일어날 정도로 큰 웃음소리였다.
콧대 높은 강화 가(家) 인간들을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제법이구나.”
서령이 일평생 꿈꿔 오던 세상을 요 발칙한 며느리가 이뤄 줄 줄이야.
오늘은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날일 테다.
앞으로 또 어떤 변화가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가 될 정도였다.
그러다 서령의 시선이 상처투성이 소유의 발에 닿았다.
구두를 신고 그대로 무지막지하게 달린 탓에 생겨난 상처였다.
소유가 회사 일과 며느리 노릇을 병행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 중인지 보여 주는 증거였다.
“발은 왜 그 모양이니?”
“괜찮습니다. 어머니, 국은 제가 끓일게요.”
“내가 별로 안 괜찮아. 2층 거실 장식장 위에 구급상자 있으니 치료하고 내려와.”
그 말을 들은 소유가 울컥했다.
“어머니 지금 저 걱정해 주시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다녀와. 태오 보면 또 난리 난다. 이제 저 망나니는 나도 무서워지려고 하니까.”
서령은 버럭 했지만, 소유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곧 오해를 완전히 풀 수 있게 될지도.
“네. 금방 다녀올게요.”
소유는 발이 아픈 줄도 모르고 활기차게 2층 계단으로 향했다.
“형수님!”
그때 누군가가 소유를 불렀다.
둘째 도련님인 준오였다.
결혼식 이후로 처음 보는데, 첫째 도련님인 선오와 달리 소유에게 적의를 보이지 않았다.
성격도 형과 달리 순한 편이라 들었다.
“이것 좀 드셔 보세요.”
준오가 수줍게 구운 동그랑땡을 내밀었다.
소유가 선뜻 그것을 받아먹고 엄지를 치켜올렸다.
“맛있어요!”
“정말요? 다행이다. 저는 형수님이 우리 집에 오신 거 너무 좋아요.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거든요.”
늘 태오와 서령에게 인정받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건 차가운 외면뿐이었다.
그 외면 속에서 형인 선오는 삐딱하게 자라났고, 준오는 우울하게 자라났다.
“제가 딱 원하던 집안 분위기예요.”
그래서 준오는 이 변화가 즐겁기만 할 뿐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외롭지 않은 순간이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요. 저 금방 다시 내려와서 동그랑땡 굽는 거 도와드릴게요.”
“네! 같이 해요.”
동생은 없었지만 어린 남동생이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누구보다 잘 알지.
집에서 객식구 취급받는 설움.
소유는 앞으로 준오에게 더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서 태오가 이글이글 질투의 눈빛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렇게 정신없는 와중, 조수석에 아무렇게나 버려 둔 가방 속 소유의 휴대폰이 약하게 울렸다.
발신인은 재현이었다.
[소유야. 정다해가 또 너 찾아가서 행패 부렸다며? 내가 다 네 얼굴 보기 미안하다.]
소유는 확인조차 하지 않았건만 재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이어 문자를 발송했다.
[정다해 일로 할 말이 있어. 우리 만나서 잠깐 이야기 좀 하면 안 될까? 정다해가 더 큰 사고 치기 전에 우리가 막아야지. 사실 나도 지금 걔 때문에 곤란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야.]
마지막 문자는 소유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필살기였다.
[그래도 한땐 네 언니였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