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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속이기 싫어서 (39/95)


39. 속이기 싫어서
2022.08.12.



 
살얼음판 같긴 했지만 제사는 무사히 지냈다.

그리고 다음 제사부터는 전문가에게 준비를 부탁하기로 했다.

물론 말도 안 된다며, 할머니가 살아 계셨으면 노발대발하셨을 거라는 고모들의 반항이 있었지만, 강준영 회장은 단호했다.

두 번 다시 이 짓은 못 한다며.

그렇게 애처가 한 명에 의해 강화 가(家)의 전통은 깨졌다.

불가능해 보였던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아, 힘들어.”

“피곤하지. 얼른 집에 가서 쉬자.”

그 대단한 반란의 주인공들은 녹초가 된 채 차에 올라탔다.

소유의 차는 경호원들이 대신 가져다주기로 했다.


“내 새끼, 오늘 계약 뚫은 기념으로 파티해야 되는데.”

태오가 애틋하게 소유의 볼을 쓰다듬었다.


“다음에. 지금은 그냥 얼른 씻고 자고 싶어.”

기름 냄새가 진동을 하는 몸을 깨끗이 씻어 내고 침대로 뛰어들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칭찬은 들어. 잘했다, 잘했다, 내 새끼.”

태오가 말랑거리는 소유의 볼을 장난스럽게 주물렀다.

결국 소유도 웃음이 터졌다.


“고마워. 다 네 덕분이지.”

“뭐가 내 덕분이야. 네가 잘한 거지.”

태오가 소유에게 입을 맞추려는지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다 문득 미간을 찌푸리고 행동을 멈췄다.

고분고분하게 태오의 입술을 기다리던 소유가 의아한 얼굴로 눈을 떴다.


“왜 그래?”

“그러고 보니까 너 아까 강준오 그놈이랑 엄청 친해 보이더라?”

제 옆에 딱 붙어 있을 줄 알았는데, 소유는 내내 준오와 함께 동그랑땡을 구웠다.

그것도 모자라 어찌나 즐거운지 둘 사이에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다가 아버지에게 한 소리 듣기도 했다.


“내가 그놈 싫어하는 거 알아, 몰라.”

다정하던 손길이 불쑥 방향을 틀었다.

소유의 볼을 꾹 눌러 붕어 입을 만든 태오가 으르렁댔다.


“그런데 아주 둘 사이에 꿀이 흐르더라?”

소유는 황당했다.

동생에게까지 질투를 하다니.


“도련님이잖아.”

소유가 다 뭉개진 발음으로 나름대로 항변을 했다.


“도련님? 네가 도련님이 어디 있어? 난 동생 없어.”

그러자 태오가 차갑게 대꾸했다.

이따금 태오는 이럴 때가 있다.

저를 제외한 타인에게 조금의 곁도 내어주지 않을 만큼 삭막하게 굴 때가.

제겐 평생 이런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지만, 왠지 씁쓸했다.


“아버지가 멋대로 데려온 애들이야. 나한텐 아무런 동의도 없이. 그런데 걔네가 왜 내 동생이야?”

“네 입장에선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지만, 도련님들은 많이 외로웠을 거야.”

외롭든 말든, 선오나 준오의 마음 따위 헤아려 보려 시도한 적 없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 네가 그런 처지였다면. 태어나자마자 궁궐 같은 집에 떨어졌는데, 엄마 얼굴은 보지도 못했어. 새어머니란 사람도, 형이란 사람도 철저하게 외면하기만 해. 어린 나이에 얼마나 상처를 받았겠어.”

“내가 왜 걔네의 입장이 되어야 하지?”

두 사람은 대부분 잘 맞았지만, 이렇듯 사고방식 자체가 다른 부분도 있었다.


“물론 그 일은 너에게도 상처였겠지. 하지만 그건 해묵은 어른들 잘못이지. 도련님들 잘못이 아니야.”

이 집에 들어온 직후 선오와 준오는 친모와는 완전히 인연이 끊겼다.

두 아이는 서로에게 의지한 채 그 긴 시간을 버텨 왔을 것이다.

아까 준오가 그토록 기뻐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묘하게 날이 선 선오도 이해될 것 같았고.


“막 좋아하라는 소리는 아니지만, 너무 싫어하진 마.”

그런 소유를 빤히 바라보던 태오가 한숨을 쉬다가 운전석에 똑바로 앉았다.


“난 너처럼 안 착해. 그런 식으로 생각 못 해.”

“아니. 너 착하다니까?”

소유가 애교를 부리듯 태오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다른 사고방식이야 서로 조금씩 양보를 하면 된다.


“착한 내 새끼.”

태오와 만난 후 소유가 변했듯이, 태오도 소유와 만난 후 변하고 있었다.


“생각은 해 볼게. 대신 강준오랑 너무 친해지진 마. 짜증 나니까.”

“알았어. 그런데 뽀뽀는 안 해?”

소유가 마음먹고 끼를 부리면 태오는 속수무책이 되고 만다.

태오는 아까 못다 한 키스를 진하게 퍼붓고는 차에 시동을 켰다.

소유는 붉어진 얼굴을 감싸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가방 속에 있는 휴대폰을 꺼냈다.

여러 개의 부재중 메시지가 와 있었다.


[정 팀장 없는 정 팀장 계약 기념 파티 중.]

도진이 보낸 회식 사진이었다.

픽 웃던 소유가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다 그보다 일찍 도착한 메시지를 발견했다.


[소유야. 정다해가 또 너 찾아가서 행패 부렸다며? 내가 다 네 얼굴 보기 미안하다.]

재현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정다해 일로 할 말이 있어. 우리 만나서 잠깐 이야기 좀 하면 안 될까? 정다해가 더 큰 사고 치기 전에 우리가 막아야지. 사실 나도 지금 걔 때문에 곤란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야.]

소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래도 한땐 네 언니였잖아.]

행복한 기분이 바늘에 찔린 풍선처럼 순식간에 빠져나가 쪼그라졌다.


“왜 그래? 회사에 무슨 일 있어?”

운전 중 힐끔 그녀의 표정을 보던 태오가 물었다.


“아니야.”

소유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태오의 기분까지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더 이상 태오가 재현을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부부가 된 이후에도 태오는 재현으로 인해 몇 번이나 기분이 상했다.

배우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네가 간섭할 문제는 더더욱 아니고. 다시는 연락하지 마.]

냉정한 답장을 보내고선 곧바로 재현의 번호를 차단했다.

소유 스스로도 재현과 더는 얽히고 싶지 않았다.

태오의 심기를 건드린 순간부터 재현은 소유의 친구가 아니었으니까.

설령 재현과 보낸 시간이 태오와 보낸 시간보다 길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소유가 사랑하는 건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태오였으니까.

망설임 없이 끊어 낼 수 있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거지?”

“응. 그냥 쓸데없는 스팸 문자가 와서 차단했어.”

“잘했어. 스팸은 오자마자 차단해야지.”

소유는 시트에 편하게 몸을 기댔다.


“태오야. 나 너무 졸려서 그러는데, 집에 가서 네가 좀 씻겨 주면 안 돼?”

눈은 금방이라도 감기기 직전이었다.

태오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참나. 부끄러워할 땐 언제고 이제 막 부려 먹네.”

지난번에 그렇게 기겁하던 애는 어디 갔나 몰라.


“제발. 부탁이야.”

어지간히도 피곤한 모양이다.

소유가 손을 모아 애원했다.


“좋아. 파티 대신 그런 이벤트라도 해 줘야지.”

태오가 큰 선심을 쓴다는 듯 거만하게 말했다.


“우리 남편이 세상에서 제일 잘생겼어.”

“이럴 때만?”

“아니. 평소에도.”

소유는 금방이라도 까무룩 잠이 들 것 같았다.

그 모습과 밤톨의 모습이 겹쳐 보여 태오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씻기고 난 다음엔 내 마음대로 해도 되나?”

“아니. 그건 안 돼.”

졸린 와중에도 칼 같기는.


“너 체력이 너무 약해. 보약 좀 먹자.”

“네가 너무 강한 거 아니야? 보약이 있다면 먹기야 하겠지만, 네가 기대하는 그런 건 없어.”

“…….”

얘는 가만 보면 남한텐 다 착하면서 나한테만 이렇게 단호하단 말이지.

* * *

태오는 약속대로 보약을 지어 주었다.

확실히 비싼 보약이라 효과는 좋았다.

과로로 창백해졌던 소유의 얼굴에 혈색이 돌 정도였다.

온 사무실을 활기차게 돌아다니는 소유를 보며 좀비가 다 된 도진이 말했다.


“뭘 먹었길래 그렇게 생생해? 좋은 건 같이 먹어.”

그래서 도진에게 나누어 주었더니, 다음날 도진도 같은 보약을 지어 왔다.

그렇게 보약을 생명수처럼 떠받들어야 하는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그래도 유아 물산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바쁜 만큼 그만큼의 성과가 있었고, 유아 물산은 공 여사가 운영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흑자를 기록했다.

이제 희훈과 고 이사는 완전히 일선에서 물러나도 될 정도였다.

소유와 도진은 성취감을 만끽했고, 직원들은 인센티브로 인해 두둑한 지갑을 만끽했다.


“러시아에 선박 무사히 도착했답니다.”

“네. 바이어한텐 제가 연락할게요!”

다시 한번 이 일이 적성에 맞음을 확인한 소유가 러시아의 현재 시각을 확인하고 있는데, 도진이 그녀를 불렀다.


“정 팀장, 잠시 회의실에서 볼까?”

“네.”

어리둥절했지만 소유는 마우스를 놓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진은 실없는 일로 그녀를 따로 불러내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도진을 따라 들어간 회의실에서 전혀 뜻밖의 인물을 봤다.


“이야, 우리 소유 이렇게 보니까 완전히 멋진 사업가네.”

“아저씨가 여긴 어떻게…….”

재현의 아버지인 석영재 교수였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정받는 성형외과 의사이자 대한성형외과 협회의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또, 그는 소유를 친딸처럼 아껴 주던 자상한 옆집 아저씨이기도 했다.

어릴 적엔 소유의 실수도 자주 감춰 주어 공 여사에게 혼나는 걸 막아 주곤 했다.


“어떻게 오긴. 정 사장한테 이야기 듣고 언젠가 한번 찾아와야겠다고 생각은 했단다. 잘 지내는 것 보니 아저씨 마음이 좋네.”

재현과 사이가 껄끄럽긴 하지만 석 교수에게까지 날을 세울 순 없었기에 소유가 어색하게 웃었다.


“일은 할 만하니?”

“네. 오빠도 있고, 직원들도 다들 잘해 주고 있어서요.”

“다행이네. 이렇게 온 김에 나도 너한테 도움이 되고 싶은데.”

“네?”

“의료기기 시장이 아주 큰 돈이 되는 것은 알고 있지?”

도진이 안경을 위로 추켜올렸다.

의료기기 수출이라면, 가격 단위가 높은 만큼 큰 이익이 떨어지는 사업이었다.


“요즘엔 한국의 의료 기술이 많이 발달해서 외국에서 연수를 오기도 해. 또, 한국산 기기를 원하는 닥터들도 많고.”

소유는 그런 그를 빤히 보았다.


“그리고 알다시피 내가 해외 쪽 인맥이 넓단다.”

협회의 회장직을 맡다 보니 논문, 학회 등으로 외국의 의사들을 만날 일이 많은 그였다.

그의 커넥션만 이용한다면 회사엔 아주 좋은 일이 될 테다.


“아저씨가 선물을 하나 주고 싶은데, 유아 물산에서 받아 주겠니?”

 

.
.
.

석 교수가 돌아가고 난 뒤 도진이 말했다.


“맡아. 이건 무조건 맡아야 하는 일이야. 회사 규모도 더 넓힐 수 있고, 또…….”

“그래. 해야지. 굴러들어 온 복을 왜 걷어차.”

“그럼 현재 네가 맡고 있는 사업들은 내가 모조리 가져갈 테니까…….”

“그런데 오빠가 해 주라, 그 사업.”

“어?”

도진이 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다.


“오빠가 맡아 달라고. 이런 큰일은 오빠처럼 능숙한 사람이 하는 게 맞지.”

“하지만 소유야. 이건 네가 따 낸 일이야.”

분명 소유가 가져가야 할 마땅한 성과다.


“혹시 다른 이유가 있는 거야?”

“사적인 이유 섞어서 미안하지만, 재현이랑 얽히고 싶지가 않아. 태오가 싫어해.”

“…….”

“그러니까 오빠가 맡아 줘. 아무리 일이 중요해도 가정을 위태롭게 만들면서까지 하고 싶진 않아.”

 

* * *

태오보다 소유의 퇴근이 빨랐다.

그래서 소유는 가사도우미를 돌려보내고 서툴지만 제 손으로 저녁을 준비했다.

태오가 집에 도착했을 땐 나름 먹음직스러운 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왔어?”

앞치마를 입은 소유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요리했어?”

“응. 일찍 퇴근해서.”

“일찍 퇴근했으면 좀 쉬지.”

태오가 소유를 꼭 안았다.


“왜, 내가 만든 음식은 맛없을까 봐 무서워?”

“뭐래. 나야 좋지. 그럼 나 옷만 금방 갈아입고 올게.”

태오가 소유의 등을 토닥이다가 2층 계단으로 향했다.

그런 태오의 손목을 잡은 소유가 말했다.


“우리 회사, 재현이 아버지랑 같이 사업 하나 진행하기로 했어.”

태오가 멈춰 서며 소유를 돌아보았다.


“거절하기엔 우리 회사에 너무 이익이 되는 사업이라. 그런데 내가 담당자는 아니고 도진 오빠야.”

 

 


“……그래?”

태오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넥타이를 풀었다.


“속이기 싫어서 말하는 거야. 내 일은 아니지만, 그냥, 그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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