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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나의 첫 페이지
2022.08.15.



 


“화난 건, 아니지?”

태오가 웃지를 않기에 소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는 웃지 않는 태오가 낯설었다.


“내가 화가 왜 나.”

그제야 태오가 뒤늦게 씩 웃었다.

사실 어떤 경로로든 자꾸 엮이게 되는 재현의 존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어라 설명하긴 힘들었지만 심기가 불편했다.

짜증 날만큼 거슬렸다.


“좋은 날인데, 같이 기뻐해야지.”

하지만 죄가 없는 소유와 유아 물산에게 티를 낼 순 없었다.

태오의 말에 소유가 배시시 웃었다.


“걱정했어. 혹시라도 불편할까 봐.”

“먼저 말해 줘서 고마워.”

태오가 소유를 꽉 끌어안았다.

이 작고 연약한 육체가 제겐 이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한 숨이다.


“그리고 그런 걸로 내 눈치 보지 마. 당연히 해야지. 어떻게 되찾은 회사인데. 그리고 너랑 형님이 얼마나 최선을 다해 이끌고 있는 회사인데. 좋은 기회라면 언제든 잡아야지.”

“응. 고마워.”

“그런데 너 되게 능력 좋다. 내가 스카우트하고 싶을 정도야.”

이런 애가 공 여사에게 짓눌려 평생을 수동적으로 살았을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질 정도였다.


“안 돼. 난 유아 물산 못 떠나.”

기분이 영 나쁘진 않은지 소유가 태오의 품 안에서 킥킥 웃었다.

태오가 그녀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분이랑은 얼마나 친했어?”

“누구? 아, 재현이 아버지? 친하다기보다는 내게 드물게 잘해 주는 어른이셨지.”

소유가 재잘재잘 말을 이어 갔다.


“어릴 땐 성형 수술은 공짜로 해 주겠다고 하시더니, 내가 스무 살 되자마자 그러시더라. 너무 예뻐서 할 데가 없다고.”

제가 없는 소유의 시간은 심통이 났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궁금하기도 하니, 참, 사람 마음이 우습지.


“……방금 너무 내 자랑 같았나?”

“아니, 맞는 말인데. 뭐. 역시 내 새끼. 최고의 성형외과 의사도 인정한 얼굴이네.”

“딸처럼 대해 주셨어. 그 집에 딸이 없거든. 어디 놀러 갈 때마다 꼭 나도 데려가시고.”

태오가 터질 것 같은 소유욕을 애써 억누르며,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나한텐 도피처였지. 아저씨를 따라간 곳에는 새어머니와 새언니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석재현은 있었겠지.

내가 보지 못한 시절의 너를 홀로 만끽하고, 즐겼겠지.

그 시꺼먼 마음을 감추고서.

어쩌면 음흉한 짓을 시도하려고 했을지도 몰라.


“아저씨가 캠핑을 좋아하시는데…… 태오야, 나 숨 막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힘 조절이 안 되었던 모양이다.

태오가 난감한 표정의 소유를 황급하게 놓았다.


“미안해.”

“그렇게 세게 안 안아도 나 아무 데도 안 가는데.”

소유가 태오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이야기 그만할까?”

“응. 먼저 물어 놓고 변덕 부려서 미안.”

“아니야. 너한텐 지루한 이야기잖아.”

“그게 아니라.”

태오가 소유의 손을 잡았다.


“그게 아니라, 질투가 나서.”

“어?”

“나는 모르는 그 시절의 너와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들에게.”

태오의 솔직한 말에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가 저를 사랑하는 마음이 이토록 크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따라오는 설렘과 그를 더 빨리 알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공존했다.


“나 유치하지?”

태오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러자 소유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실 나도 그런 생각 한 적 있거든.”

“…….”

“임세리 씨 보면서.”

서로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하는 생각마저 닮아가는 모양이다.


“나는 모르는 볼살이 통통하고, 키가 작고, 목소리가 얇은 너를 봤을 테니까. 그걸 임세리 씨만 봤다고 생각하니까 화가 났어.”

태오는 대답 대신 사랑스러운 소유에게 입을 맞췄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소유는 태오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다.

소유의 립스틱이 다 번지도록 급하게 파고들던 태오가 문득 말했다.


“Hazel.”

소유가 눈을 떴다.


“다음 생에도 나를 사랑해 줄 수 있어?”

“당연하지.”

소유의 고개가 다소 격하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다음 생에도, 그다음 생에도 또 태오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싶었다.

어떤 모습으로, 어떤 위치에 있든 태오를 지금처럼 끌어안고 싶었다.


“그럼 그땐 내가 너를 조금 더 빨리 찾아갈게.”

로맨틱한 말에 소유가 울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앙다물었다.


“너를 꼭 찾아낼게. 그땐 너무 늦지 않게 사랑에 빠지자.”

“응! 좋아.”

나도 마냥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을 거야.

발에 생채기가 나도, 수많은 갈림길을 만나도, 포기하지 않고 널 찾아낼 거야.

그래서 숨이 차도록 내게 달려온 너를 안아 줄 거야.


“그리고 널 만나기 전의 내 인생은 아무런 의미 없으니까 아쉬워하지 마.”

“태오야, 나는…….”

“알아. 너에겐 장인어른도 계셨고, 여러 색의 갈피들이 있었겠지. 그런데 난 아니야. 널 만나고서야 비로소 내 무채색 인생에 색이 생긴 거야.”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소유가 태오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태오가 소유를 안아 들어 빙글빙글 돌렸다.

놀이기구라도 타는 듯 소유가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그 전은, 내게 없는 거나 다름없는 시간이야.”

아마 나는 죽을 때까지 못 만날 것이다.

너만큼 날 사랑해 주는 사람을.


“그러니까 나의 첫 페이지는 Hazel을 처음 만난 열아홉 살의 Noah야.”

 

* * *



[태오야. 오늘은 왠지 헤비한 게 먹고 싶은 날이야.]

[내가 괜찮은 소고깃집 아는데 예약해 둘게.]

[좋아. 혼자서 3인분은 거뜬히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소유가 태오와 문자를 주고받으며 싱글벙글 웃었다.

태오와 저녁 메뉴를 정하는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의 피로가 다 풀리는 느낌이다.

맛있는 거 많이 먹고, 멋진 우리 태오 많이 보고, 어리광도 잔뜩 부려야지.

굳게 다짐하며 소유가 마지막 메일을 마저 써 내려갔다.


“정 팀장, 바빠?”

그때 도진이 말을 걸었다.

소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제 메일 하나만 보내면 됩니다.”

얼마만의 칼퇴근인가.

소유는 행복한 감정을 굳이 감추진 않았다.

사장의 딸이라도 퇴근은 좋은 거다.


“저녁에 회식이 하나 있는데.”

그런 소유의 행복을 방해해서 미안하다는 듯 도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회식?”

고개를 갸우뚱한 소유는 달력을 체크했다.

그녀는 모든 일정을 탁상 달력에 꼼꼼하게 기록해 두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거래처와의 회식도, 유아 물산 자체 회식도 없었다.


“급하게 잡힌 회식이라. 석 교수님이 밥 한 끼 하고 싶다고 하시더라.”

도진의 담당 사업이라 소유는 되물었다.


“그런데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 거야?”

“그게…… 석 교수님이 너도 꼭 참석했으면 하시더라.”

소유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계약이 체결되고, 석영재 교수는 유아 물산의 중요한 인맥이 되었다.

인맥 관리도 무역회사 임원들의 주된 업무였다.


“불편하지?”

도진이 소유의 얼굴을 살폈다.

소유는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유아 물산에 무조건 득이 되는 사업이라는 걸 알면서도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원하지 않은 일에 자꾸만 휘말리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저 기우이길 바랐는데, 현실이 되었다.


“괜히 말했다, 미안.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

하지만 개인적인 이유로 도진에게 리스크를 주긴 싫었다.

또, 저로 인해 죄 없는 도진이 저자세가 되는 것도 싫었다.

애초에 이 사업은 소유도 동의한 사업이다.

그러니 일정 부분은 소유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아니야. 오빠.”

소유가 무어라 말하려는데 유쾌한 목소리의 누군가가 입구에서 걸어 들어왔다.

방금 막 유아 물산의 정식 퇴근 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석 교수님.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당황한 도진이 물었다.

원래대로라면 회식 장소에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석 교수는 마치 유아 물산의 퇴근 시간에 딱 맞추기라도 한 듯 절묘한 타이밍에 도착했다.


“오늘따라 진료가 일찍 끝나서 왔지. 마침 퇴근 시간이네. 직원들은 보내고 얼른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석 교수가 신사적이면서도 은근히 강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 소유도 오늘 같이 가는 거지?”

어쩐지 그런 석 교수가 낯설게 느껴졌다.

소유가 어색하게 웃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레지던트들이 맛집은 귀신같이 찾아내거든. 실망 안 시킬 자신 있다고.”

“식당 선정 정도는 저희가 해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 정 이사, 자꾸 서운하게 그럴 거야? 우리가 어디 보통 사이인가?”

도진이 석 교수를 상대하는 사이 소유는 힘없이 휴대폰 잠금을 풀어 태오에게 문자를 보냈다.


[태오야, 미안. 오늘 저녁 못 먹겠다.]

그러자 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소유가 양해를 구하고서 텅 빈 회의실로 들어왔다.


― 오늘 많이 바빠? 기다릴게.

갑작스러운 번복에도 변함없이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와 더욱 미안해졌다.


“그게 아니라…… 갑자기 급한 회식이 잡혔어. 정말 미안해. 소고기는 내일 먹자. 내가 살게.”

태오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만큼이나 소유도 안타까웠다.

얼른 보고 싶은데.


“휴대폰을 수시로 보진 못하겠지만, 틈날 때마다 확인할게. 너 걱정 안 하도록.”

이전에도 회식 문제로 트러블이 있었던 터라 소유가 똑 부러지게 말했다.


― 석 교수랑 하는 회식인가?

그런데 태오에게서 들려온 대답은 전혀 다른 종류였다.


“……응.”

― 형님도 같이 가시는 거고?

“응. 당연하지.”

태오는 다시 침묵했다.

괜히 초조해졌을 때쯤 본래의 목소리로 돌아온 태오가 말했다.


― 웬만하면 술은 먹지 말고, 형님 옆에 꼭 붙어 있고.

그제야 소유는 안심했다.


“응. 알겠어. 너도 꼭 저녁 챙겨 먹어.”

― 알았어. 빨리 와.

“응. 사랑해.”

― 나도 사랑해.

태오와의 통화를 마무리하자 도진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가자. 그리고 분위기 봐서 넌 얼른 빠져나가.”

“고마워, 오빠.”

 

* * *

소유의 목소리가 끊기자마자 태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주위의 온도를 다 얼려 버릴 정도로 시렸다.

태오가 던지듯 휴대폰을 내려놓고 포털 사이트에 ‘석영재’ 세 글자를 검색했다.

저명한 의사답게 프로필이 있었다.

재현과 많이 닮은 얼굴이었다.

화려한 이력은 과시하듯 전시되어 있었다.

태오가 의자에 몸을 길게 기댔다.

석영재. 석재현.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부자다.

소유의 추억 속에 존재하는 인물들이라 애써 잊고 살려고 해도 자꾸만 불쑥 존재감을 드러냈다.

감히, 겁도 없이.

이러면 고분고분히 잊어 줄 수가 없잖아.

자꾸만 짓밟고 싶어지잖아.

다시는 내 시야에 나타나지 않도록.

태오의 눈이 흉포하게 물들었다.

어린 훈이가 무서워하던 호랑이 모습 그 자체였다.

그 맹수가 나른함을 떨쳐 내고 기다란 몸을 일으키면 주위의 작은 동물은 물론 식물조차 몸을 움츠려 스스로를 감추곤 했다.

그의 무자비한 발자국은 땅에 깊이 박혀 자국을 남긴다.

그 자국 아래의 약한 것들은 모두 비명도 없이 빛을 잃는다.


 
툭. 툭. 툭.

바로 그 호랑이가 책상을 손끝으로 툭툭 두드리며 적을 응시하고 있었다.

애써 내리누르고 있던 본능이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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