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짐승이 깨어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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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짐승이 깨어나면
2022.08.22.
현관에서부터 인위적인 이방인의 흔적이 가득했다.
집 안으로 발을 들였던 태오가 서늘하게 웃었다.
너무나 쉽게 예상했던 장면 중 하나가 눈 앞에 펼쳐진 것이다.
태오는 이방인의 구두를 밟고서 계단 위를 올려다보았다.
낯선 향수 냄새가 계단을 타고 올라가 2층으로 향하고 있었다.
굳이 쥐새끼 같은 이방인을 찾느라 애쓸 필요도 없었다.
태오는 향수 냄새를 따라 성큼성큼 걸어갔다.
뛰지 않았다.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는, 뛰지 않는다.
살짝 열린 침실 문틈 사이로 마땅히 그곳에 존재해야 할 존재와 절대 그곳에 존재해서는 안 될 존재가 공존했다.
재현은 곤히 잠든 소유에게로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그의 눈은 탐욕과 복수심으로 불타고 있었다.
재현이 소유에게 닿기 직전.
“거기까지.”
숨죽이고 있던 맹수가 으르렁 소리를 내며 존재를 드러냈다.
아직까지는 제 위험을 오롯이 눈치채지 못한 아둔한 먹잇감이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의사 양반, 거기서 더 나가면 심각한 범죄라.”
“오랜만입니다, 강태오 씨.”
잠자는 맹수의 코털을 건드리지 마라.
그건 오랜 터부였다.
맹수가 깨어났을 때의 재앙은 오롯이 당신 몫이 될 지어니.
“술도 못 마시는 애가 오늘따라 좀 과음을 하더라고요. 아무리 그만 마시라고 말려도 도통 말도 듣지 않고.”
“…….”
“하긴 속상하긴 했을 거예요. 얘한테 제대로 된 친구는 나 하나뿐인데, 남편 때문에 강제로 멀어져야 했잖아요.”
재현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오는 혀로 입 안의 여린 살을 핥았다.
“제게 하소연을 했어요. 아…… 얼마나 힘들게 했으면, 공 여사에게 당할 때도 잘 참아 내던 애가 이렇게 폭발했을까.”
그러나 태오의 표정은 놀라우리만큼 변화가 없었다.
정말, 놀라우리만큼.
이미 충분히 자극을 하고 있는데.
“강태오 씨. 와이프를 너무 속박하는 거 아닙니까?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런 시댁도 모자라, 남편까지. 소유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마치 새로운 불행이나 다름없죠.”
그래서 재현은 태오를 더욱더 세게 건드려 보기로 했다.
“그게 강태오 씨가 생각하는 사랑입니까?”
“…….”
“나는 아닌 것 같은데. 어쩌면 소유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럼에도 태오는 잔잔한 수면처럼 고요했다.
오히려 초조해지기 시작한 건 재현이었다.
“참고로 이 집 비밀번호도 소유가 직접 가르쳐 줬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제가 여기로 어떻게 들어왔겠습니까?”
맹수에게 말려들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무슨 의미인지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나더러 계속 이 집에 오라는 소리인가? 함께 바람을 피우자는 소리인가? 남편 몰래 비밀번호를 알려 줄 이유가 그것밖에 없잖아요.”
맹수에게서 도망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처참하게 깨졌다.
말없이 먹잇감의 재롱을 지켜보던 맹수에게 드디어 눈에 띄는 변화가 생겼다.
그것을 본 재현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웃고 있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불같이 화를 냈어야 할 이야기를 듣고도 태오는 웃고 있었다.
어떤 이의 웃는 얼굴은 찡그린 얼굴보다도 위협적이라는 사실을, 재현은 그 순간에 깨달았다.
“……고, 공연옥 그 여자가 감옥에 갔을 때, 그쪽도 떨어져 나갔어야 했어. 공 여사의 도구였던 주제에 아직도 소유의 옆에 있다니.”
“…….”
“당신은 소유에게 트라우마만 불러일으킬 뿐이야.”
“이제 끝났냐?”
“……뭐라고요?”
바라던 대로 태오가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개소리 끝났냐고.”
태오가 귓구멍을 후벼 팠다.
전혀 쓸모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재현은 태오에게 소유에 대한 불신을 심어 주고 싶었다.
불신은 파멸의 징조니까.
그래서 주인이 없는 침실까지 들어와 이 쇼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태오는 허무하게도 조금의 동요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어차피 죽을 X끼,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게 해 주자, 싶었는데 슬슬 귀가 따갑네.”
“강태오 씨.”
“내가 저번에 너한테 말했지. 계속 심기 건드려 보라고. 내가 무슨 짓을 할지 궁금하다면.”
태오가 천천히 재현의 앞으로 다가갔다.
재현의 향수 냄새로 가득 찼던 침실이 다시 주인의 향수 냄새로 덮여갔다.
태오의 향수 냄새가 더 독해서일까.
아니면, 태오가 힘의 우위에 있다는 것이 은연중에 드러난 것일까.
“네가 진짜 거북할 정도로 가소로웠지만, 잊어 보기로 했지. 네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내 기억에서 잊히는 거거든.”
“…….”
“그래. 소유가 힘들 때 한 번 정도는 네 도움을 받았을 테니까. 어쩔 땐 의지가 되었던 적도 있었을 테니까. 소유의 모든 어린 시절이 너와 연결되어 있으니까.”
원래도 낮았던 태오의 목소리가 끝을 모르고 낮아졌다.
“엿 같은 X끼지만, 너란 놈도 소유의 시간 속에 살았던 X끼니까.”
어찌나 낮았던지 인간의 근본적인 어떤 것을 움켜쥐고 긁어낼 정도였다.
재현의 털이 바짝 섰다.
“그런데 인생이 너무 평탄해서 지루하신가 봐? 이렇게 스스로 불 속으로 뛰어들고.”
태오가 손목에 두르고 있던 시계를 풀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웬만한 집값과 맞먹는 고액의 시계였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정 그렇다면 그에 마땅한 반응을 해 줘야지. 네 몸에 기름을 뿌리고, 더 큰 불씨를 던져 넣어 타들어 가는 고통을 맛보게 해 줘야지.”
처음 경험해 보는 극한의 공포가 재현을 덮쳤다.
재현이 협탁에 놓인 스탠드 조명의 기둥을 잡고서 마지막 발악을 했다.
“만약 내가 오늘 소유랑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해도, 당신은 과연 그런 반응이었을까?”
그마저도 태오의 시야에 들어와 버렸지만 말이다.
“아니, 혹시 알아? 과거에 우리가 친구로서의 선을 넘은 적 있을지? 당신과 결혼하기 전에 말이야. 그렇다고 해도 변함없이 소유를 사랑할 수 있겠어?”
“…….”
“내가 정소유랑 잤다고 해도…….”
“상관없어.”
“뭐?”
“상관없다고.”
태오가 권태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유가 너랑 잠을 잤든, 키스를 했든 상관없다고.”
미친 X끼.
이건 진짜 미친 X끼다.
감히 사고의 방향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미친 X끼다.
재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차피 죽는 건 네 놈 하나니까.”
“…….”
“여태 세상이 네 것인 줄 알았지?”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는데, 재현의 발은 바닥에 뿌리를 내리기라도 한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올가미에 걸려든 것 같았다.
그것은 발버둥 치면 발버둥 칠수록 재현의 발목을 세게 옭아맬 뿐이었다.
살갗을 파고드는 올가미에 의해 검붉은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아버지는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성형외과 의사에다 그 머리를 물려받았으니 언제나 성적은 전교권이었을 거고, 수재들만 모인다는 의대에서도 넌 눈에 띄었을 거야.”
“…….”
“교수님들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했을 거고, 네 앞날에는 탄탄대로가 펼쳐져 있었겠지. 넌 딱히 애쓰려고 한 적은 없었을 거야. 성적이든, 사람들이든 쉽게 네 손으로 주무를 수 있었으니까.”
태오는 빠른 속도로 읊조렸지만, 그의 발음은 놀랍도록 정확했다.
“그래서 거만해졌겠지. 고귀하신 왕자님께서 남들 눈치까지 볼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 그것까지 비난할 생각은 없어.”
피하려고 발버둥 쳐도 그가 내뱉은 모든 단어는 재현의 살갗을 난도질하며 스며들었다.
“그런데 상대를 봐 가면서 까불었어야지. 내 앞에서도 그 왕자님 행세가 통할 줄 알았던 건가? 아니면 나도 네 밑일 거라 생각했던 건가?”
어느 쪽이든 태오의 입장에선 헛웃음만 나올 오만일 뿐이었다.
“이봐.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너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도 있어.”
재현이 붙잡고 있는 스탠드 조명을, 태오가 발로 찼다.
그것은 아주 처참하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너 하나 사라져도 내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
재현은 떨리는 시선으로 아래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에겐 아무런 무기도 없었다.
태오는 그의 멱살을 잡고 침실 밖으로 나왔다.
재현은 무력하게 끌려갈 뿐이었다.
침실 문이 완전히 닫히자마자 그나마 있던 이성마저 끊겼다.
태오는 섬광이 번뜩이는 눈동자로 적의 기를 눌렀다.
“소유가 없는 곳에선 난 거리낄 게 없는 놈이야. 그런데 공교롭게도, 지금 하필 둘이 있네?”
소유가 있는 곳은 침실, 이곳은 거실.
엄연히 분리된 다른 공간이다.
태오가 멱살을 잡은 채로 재현을 몰아붙였다.
어느새 재현은 난간에 몸을 기대어 반쯤은 넘어간 상태였다.
2층이긴 하지만 워낙 천장이 높은 집이라 불쑥 겁이 났다.
“겨우 이 정도로 겁을 내면서 감히 내 심기를 건드렸어?”
재현은 당장이라도 1층 바닥으로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공포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재현을 보며 태오가 입꼬리를 끌어당겨 올렸다.
태오가 팔에 더욱 힘을 줬다.
재현의 무게 중심이 반대편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재현은 태오의 팔에 매달려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시작인데 어쩌나.”
“사, 살려 줘!”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왔다.
태오가 어울리지 않게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 설마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진다고 죽겠어? 그냥 좀 다치고 말겠지. 운이 안 좋아봤자 골절?”
태오는 오로지 팔 힘으로 재현을 지탱하고 있었음에도 힘든 기색 없이 평온했다.
단순히 권력뿐 아니라 육체적인 힘도 태오가 월등히 뛰어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격이었다.
재현은 생존 의지와 굴욕감을 동시에 느꼈다.
“아, 의사 선생께서 팔목이 골절되는 건 좀 곤란하려나?”
“사, 살려 줘. 제발.”
“늦었어, 이미. 내가 베풀어 준 자비를 네 발로 걷어찼잖아.”
“…….”
“오늘은 골절이겠지. 그다음은 뭘까? 모르긴 몰라도 골절보다는 심각한 일을 겪게 될 거야. 또 그다음엔 그보다 더 심각한 일을. 그리고 그 끝엔…….”
태오가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살려 주세요.”
너무나 늦은 굴복이었다.
왜 우리는 언제나 돌이킬 수 없는 시점이 되어서야 깨달음을 얻는 걸까.
이제 와 다시 맹수를 잠재우기엔 멀리 와 버렸는데.
“늦었어.”
화난 맹수에게 인간적인 동정, 최소한의 도덕심 따위는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오로지 본능에 충실한 짐승일 뿐이다.
“무릎을 꿇을 수 있겠어? 고개를 조아리며 내게 진심으로 잘못을 빌 수 있겠어?”
“…….”
“못 하잖아. 넌 그 정도의 자존심도 내던질 수 없는 놈이잖아.”
태오의 손가락에 힘이 하나씩 풀렸다.
한 개, 두 개.
“그러니까 늦었어.”
“죄, 죄송합니다! 무릎이라도 꿇을게요.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태오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그의 눈엔 경멸이 가득 차 있었다.
“소유랑은 아무 일도…….”
“아니지?”
“…….”
“소유를 향한 마음 말이야. 역시 사랑은 아닌 거지?”
고작 이 정도의 일로 포기할 만한 것이라면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져다 붙이기 과분하다.
재현의 얼굴 위에 공포로 설명하기는 힘든 새로운 감정이 떠올랐다.
“아, 재미없어.”
흥미가 식었다는 듯 태오가 혀를 쯧 찼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재현의 멱살을 끌어당겼다.
뒤로 넘어가기 직전이던 재현은 가까스로 몸을 난간 안으로 들일 수 있었다.
재현이 몸을 떨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태오는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양복에 손을 닦았다.
재현에게서 흐른 땀이 묻어 있었다.
그사이 재현은 죽을힘을 다해 계단을 향해 달려갔다.
저 미친놈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도망치는 것 말고는 없어 보였다.
“으아악!”
하지만 애석하게도, 재현은 술에 취해 있었고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의 공포에 잠식되어 있었다.
그의 발은 다음 계단이 아닌 허공을 디뎠고, 누군가에게 떠밀린 것처럼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쿵.
큰 충격음이 날 만큼의 사고였다.
“가지가지 하네.”
2층 난간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온 태오는 그런 재현을 내려다보며 한심하다는 듯 응시했다.
우뚝 선 그의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졌고, 점점 더 무시무시하게 변해갔다.
재현은 기형적으로 꺾인 제 손목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