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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불쾌한 존재 (44/95)


44. 불쾌한 존재
2022.08.29.



 
다해는 보호자들을 위해 마련된 휴게소에 소유와 함께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아까부터 쭉 소유는 무표정이었다.

그래서 붙어 버린 입술을 떼어 내는 것에 꽤 오랜 시간을 들여야 했다.


“정소유.”

늘 불러왔던 이름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만큼은 유달리 그 이름이 무거운 무게가 되어 다해를 짓눌렀다.

다해는 처음 봤을 때부터 소유를 싫어했다. 자신과 달리 모든 것을 가졌던 아이, 모두에게 사랑받던 아이였으니까.

더러운 뒷골목 세상은 알지도 못한 채 고귀하게 자란 소유를 시샘했다. 소유에게 화낼 일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녀에게 화를 냈다.

난 부모를 잘못 만났을 뿐이고, 넌 부모를 잘 만났을 뿐인데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건 불공평하잖아.

그래서 살갑게 다가와 손을 뻗은 소유의 자그마한 손을 매정하게 내쳤다. 순수하고 착했던 소유는 무척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었다. 이상하게도 그 처량한 얼굴이 문득 생각났다.


“나는, 네가 정말 미웠어.”

일부러 고함도 질러 보고, 아버지 몰래 소유의 살도 꼬집어 보았지만, 소유는 포기하지 않고 새로 생긴 언니와 친해지기 위해 애썼다.

자신의 취향을 공유하며, 맛있는 것이 생기면 나눠 주었고, 좋아하는 연예인에 대해 조잘대기도 했다.

그러나 질투와 시샘, 경계로 점철된 다해는 그런 소유에게 마음을 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넌 내가 그토록 얻으려고 발악하던 것들을 모두 가지고 있었거든.”

어느 날, 유달리 예민했던 날이 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소유가 살갑게 말을 걸어 오기에 뺨을 내려쳐 버렸다. 처음 맞아본 뺨에 소유는 곧바로 울음을 터뜨렸다.

죄책감은 아주 찰나였을 뿐, 희열이 찾아왔다. 모두가 사랑하는 소유를 때리고 아프게 하는 것에서 오는 기쁨은 다해의 열등감을 잊게 해 줬다.


“자상한 아버지도, 예쁜 집도, 재현이도.”

연옥은 그 장면을 보고 그저 흔한 ‘자매들의 싸움’이라고 치부하며 못 본 척 넘어갔고, 그날 이후 소유는 다해의 화풀이 대상이 되었다.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소유를 흠씬 두드려 패면 기분이 나아지곤 했다.


“그래. 나의 결점이 너로 인한 것이란 바보 같은 생각을 했었어.”

이어지는 괴롭힘에 소유는 점점 빛을 잃어 갔고, 소심하고 말수 없는 소녀가 되었다. 주변 사람들마저 달라진 소유를 보며 걱정할 때, 다해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 틈을 타 아버지의 사랑과 재현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애쓰기도 했다.


“네가 망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아마 강태오 그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소유는 여전히 그런 취급을 받으며 영영 진짜 모습을 되찾을 수 없었을 테다.

갑자기 나타난 강태오란 존재는 소유를 구렁텅이에서 구조했다. 그리고 진짜 구렁텅이에 있어야 할 사람은 다해라며, 다해를 발로 차 그곳에 밀어 넣었다.

그 결과 다해는 현재 하늘만 올려다보이는 깊은 구렁텅이에 빠져 있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위로 올라갈 방법이 없었다.


“나는 네가 되길 바랐어. 그럼 네가 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

소유가 헛웃음을 짓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소유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그녀는 웃으면서 울었다.


“죽을 때까지 극복하지 못할 열등감이라는 거, 나도 잘 알아. 굳이 거짓말은 안 할게.”

“…….”

“하지만 이번 일은 정말 미안해. 잘못했어.”

처음 재현이 벌인 짓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충격에 빠져 잠시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

소유를 좋아하는 재현이 그런 짓까지 벌였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원래 그들의 계획은 딱 태오에게 함께 있는 사실을 들키고 분열의 씨앗을 심는 것이었다. 그러나 재현은 욕망으로 선을 넘었고, 소유는 몹쓸 짓을 당했다.

여차하면 재현은 제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울 생각도 있었을 테다.

소유가 믿어 줄진 모르겠지만 다해는 범죄까지 저지를 생각은 없었다. 설령 소유를 싫어했던 다해라도 말이다. 엄마가 구속되는 장면을 보고 아주 큰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재현의 행동이 미수에 그쳤다고 해도 그런 추악한 일의 공범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한땐 목숨보다 더 사랑했던 재현의 모습이 추해 견딜 수가 없었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모습도 그것과 그리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삼스럽게 과거를 돌아볼 계기가 되었다.

공황 상태가 된 다해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이라도 소유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뿐이었다. 너무나 늦었지만, 재현과는 죄의 무게가 다르다는 걸 어필할 필요가 있었다.


“재현이잖아. 너를 정말 좋아하는 재현이. 재현이가 네게 위험한 인물이 될지는 정말 꿈에도…….”

“그럼 이번 일, 언니랑 공모한 게 맞는 거네?”

눈가가 붉어진 소유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재현이한테 우리 집 비밀번호 알려 준 것도 언니였고?”

다해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격렬한 구역감이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토해 내고 싶었다.


“언니. 다 양보했었잖아. 좋은 방도, 아빠의 옆자리도, 피아노도, 심지어 우리 회사까지도. 난 언니가 달라는 거 다 줬었잖아.”

“…….”

“그런데 태오까지 내게서 뺏고 싶었어? 그렇게까지 해서 언니가 얻는 게 뭔데?”

소유가 울분에 차 다해에게 소리쳤다.


“난 태오뿐이었어. 아무것도 없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건 정말 태오뿐이었다고! 하나뿐인 존재까지 내게서 떼어 놓으려는 건, 정말 너무하잖아. 내가 죽기라도 바랐던 거야?”

“정소유.”

“사과라는 게 참 웃겨.”

소유가 흠뻑 젖은 얼굴을 닦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십, 수백 개의 잘못으로 남에게 상처를 줘 놓고, ‘미안하다’라는 한 마디면 면죄부를 얻게 되잖아.”

“면죄부를 얻으려는 게 아니야.”

다해가 다급하게 소유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래? 그럼 나한테 진심으로 미안하긴 한 거니? 매일 밤 울다 지쳐 잠드는 어린 나를 떠올리면 마음이 찢어질 것 같니? 네 엄마 뒤에서 킥킥 웃던 과거의 네가 혐오스럽니?”

소유는 독설을 쏟아 냈다. 다해의 기억으로는 소유에게 처음으로 듣는 독설이었다. 다해는 감히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세 가지 중 하나라도 해당되지 않는다면 사과하지 마.”

소유는 매정하게 다해의 손을 내쳤다. 처음 만났을 때 다해가 그랬던 것처럼.

내쳐진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다해는 어린 소유가 느꼈던 절망과 박탈감을 뒤늦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잘 생각해 봐. 그 사과가 나를 위한 건지, 언니를 위한 건지.”

“당연히…….”

“언니가 등에 진 죄책감 덜고 싶어서 하는 사과 아니고? 아니면, 누군가의 보복이 두려워서 하는 사과 아니고?”

그 순간, 태오의 완벽한 얼굴이 다해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분명 그의 귀에도 이 일의 배후가 들어갔을 테다.

그 맹수 같은 이가 어떤 일을 계획하고 있을지, 다해로서는 전혀 예상조차 되지 않았다.

무엇이든 다해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참혹하리라는 건 확신했다.

본능적으로 그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그거 2차 가해야.”

다해의 마음속 동요를 알아차린 것인지 소유가 허탈하게 웃었다.


“피해자들에게 반드시 가해자를 용서해야 할 것 같은 부담을 갖게 하지 마.”

방황하던 다해의 손이 옆에 있던 가습기 통을 툭 쳤다. 그것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많은 양의 물이 사방으로 쏟아졌다.

마치 다시는 주워 담지 못할 그들의 관계처럼.


“언니 마음 편해지게 해 주려고 울며 겨자 먹기로 용서하기 싫어. 그러니까 사과하지 마. 차라리 죽을 때까지 내게 나쁜 년으로 남아. 마음 편히 언니 욕이라도 하면서 살 수 있게.”

“…….”

“뭘 그렇게 충격받은 표정이야? 내가 당했던 거에 비하면 언니는 아직 편하고 살고 있는데. 안 그래?”

투명한 물은 부지런히도 나아가 소유의 구두 앞코에 닿았다. 하지만 그뿐, 소유를 적실 수는 없었다.


“이상하지. 가끔은 공연옥 그 여자보다 언니가 더 원망스러울 때가 있어. 내가 언니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나 봐.”

그에 비해 다해의 운동화 앞코는 이미 흥건하게 젖은 후였다.


“난 언니가 쭉 나쁜 년이길 바라.”

“…….”

“사과하지 마. 뉘우치지 마. 반성하지 마. 그냥 그렇게 최악으로 남아.”

옅은 수면 위로 생채기 가득한 몸을 웅크린 어린 소유의 잔상이 보였다.

다해는 그 잔상과 눈을 마주칠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불쾌한 존재로 남아.”

소유의 구두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그게 언니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사죄일지도 몰라.”

그대로 소유는 보호자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그녀의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들으며 다해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옷이 질퍽거리는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끝내 소유에게 용서를 받을 순 없었다.

그건 즉, 재현이 벌이려 했던 끔찍한 사건에서 자유로워질 기회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고, 더는 매달릴 사람도 용서를 구할 사람도 없이 처절하게 내쳐진 고독한 처지가 되었다는 것을 시사했다.

이제 다해가 발을 디디고 서 있을 곳은 없었다.

다해는 필사적으로 쏟아진 물을 모아 보려고 했다. 그러나 야속한 물은 다해의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올 뿐이었다.

다해는 바닥을 치며 울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튀어 오른 물로 그녀는 바다에 빠진 것 같은 모습이 되었다.


“보호자 분, 괜찮으세요?”

그런 저를 발견하고 간호사가 말을 걸어올 때까지 생각해 보았다.

만약 다시 시간이 주어진다면, 우리가 처음 자매가 되었던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나는 달라졌을까.

너의 바람대로 친밀한 자매가 될 수 있었을까.


“아니.”

“네? 뭐라고요?”

아니. 난 아마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을 것이다. 변함없이 너를 미워하고 너의 생채기를 나의 가장 큰 보람으로 느낄 것이다.

나는 아무리 발악을 해도 나니까.

결국엔 네가 될 수 없을 테니까.

* * *

소유는 차를 두고서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비서에게 소유의 행선지에 대해 들은 태오는 조용히 그녀를 따라갔다.

소유는 이따금 눈물을 닦거나 한숨을 쉬거나 울분을 삭이느라 걸음을 멈췄다.

그녀를 따라 태오도 덩달아 걸음이 더뎌졌다.

그녀를 부르지 못하는 이유는 그녀를 오롯이 위로할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태오는 그저 사랑하는 그녀의 아픔을 전해 받으며 몰래 따라 걸을 뿐이었다.

그러다 소유가 견디지 못하고 거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냈다.

잠시 후 태오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태오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 태오야. 미안한데…… 나 좀 데리러 와 줄 수 있을까.

애써 감추려 했겠지만 목소리엔 울음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 차를 잃어버렸어. 어디 뒀는지 모르겠어.

“그래. 지금 데리러 갈게.”

망설임 없는 대답에 소유가 잠시 말을 멈췄다.

태오는 그녀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 늘 고마워. 여기가 어디냐면…….

“어딘 줄 알아.”

그제야 태오의 목소리가 너무 가깝게 들린다는 것을 알았는지 소유가 고개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태오가 손을 뻗어 무너진 소유를 일으켜 세웠다.

태오는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여태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는 소유의 팔을 아래로 내렸다.


“얼마나 덤벙거리길래 차를 잃어버려.”

태오가 장난스럽게 타박했다.


“그러게. 그런데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아마 소유는 태오가 병원에서부터 줄곧 따라 걸었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할 테다.


“네가 있는 곳엔 언제나 내가 있으니까.”

태오는 소유의 눈가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네가 우는 거, 정말 싫은데 자꾸만 다른 사람이 너를 울게 하네.”

“미안해.”

“사과하는 건 두 번째로 싫어.”

“미안…… 아니, 응.”

습관적으로 사과를 하려다 소유가 입을 꾹 다물었다.

태오가 쓰라릴 정도로 통통 부은 소유의 양쪽 눈에 입을 맞췄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울었어.”

“별로 특별한 일은 아니었어. 그냥 언니가 나한테 사과를 하더라.”

태오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위로 까딱 올렸다.


“난 용서할 마음 없는데. 미안하다는 한마디로 퉁치기엔 난 너무 많은 일을 겪었는데…….”

“그럼 용서 안 하면 되잖아.”

덤덤한 말에 소유가 고개를 들었다.


“사과를 하면 전부 용서해 줘야 한다고 누가 그래?”

세상 사람들은 말한다.

진심으로 뉘우치고 사과를 하는 이는 용서받아야 마땅하다고.


“누가 법으로 만들어 놨나?”

하지만 태오는 이번에도 남들과 달랐다.

전혀 마땅한 일이 아니라고 한다.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고 한다.


“싫으면 용서하지 마.”

“태오야. 넌 정말 특별한 사람 같아.”

“그래서, 싫어?”

태오가 빤히 소유를 바라보았다.

소유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목을 세게 끌어안았다.


“아니. 그냥 위로가 돼서.”

태오는 팔을 뻗어 소유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이든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에게 가장 큰 안정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I love you, too. Hazel.”

결론이 어떻든 현재엔 너를 사랑하는 것에 충실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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