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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소모품 주제에 (45/95)


45. 소모품 주제에
2022.09.02.



 
석 교수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과를 보내고 있었다.

외래가 있는 날이라 진료 다음 진료의 연속이었다. 유명세만큼이나 그를 찾는 환자는 수도 없이 많았다.


“다음.”

그러다 다음 차트를 보고 멈칫하고 말았다.


“대한민국 성형외과 권위자라고 하시기에 제 얼굴도 좀 뜯어고칠 수 있을까, 해서 왔습니다.”

환자라고 자청한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와 석 교수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무료하던 석 교수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대학병원 성형외과는 주로 사고로 인한 외모 재건 수술 위주였다.

미용 목적의 수술은 진행하지 않는다.


“견적 좀 내 주시겠습니까?”

단순히 남자의 방문 목적이 대학병원 성형외과 존재의 이유와 상이해서 놀란 것만은 아니었다.

남자의 정체가 무척이나 뜻밖이었다.

그는 강화 그룹의 장남이었다.


“와이프한테 잘 보일 겸 이번 기회에 눈, 코, 입 모양을 바꿔 보려고요.”

이 황당한 상황을 지켜보던 외래 간호사는 환자의 얼굴을 보고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고칠 데가 전혀 없는 완벽 그 자체의 얼굴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현대 성형 기술로는 절대 못 만들 소년 같으면서도 깊은 눈, 반듯하게 높은 코, 조화롭게 위치한 붉은 입술까지.

그는 요즘 남자들의 워너비 얼굴이자, 어떤 성형외과 의사가 봐도 극찬할 만한 미모의 정점에 서 있었다.

그런 남자가 성형 수술을 하기 위해, 그것도 대학병원을 찾아왔다?

분명 이상한 상황이기는 했다.


“배 간호사, 잠깐 나가 있게.”

사건의 진상이 궁금해 죽겠는데, 석 교수는 간호사에게 자리를 피해 달라고 부탁했다.

간호사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진료실을 나섰다.

바깥 간호사들이 태오의 외모로 수군대는 사이, 진료실 안의 두 남자는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수고스럽게 찾아와 주신 건 고맙지만 우리 병원에서는 미용 목적의 성형 수술은 진행하지 않습니다.”

태오가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서 석 교수를 응시했다.


“아쉽네요.”

태오가 전혀 아쉽지 않은 표정으로 혀를 찼다.


“진짜 용건이 뭡니까?”

“당신 아들 이야기를 좀 같이 해 볼까 해서.”

석 교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얼마 전, 재현이 술 먹고 계단에서 굴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석 교수가 소유와 재현의 대화 자리를 만들어 주었던 당일이었다.

그날의 사고로 재현은 당분간 팔에 깁스를 하고 지내야 하며, 세밀한 수술엔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아직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애X끼 같으니 부모랑 이야기해야죠.”

점잖은 석 교수의 얼굴이 분노로 물들었다.


“손목이 크게 다쳤다면서요? 유감입니다.”

외과 계열 의사에게 팔목은 가장 중요한 재산이다.

제 아들은 제대로 날개를 펴 보기도 전에 큰 부상을 입은 격이다.

그런데 그 사건이 사고가 아니라면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꼽히는 태오는 태연하게 그 사건에 대해 언급했다.


“우리 재현이 손목, 당신이 그랬습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그런 건 아니지만 내가 그랬다고 칩시다. 우리 점잖으신 석 교수님께서는 그렇게 믿고 싶어 하시는 것 같으니.”

“강태오 씨. 수술을 하는 의사에게…….”

“그딴 건 모르겠고, 당신 아들이 우리 소유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알고 있습니까?”

모를 리가 없었다.

석 교수는 구급대원들 사이에서 시작된 아들의 추문을 어떻게든 덮으려 애썼고, 그건 즉 모든 상황 파악이 끝났다는 뜻이니까.

태오는 알면서도 일부러 석 교수에게 질문을 던지며 압박했다.


“아들 간수 잘하는 게 좋을 겁니다. 의사고 나발이고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황이니까.”

“지금 협박하는 겁니까?”

태오가 픽 웃었다.


“그래도 아들보다는 눈치가 빠르시네. 연륜인가?”

아들뻘에게 모욕을 당하고 있건만 석 교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태오의 기에 눌린 것도 사실이지만 아들의 부도덕한 행동은 어떤 말로도 옹호할 수 없는 심각한 사안이었다.

그러므로 석 교수와 재현이 일방적인 피해자라고 하긴 어려웠다. 오히려 다른 측면에서는 태오와 소유가 피해자이기도 했다.


“유부녀, 그것도 강화 가(家) 며느리 건드렸다는 소문 들리면 잘난 아들 앞길만 망치는 격이 아니겠습니까. 무슨 대단한 사랑이라고 교수님께서 직접 나셔서 도와주시고, 덮어 주시기까지.”

태오는 분명 평범한 인간은 아니었다.

비범한 기운이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두려우면서도, 역설적으로 강화 그룹의 후계자 자리와 몹시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이좋은 부자끼리 나란히 개망신이라도 당하고 싶으신 겁니까?”

영혼까지 식어 버린 석 교수가 애써 목소리를 짜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나는 다만 아들놈이 친구와 화해하고 싶어하기에 도와준 것뿐입니다.”

“웃기고 있네.”

“……뭐라고요?”

석 교수를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 이는 단언컨대 태오가 유일할 것이다.


“당신은 그냥 아들의 성범죄에 가담했을 뿐입니다.”

질 낮은 위협을 가하면서도 태오는 이상하게 고상함을 잃지 않았다.


“교수님도 알고 계셨잖아요. 추잡한 당신 아들이 그저 친구의 감정으로 소유를 보고 있지 않다는 걸.”

그는 하나도 천박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고결해 보이기까지 했다.

정곡을 찔린 석 교수가 입을 다물었다.


“내가 조금만 더 늦었다면…….”

태오의 말이 조금도 뭉개지지 않고 살아 진료실 내부를 둥둥 떠다녔다.

태오는 여전히 침착했지만, 그의 목에는 굵은 핏줄들이 하나, 둘씩 서기 시작했다.

그 광경이 너무나 인위적이라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당신 아들은 이미 이 세상에 없었을 겁니다.”

“우리 재현이는 그런 애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깨끗한 척 그만 하세요. 역겨우니까.”

충격에 빠진 나머지 눈앞이 핑핑 돌았다.

일생을 추앙받으며 살아온 엘리트인 그가 난생처음으로 겪은 모욕이었다.


“아마 이 이야기를 꺼낸다면, 당신의 그 믿음직스러운 아들은 얼굴을 붉히며 당신 눈을 피할 겁니다.”

태오는 정신을 못 차리는 석 교수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이걸 공론화시키면 석재현은 물론이고 당신 명예도 크게 실추되겠지.”

여태 쌓아 온 모든 탑들이 우르르 무너질 테다.

의료인으로서 성 추문만큼 타격이 큰 게 없으니.


“난 지금 공론화시킬지 말지 고민 중인 상태고. 알고나 계시라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모르고 있다가 뒤통수 맞으면 얼얼하잖아?”

“…….”

“그리고, 옛정을 이용해서 소유 일상 흔들어 놓는 거 그만하십시오. 양심이 있다면 우리 장인어른에게서도 떨어져 나가 주시고.”

카드를 쥔 태오가 여유롭게 석 교수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미용 성형 수술은 안 해 주신다니, 전 이만 다른 병원 알아보러 갑니다.”

폭탄을 던지고서 태오는 뻔뻔하게 말했다.


“오늘 하루도 평안하게 보내시길.”

그가 고고한 발걸음으로 사라지고 난 뒤 석 교수는 떨리는 손으로 안경을 벗었다.

태오의 한 마디에 가문의 명예가 달렸다. 석 교수는 극도의 불안함을 느끼며 예민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교수님, 왜 그러세요? 괜찮으세요?”

“시끄러워. 입 닥쳐!”

외래 간호사가 다시 들어와 말을 걸 때까지.

인자하고 성품이 온순한 석영재 교수의 가면은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

* * *

서령이 불러 잠시 시댁에 들렀던 소유였다.

그곳에서 둘째 도련님인 선오를 만났다. 선오는 아직 소유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았고, 덕분에 두 사람은 껄끄러운 사이였다.

가볍게 묵례하고 돌아서려는데, 선오가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


 


“강태오가 그랬을걸?”

“네?”

“그 의사 선생 말이에요. 아마 강태오가 밀었을걸요?”

그 자리에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확신하는 듯한 말투에 소유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내 형이지만 그러고도 남을 놈이거든.”

“도련님.”

“형수님만 몰라요, 강태오의 실체를. 그놈은 미친 사이코예요.”

“아무리 그래도 말씀이 너무 지나치시네요.”

선오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럴 리가 없어. 우리 태오는 나한테는 착하던데. 다른 사람이 나쁜 거지, 태오는 옳아. 뭐, 이런 말씀이라도 하고 싶은 거예요?”

선오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무어라 반박할 말도 찾지 못했다.


“우리 가여운 형수님. 속고 계신 거예요. 나중에 진실을 알고 얼마나 충격을 받으실까.”

선오가 가볍게 혀를 쯧쯧 찼다. 소유는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주먹을 세게 쥐었다.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다음에 봬요.”

소유는 빠르게 그를 지나치려고 했지만 선오는 소유의 등에 대고 읊조리듯 말했다.


“형수님이 보기에 이 집안이 정상으로 보여요? 며느리가 애를 못 낳는다고, 다른 여자에게 둘째, 셋째를 낳게 하는 이 집안이, 형제끼리 싸움거리를 던져 주고 관전하는 이 집안이, 어떻게든 명맥을 이을 궁리만 하는 이 집안이, 평범해 보여요?”

소유의 걸음이 몇 걸음도 채 못 가고 멈췄다.


“다 미친 사람들이야. 미친 사람과 미친 사람 사이에서 강태오라는 더한 미친놈이 태어났을 뿐이야.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잖아?”

“그러는 도련님은요?”

소유가 식은 얼굴로 선오를 돌아보았다.


“도련님도 이 집의 피를 물려받았잖아요.”

“나는 내가 정상인이라고 한 적은 없는데?”

선오가 고개를 까딱하며 미소를 지었다.


“생모 얼굴도 모른 채 강태오를 대체할 소모품으로 태어난 주제에, 강태오의 자리를 노리는 내가 정상이겠어요?”

자조적인 말이었지만, 선오는 어쩐지 서글픈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집안에서 도망치라고. 형수님은 아직 정상인이니까. 진서령 여사처럼 괴물이 되기 전에.”

선오의 까만 눈동자가 허공을 응시했다. 너무 아득한 허공이라 소유는 차마 닿지 못할 곳이었다.


“한 번을 안 쳐다보더라. 아무리 내가 앞에서 얼쩡거려도, 어린 준오가 칭얼대도. 이 집안의 공기보다도 못한 존재였어, 우리는.”

“…….”

“키우던 반려동물이 지나가도 한 번쯤은 쳐다볼 만도 한데, 어머니란 사람도, 형이란 사람도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못 본 척하더라.”

이 넓은 집에 어린 동생과 덩그러니 떨어진 선오는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동생을 위해서라도, 언젠가 만날 생모를 위해서라도.


“아마 우리를 짓밟아서 다시 못 기어오르게 하려는 생각뿐이었겠지.”

무수히 많은 외면과 무시 속에서 선오는 삐뚤어져 갔다. 나름의 방어기제이기도 했다. 애초에 기대하는 게 없으면 상처받을 일도 없으니까.


“한 번 눈 밖에 나면 형수님도 그런 취급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전에 도망치라고.”

마음을 가다듬고 대답을 하려는데, 딱딱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둘이서 뭐 하니?”

놀라 고개를 돌리자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는지 모를 서령이 서 있었다.

서령은 귀걸이를 만지작대며 소유에게 말했다.


“하도 안 오길래 전화하려던 참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어머니.”

“내 방으로 와. 할 말이 있어.”

“네.”

선오가 한숨 같은 웃음을 내뱉었다. 그런 선오에게로 서령이 시선을 돌렸다.


“넌 여기서 뭐 하니? 일하러 안 가니? 이번 분기 강화 전자 매출이 하락했다고 들었다.”

“네. 네. 가야죠. 소모품 주제에 거역할 수 있겠어요?”

선오가 비아냥대며 사라졌다.

서령은 그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고얀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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