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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형제의 난 (46/95)


46. 형제의 난
2022.09.05.


강화 전자는 강화 그룹 내에서 두 번째로 몸집이 큰 계열사였다. 그랬기에 강화 호텔 행사장에서 열린 주주총회는 꽤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생산 공장을 베트남으로 이전하는 건에 대해서 강화 전자 내부에서는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바입니다.”

강화 전자의 이사이자 실질적 경영자인 선오는 해외 생산 공장 이전에 대한 브리핑을 훌륭하게 끝마쳤다.

주주들은 자료를 넘겨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오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듯했다.


“잠깐만.”

그 순간 누군가가 그 흐름을 깨트리고 손을 들었다. 선오가 굳이 짜증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태오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의견에 대해서 조금 회의적입니다만.”

주주들의 관심이 선오에게서 태오로 옮겨 갔다. 태오는 강화 호텔의 부사장직을 맡고 있었지만, 강화 전자의 대주주이기도 했다.

강준영 회장과 진서령 여사의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적자로서 그의 입김은 대단했다.


“현재 공장에서도 수출, 내수용 부품들이 문제없이 생산되고 있는데, 이사비용과 새로운 기반을 다지는 시간을 낭비하면서까지 옮길 이유가 있습니까?”

“저는 강화 전자의 미래를 보고 하는 말입니다.”

태오와 선오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서로를 존중하는 듯 높임말을 썼다. 하지만 그들의 말투와 시선에서는 존중이란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공연히 형제 사이에 낀 다른 주주들만 난감함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미래? 무슨 미래를 말씀하시는 건지. 베트남의 인건비가 나날이 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나 있는 건지. 강 이사께서 그리는 그 미래엔 부담 비용만 있을 뿐입니다.”

“강 부사장님. 강화 전자를 경영하는 것은 저고, 가장 유용한 자료를 검토하는 것도 접니다.”

“아…… 그러니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숙박업이나 잘해라?”

태오가 자조적으로 비꼬았다. 선오는 욕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꾹 참았다.


“자, 자. 그만들 하거라.”

둘을 말릴 수 있는 건 내내 조용히 있던 강준영 회장뿐이었다.


“강 이사 말도 일리가 있고, 강 부사장 말도 일리가 있네. 일단 급한 문제가 아니니 천천히 더 논의해 보는 방향으로 갑시다.”

긴장감에 숨이 막힐 것 같던 주주들이 강 회장의 중재에 동의했다.


“네. 그러도록 하죠.”

“이런 중대한 사항은 조금 더 신중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죠.”

그렇게 주주총회는 결론을 내지 못하고 끝이 났다. 태오가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행사장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선오가 씩씩대며 태오를 따라나섰다.


“어이, 형님.”

태오가 여유롭게 뒤로 돌았다.


“뭐가 그렇게 불만입니까? 그냥 솔직히 말해. 내가 진행하는 사건엔 다 훼방을 놓고 싶은 거라고.”

“글쎄. 내가 보기엔 네가 깊은 고민 없이 그저 아버지와 내 흔적을 지우려는 것처럼 보이던데?”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자료를 충분히 검토하고…….”

“그게 네 말대로 가장 유용한 자료를 검토한 결과라면, 넌 쓰레기와 자료를 구분하지 못하는 거겠지.”

선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강화 전자는 선오에겐 자존심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태오는 그런 선오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고 있었다.

그런 선오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태오가 말했다.


“아니면 네가 자료 하나 검토하지 못할 정도로 무능력하거나.”

 

 


“이 X끼가.”

선오가 태오의 멱살을 잡았다. 그런데도 태오는 표정의 변화조차 없었다. 오히려 입꼬리가 더 수려하게 올라갔을 뿐이다.

선오는 어릴 적부터 그런 태오가 증오스러우면서도 은은하게 두렵기도 했다.


“오래 참았네, 강선오.”

지나가던 강화 호텔 직원들이 주먹다짐을 하기 직전인 형제들을 힐끔 쳐다보고 도망쳤다. 태오는 선오의 귀에만 들리게끔 속삭였다.


“너는 그 천박한 습성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니까. 가끔은 강준오가 너보다 낫다고 느껴질 정도야.”

선오의 눈동자에 실핏줄이 터졌다. 태오에게 기어오르려는 시도는 몇 번이나 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태오는 제가 배운 대로 선오를 처절하게 짓밟았다.

형제들의 피 터지는 싸움을 보고도 아버지란 작자는 관전할 뿐이다. 마치 누가 이기는지 결과만 기다린다는 듯.


“뭐, 네가 천박한 거야 나로서는 크게 신경 쓰일 일이 아니긴 하지만, 네 그 엿 같은 자존심으로 강화 전자 말아먹는 건 못 보겠거든. 그건 우리 할아버지가 병까지 얻어 가며 살려 낸 회사야.”

“네 할아버지가 아니라 내 할아버지기도 해.”

“하늘에 계신 할아버지도 과연 그렇게 생각하실까?”

태오가 눈썹을 위로 추켜 올렸다. 그들의 할아버지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선오와 준오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사랑하셨던 손자는 오직 태오였다.


“아무래도 네가 멍청해서 이런 일을 벌였다는 게 더 신빙성 있는 것 같은데, 형이 조언 하나 할게. 그렇게 밀어붙이고 싶으면 사람들 모아. 내 지분을 뛰어넘을 정도의 주주들과 힘을 합쳐서 대들어.”

태오가 너무나 쉽게 제 멱살을 잡은 선오의 팔을 떼어 냈다. 마치 지금까지는 그가 봐주기라도 했다는 듯. 선오의 손이 처량하게 아래로 추락했다.


“너 혼자서는 죽어도 안 되니까.”

손목시계를 보던 태오는 혀를 쯧 차며 뒤로 돌았다. 선오는 거친 숨을 내쉬다 그의 등에다 대고 말했다.


“형수님은 알고 계시냐?”

 

* * *

태오와 점심 식사를 함께하기로 했다. 소유가 SNS에서 발견한 원 테이블 식당이 있는데, 그곳이 하필 점심에만 운영을 했기 때문이다. 겨우 예약에 성공하고서 같이 가기로 약속했다.

오늘 호텔에서 주주총회가 있다기에 소유가 태오를 데리러 가던 참이었다.


“형수님은 알고 계시냐?”

태오에게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내려는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유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그곳엔 키가 큰 형제가 대립한 채 서 있었다.

인상적이었던 건 태오의 셔츠였다. 멱살이라도 잡힌 듯 한껏 구겨져 있었다.


“네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들은 도구처럼 쓸 수 있는 무자비한 놈이라는 거?”

소유가 멈칫했다.

또 그 문제다. 또, 누군가가 태오의 비인간적인 면모에 대해 떠들어 댄다.


“정상적인 사람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놈이라는 거?”

왜인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의심하던 사실을 새삼스럽게 다시 확인받으니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세게 뛰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너.

남들이 말하는 너.

그 간극이 너무나 커 소유는 혼란스러웠다. 무엇이 진짜 태오인지 구별해 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아마 다 알고 나면 형수님도 너한테서 도망칠걸? 평범하고 좋은 사람이잖아. 너처럼 잔인한 놈이랑은 차원이 다르다고.”

태오가 선오의 말을 비웃듯 미소를 지었다. 지켜보던 소유는 조용히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소유는 안 그럴 텐데.”

그때, 태오에게서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소유와 태오의 눈이 마주쳤다.

소유는 낯선 모습의 태오를 피하지 않고서 빤히 바라보았다. 태오는 소유에게 시선을 고정하고서 선우에게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어떤 모습이든 소유는 날 변함없이 사랑할 텐데.”

“웃기지 마.”

“형수 걱정하기 전에 네 앞날이나 먼저 걱정하는 게 어때? 내가 어떤 놈인지 잘 안다면 알아서 몸 사려야지.”

태오가 삐뚤어진 넥타이를 고쳐 매고 소유에게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기다렸어? 미안해.”

선오는 형 부부를 묘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소유는 그의 모습이 잔상으로 남아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 남편 옆에 두고 다른 남자 보는 거야?”

태오가 소유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제 옆에 밀착시켰다. 또 못 말리는 소유욕이 발동한 것이다. 농담 같지만, 은근히 진심도 담겨 있는 말에 소유는 남겨진 선오를 돌아보는 것을 멈췄다.


“나 배고프다.”

“태오야.”

“응?”

태오가 조수석의 문을 열며 다정하게 대꾸했다. 오늘은 단둘이서 데이트를 하겠답시고 운전기사도 돌려보냈다.


“왜 그렇게 무섭게 말해?”

“반쪽짜리 도련님이 가여워?”

“그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렇게 말해?”

“거슬리게 하면? 일단 출발부터 하고 말할까? 예약 시간 임박인데?”

태오가 자연스럽게 상황의 주도권을 잡았다. 소유는 어쩔 수 없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태오는 문을 닫아 주고 보닛을 빙 돌아 운전석에 올라탔다.

이윽고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엔진소리도 거의 나지 않는 탓에 차 안엔 침묵만이 흘렀다.

소유는 운전에 집중한 태오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요즘 들어 사랑하는 남편에 대한 고찰이 잦아진다.

그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문스러운 부분이 모조리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또한 사람들이 태오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나쁜 말을 하는 게 싫었다.


“난 내가 아끼는 거, 특히 너와 관련된 일이면 어떤 짓도 서슴지 않을 거야.”

소유의 마음을 읽었는지 태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설령 그게 다수의 가치관에 위배된다고 하더라도.”

“…….”

“내 걸 지키는 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

물론 자신의 것을 지키는 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타당한 것이다. 그러나 태오가 택하는 방법은 분명 부적절할 때가 있었다.

태오는 강화 그룹이란 거대한 자본 그룹을 경영하기 위해 남들보다 강인하게 키워졌고, 언제나 모두의 위에서 군림해야만 했다.

때론 처참하고 잔인한 방법 외엔 해결하는 법을 생각해 내지 못할 테다.

태오를 사랑하는 입장에서 소유는, 그런 태오가 가엾기도 했다. 모두가 그를 두려워했지만, 소유만은 새로운 방법을 알려 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 안 사랑해? 강선오 말대로 도망치고 싶어?”

태오가 핸들을 꺾으며 물었다. 그에 소유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정면만 보고 있는 태오에겐 보이지 않을 광경이란 걸 알지만 본능적으로 나온 반응이었다. 다른 부분에선 우유부단하게 굴어도 태오를 사랑하는 부분에서만큼은 망설임이 없었다.

아직도 그를 보면 수줍은 소녀처럼 얼굴이 붉어진다. 매일 아침 곤히 잠든 태오를 볼 때마다 입맞춤을 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를 수가 없다.

언제나 대가 없이 묵묵하게 제 옆을 지키고, 저를 위험에서 구해 준 태오를 숨길 수 없이 사랑하고 있었다.


“사랑해.”

이젠 태오가 없는 삶은 상상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가 잠시라도 사라지는 상상을 한다면 바보처럼 눈물을 뚝뚝 흘려 대고 말겠지.

소유가 용기를 내어 태오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태오가 엄지로 그녀의 손을 꽉 옭아맸다.


“그럼 우리 재밌게 데이트하면 안 될까? 나 오늘 진짜 바빴어. 내부 회의에, 주주총회에.”

그 말을 들으니 태오의 볼이 핼쑥해 보이는 것도 같고.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이다.


“일단 점심부터 먹고 생각하자.”

그래서 소유는 오늘도 바보 같은 그 말에 모른 척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일단 점심 먼저 먹고.

어차피 태오와 헤어질 것이 아니라면 고민할 시간은 많을 테니.


“미안해. 그러자.”

태오가 만족스러운 듯 씩 웃었다. 어느새 예약한 식당이 보였다.


“많이 배고파?”

“당연하지. 너는?”

“사실 나도.”

태오는 딱히 없는 식욕을 끌어올리며 천천히 속도를 늦췄다.

사실 사랑하는 와이프의 얼굴만 봐도 피로감이 훅 줄어드는 그였다.


“밥 먹고 커피 마실 시간은 돼?”

“응. 다음 외부 미팅까지 시간이 좀 남거든. 도진이 오빠한테 허락도 맡았어.”

“잘했다, 내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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