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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너를 버린다 (49/95)


49. 너를 버린다
2022.09.16.



 
소유가 평소보다 힘겹게 눈을 떴다. 온몸이 흠씬 두들겨 맞은 듯 욱신댔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몸살이 오기 직전 같았다.

유아 물산의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면서 처음으로 든 생각인데…… 진짜 회사 가기 싫다. 쉬고 싶다. 출근도 하기 전인데 퇴근하고 싶다.

소유가 직장인들의 애환을 느끼고 있을 즈음, 정작 그녀를 그 지경으로 만든 태오는 멀쩡한 얼굴로 휴대폰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참 뒤척이던 소유가 그런 태오에게 말을 걸었다.


“태오야. 뭐 해? 회사에 일 생겼어?”

“아니.”

태오가 습관적으로 소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시선은 휴대폰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고작 저런 기계 따위에 태오의 관심을 빼앗긴 것 같아 소유는 괜히 심통이 났다.


“뭐 하냐니까?”

다소 새침하게 묻자 그제야 태오가 고개를 돌렸다.


“병원 예약 좀 하려고.”

“병원? 너 어디 아파?”

5초 전까지 토라졌던 것을 잊은 소유가 벌떡 일어나 사랑하는 남편의 얼굴과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열은 없는데. 어디 다친 데도 없어 보이는데.

호들갑을 떠는 소유를 한쪽 팔로 안아 제 품에 쏙 넣은 태오가 픽 웃었다.


“검사 좀 하려고. 너 토요일에 시간 괜찮지?”

“……나? 나도? 무슨 검산데?”

“우리가 임신을 해도 되는지 알아보는 검사.”

“…….”

다시 한번 남편의 추진력에 감탄하는 소유였다. 어제 결정한 일인데 벌써 병원까지 알아보다니.

그러거나 말거나 태오는 신이 나 소유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내가 엄청 유명한 여자 산부인과 의사 알아 뒀어. 아무래도 여자가 편하겠지? 그런데 마침 그 건물에 비뇨기과도 같이 있네? 아빠가 건강해야 애가 똑똑하대.”

“태오야. 네가 이렇게 말 빨리 하는 거 처음 봐.”

언제나 느긋하고 여유롭던 태오는 사라지고 설렘에 들뜬 태오만이 있었다.


“꼭두새벽부터 병원 찾아보고 있었어? 그럴 시간에 좀 더 자지. 오늘도 바쁘면서.”

소유가 와이프로서 꼭 해야 하는 잔소리를 했다.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아기보다는 태오가 더 중요했으니까.


“도저히 잠이 안 오더라. 떨려서.”

그 말엔 소유도 못 말린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으이그. 그러다 벌을 주듯 남편을 세게 끌어안고 등을 때렸다.

태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상이었지만.

태오는 소유에게로 고개를 숙여 굿모닝 키스를 퍼부었다.

그래.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키스가 점점 더 진해지더니 태오의 호흡이 급해졌다. 확실히 아침에 하는 키스치고 지나치게 야릇했다.

소유는 그에게 말려들기 전에 재빨리 그를 밀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나른해진 눈빛의 태오가 물었다.


“오늘 반차 쓸까?”

“아니! 나 오늘 중요한 미팅 있어.”

하마터면 그가 있는 침대로 뛰어들 뻔했다. 작정하고 유혹하는 태오는 정말 이겨내기 힘들다. 소유는 거래처 사장님 얼굴을 떠올리며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 너 오늘 나 출퇴근 시켜 줘야 해.”

머리를 질끈 묶으며 소유가 엄하게 말했다.


“나 지금 근육통 때문에 운전을 제대로 못 하겠어.”

“아아, 어젯밤에 너무 격하긴 했지?”

소유는 거울 너머의 태오를 흘겨보았다. 태오는 항복하듯 양손을 들었다.


“알았어. 기꺼이 태워드려야죠, 부인.”

소유는 태오의 확답을 받아 내고서 침실에 딸린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

쏴아. 욕실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물소리를 들으며 태오는 생각했다.

같이 씻자고 하면 또 앙칼지게 흘겨볼까.

그런데 어쩌지. 흘겨보는 모습조차 내 눈엔 지나치게 예뻐서.

* * *



“석재현, 이 X끼야. 정신 안 차려!”

수술실의 언어는 일상의 언어보다 다소 과격하고 흉포한 경향이 있었다. 환자의 생사가 걸렸거니와 아주 미세한 기술과 집중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특히 수술의 모든 과정을 집도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고스란히 혼자 져야 하는 교수는 더욱 예민했다.


“레지던트 3년 차란 X끼가 석션(Suction) 하나 못 해?”

한국대학교 성형외과 배홍기 교수가 수술실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고함을 쳤다. 평소 석영재 교수를 존중하는 마음에, 재현까지 무척 아끼던 모습과는 상이했다.

이번 수술은 사례가 드물고 손에 꼽힐 만큼 어려운 수술이었다. 그래서 수술방에 들어오기 전, 배 교수는 분명 재현에게 말했다.

아직 손목이 불편하거든 다른 전공의와 교체하는 게 어떻겠냐고.

재현은 분명 괜찮다고 했다. 다 나았고, 멀쩡하다고. 배 교수는 그를 믿고 수술방에 들였다.

하지만 정작 수술방에서의 재현은 간단한 어시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그의 거짓말로 수술을 완전히 망칠 뻔한 배 교수가 화를 낼 만도 했다.

재현은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며 굴욕감에 사로잡혔다. 언제나 믿음직한 제자, 존경스러운 선배, 성형외과 에이스로 통하던 재현의 위세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수술방에 있던 간호사와 실습 학생들이 슬그머니 시선을 주고받았다.


“내가 손목 불편하면 수술방 들어오지 말라고 했지.”

“죄송합니다. 다시 해 보겠습니다.”

“나가.”

배 교수가 단호하게 말했다. 재현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배 교수를 쳐다보았지만, 이미 배 교수의 시선은 멀리 떨어져 있던 인턴에게로 향했다.


“인턴. 네가 와서 잡아.”

“교수님!”

재현이 애절하게 매달렸지만 배 교수는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재현을 바라볼 뿐이었다.


“당분간 내 수술실엔 들어오지 마.”

이럴 순 없다. 배 교수의 수술은 언제나 재현의 몫이었다. 레지던트 1년 차 때부터 위 기수를 제치고 맡아 온 수술이었다.

물론 아버지의 힘이 조금도 작용하지 않았다고 볼 순 없지만 어쨌든 여태껏 잘해 왔지 않은가. 무수히 많은 수술들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배 교수는 언제나 재현을 칭찬했고, 긴급 수술이 잡힐 때마다 재현을 1순위로 찾았다.

그런데 이제 인턴에게까지 밀리게 된 신세가 되었다.

수술방에서 쫓겨난 재현은 수술용 마스크를 벗고 짜증스럽게 쓰레기통에 내던졌다.

아직도 왼쪽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X끼 때문이야.”

재현이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첫사랑에 이어 가장 큰 자부심이던 의사 생활마저 망쳐 놓았다, 강태오란 작자가.

재현이 살기 가득한 얼굴로 기다란 복도를 뚜벅뚜벅 걸었다. 그에게 인사를 건네려던 동료들이 멈칫하며 그를 피했다.

그는 이전의 단정하고 모범적이던 모습을 완전히 잃어가고 있었다.

* * *

그날 밤, 재현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셨다. 웬만하면 평일엔 과음하는 일이 없었는데 이제는 몸을 사릴 필요가 없어졌다.

배 교수가 내일 오전 수술 어시스트로 재현의 후배인 레지던트 2년 차를 지목했기 때문이다. 재현이 보기에 자신보다 한참 떨어지는 놈이었다.

점점 과 내에서 입지가 좁아지는 느낌이었다.

재현은 자신의 현관문 앞에서 털썩 쓰러졌다. 그의 머릿속엔 태오를 향한 증오뿐이었다. 그놈을 어떻게 엿 먹일까. 그놈에게 어떻게 복수할까.


“일어나. 들어가서 자.”

그때 재현의 귓가에 아주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현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서 다해를 올려다보았다.


“누나네.”

갑작스러운 다정한 부름에 다해가 움찔했다.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여자친구.”

“……뭐 하는 거야?”

이미 그들의 연애 같지 않은 연애는 끝이 났고, 애초에 재현은 다해를 사랑하고 좋아했던 적이 없다.


“그동안 내가 너무 심했지? 미안해, 누나. 용서해 주라.”

재현이 입꼬리를 끌어당겨 씩 웃었다. 분명 그토록 바라던 다정한 사과였는데, 소유가 아닌 오롯이 저만을 위한 웃음이었는데 이상하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두렵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도 누나는 언제나 내 편이지?”

재현의 손이 다해의 손을 턱 잡았다.


“석재현.”

“그럼 나랑 끝까지 가자. 강태오랑 정소유 망가뜨려 놔야지. 우린 이렇게 불행한데, 걔네 둘만 행복하다는 게 억울하잖아.”

자상하던 재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었다. 마치 하나의 가면을 벗고 새로운 가면을 쓴 것처럼 이질감이 느껴지는 광경에 다해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다시 해 보자. 우리가 힘을 합치면 충분히 해낼 수 있어.”

재현의 시선이 불쑥 아래로 내려와 천천히 뒤로 도망가고 있는 다해의 발을 바라보았다.


“어디 가, 누나.”

“너 진짜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구나.”

“어디 가냐고, 정다해!”

재현이 별안간 고함을 크게 내질렀다.

최소한의 책임감으로 재현의 상태를 살피러 왔던 다해는 완전히 질려 버렸다. 이제는 정말 재현을 떠나야 할 순간임을 직감했다.

다해가 좋아했던 재현은 이미 사라져 버렸으니까.


“나 좋다고 X랄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내빼려고? 웃긴 계집애네.”

두려움이 한계치를 넘어 턱 근육마저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다해는 재현의 손을 억지로 내쳤다.


“하여튼 지 엄마랑 똑같아. 필요할 땐 남자 등에 빨대 꽂고 쪽 빨아먹더니, 필요 없어지니까 버려?”

절대 재현의 입에서 나오리라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던 저급한 말들이 다해의 귓가를 때렸다.


“야, 정다해. 내가 그러니까 널 좋아해 주지 않은 거야. 넌 정말 천박하고, 배은망덕하거든.”

눈가에 동그란 눈물방울이 차오르더니 아래로 툭 추락했다. 그건 슬픔의 눈물은 아니었다. 공포의 눈물이었으며, 지난 세월에 대한 허탈함의 눈물이었다.


‘안녕. 누나 이름은 다해지? 난 석재현이라고 해.’

재현은 다해가 처음 만난 상류층 남자아이였다. 만화 영화에 나오는 멋진 왕자 그 자체였다. 재현과 함께라면 다해가 그토록 동경하던 인생을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쳐. 조심해.’

여러모로 신세계였다. 매너가 좋고, 다정다감한 재현은.

하류층 남자애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다해에게 재현은 거의 숭배의 대상이었고, 다해의 인생은 재현을 따라 돌아갔다. 유일한 꿈조차 재현의 신부였으니.

그랬던 재현의 본모습을 알게 된 지금, 다해의 지난 세월을 보상받을 방법은 없다. 그녀의 어리석은 시간은 쓸모없는 쓰레기가 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잘 들어. 난 강태오에게서 소유를 뺏어 오고, 망가뜨릴 거야. 그놈의 유일한 약점이 소유 같거든.”

아, 이기지 못할 상대임을 알면서도 자만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둔한가.

재현을 향한 정이 한 톨도 남지 않고 모조리 증발했다. 이제는 잘생긴 얼굴마저 못나 보였다. 현재 재현은 그저 제 미래를 모르고 날뛰는 주정뱅이일 뿐이었다.


“그때 가서 다시 들러붙지나 말라고. 역겨우니까.”

다해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곧바로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시간도 없었다. 비상계단 문을 열고서 쉬지 않고 뛰어 내려갔다.

너무 숨이 찬 나머지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지만 달음박질을 멈추진 않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그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재현의 오피스텔을 벗어난 후에도 다해는 계속, 계속 앞을 보고 달렸다.

이런 결말을 너도, 나도, 정소유도, 우릴 아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나는 너를 버린다.


 
추악하게 변해 버린 너를, 내가 먼저 버리고 달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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