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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리마인드 파티 (52/95)


52. 리마인드 파티
2022.09.26.



 
태오가 비서를 통해 통보한 장소는 다행히도 으슥한 곳이 아닌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번잡한 카페였다.

내심 안심을 했다. 사람이 많은 이곳에서 저를 어찌하진 못할 테니까.

다해는 종업원이 안내하는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아직 태오는 도착하기 전이었다.

긴장되는 마음과 더불어 떨리는 손끝을 애써 테이블 아래로 감추고 있는데, 누군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처형.”

솜털이 바짝 서고, 소름이 돋았다. 맹수의 낮은 목소리였다.

다해는 얼어붙은 채 고개도 돌리지 못했다.

대단한 착각이었다. 사람이 많든 적든 결국엔 똑같았다. 태오에게서 안전한 장소란 없다.

오히려 등장만으로도 분위기를 압도하는 그의 모습에 경외심만 높아질 뿐이다.


“제가 좀 늦었네요.”

다해의 어리석음을 비웃듯 태오가 여유롭게 다해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잠시 후 그의 눈동자처럼 까만 커피가 나오고, 태오는 그것을 음미하듯 마셨다.


“정답게 안부나 물을 사이는 아니니 본론부터 말할게요. 요즘 석재현 씨가 제정신이 아닙니다.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어요.”

다해는 재현과의 마지막 만남을 떠올렸다. 그녀가 보기에도 재현은 분명 제정신은 아니었다. 넋이 나가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모습이었다.

스스로 브레이크를 거는 방법조차 잊은 사람처럼.

맹수에게 덤빈 대가다. 다해도 이전에 경험해 본 적 있는 고통이었다.

더 무서운 건 맹수의 진짜 반격은 이제부터 시작일 것이란 사실이다. 조만간 숨통을 조여 올 테다.

재현을 교묘하게 부추겨 사건을 시작한 것도, 재현이 고통받길 바란 것도 스스로였지만 막상 이 강한 자를 보고 있자니 복잡미묘한 감정이 몰려왔다.


“야.”

그때, 태오가 경멸스러움을 굳이 감추지 않고서 다해를 불렀다. 이제 그는 형식적으로나마 갖추고 있던 예의조차도 저 멀리 내던졌다.

커피의 표면이 다해의 처지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 관심이 온전히 석재현에게 넘어갔다고 생각하지 마.”

다해의 눈동자는 오롯이 하나의 색으로 가득 찼다. 공포. 그래, 그건 분명 공포였다.


“감히 내 허락도 없이 도망을 치려고 해?”

어째서. 왜.

그제야 저와 재현의 처지가 피차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다해는 절망했다.

다해의 어리석은 생각을 양 갈래로 찢듯 태오가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했다.


“내가 분명 말했지. 너를 살려 두는 건 내가 너그러워서가 아니라, 네가 죗값을 덜 받아서라고.”

“…….”

아직 저를 향한 맹수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태오가 혀를 가볍게 튕기고선 테이블을 일정한 박자로 두드렸다.

다해는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인파 속에 숨어 존재를 완전히 감춰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거미줄에 걸린 작은 곤충처럼 태오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태오는 완력을 전혀 쓰지 않고, 다해를 완벽하게 포박하고 있었다.

다해가 서서히 이빨을 드러내는 맹수를 응시했다. 분명 말이 나오지 않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보자마자 감탄을 금할 수 없는 외모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태오에겐 인간의 온기라든가, 그 비슷한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그 완벽한 얼굴이 오히려 기괴하게 느껴졌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과연 제가 보고 있는 것이 같은 사람이 맞는 것인지도 가물가물해졌다.


“무서워?”

태오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을 괴롭히려거든 너도 그만큼의 고통을 당할 각오를 해야 하는 거야. 네가 지금 아무리 괴로워 봤자 지금까지 소유의 시간만큼 괴롭겠어?”

“…….”

“너도 알잖아. 그건 턱없는 비교라는 걸. 나는 장사치라 정확한 거래를 원해.”

이미 벌을 받고 있는 김에 고백하건대, 자신은 ‘악’이었다.

그리고 모든 걸 견뎌 내야 했던 소유는 분명 ‘선’이었다.

두 여자의 경계는 명확했다.

하지만 눈앞의 이 남자는?

이 남자는 ‘악’인가, ‘선’인가.

소유의 정의를 되찾아 주었으니 ‘선’에 속하기도 했지만, 죄를 심판하는 과정에서 그가 보여 준 잔혹함은 ‘악’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 남자는 자신의 고통은 조금도 걸지 않고 모두의 위에서 군림하는가.

이건, 이건 불공평하잖아.

이 남자의 이치대로라면 이 남자도 악한 행동에 관해서는 벌을 받아야 하잖아.


“원래 세상은 불공평하지.”

다해의 마음을 읽었는지 태오가 건조하게 말했다.


“우리, 진짜 공평한 세상은 유토피아에 가서나 찾을까?”

존재하지도 않을 유토피아를 운운하는 태오에게 반발이 생겨났지만 다해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낭만적인 이야기는 이쯤에서 집어치우고, 이 상황에서 네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알려 줄게.”

“…….”

“석재현, 네 손으로 마무리해.”

놀란 다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나오리라고는 예상조차 못 했던 탓이다. 평범한 사람과는 사고 자체가 다른 사람이다.

이 강태오란 작자는.


“뭘 그렇게 기겁해?”

이이제이(以夷制夷).

태오가 태어나 가장 처음으로 배운 사자성어였다.

그리고 가장 교묘하고, 깔끔한 전략이기도 했다. 소유를 안는 손을 굳이 더럽힐 필욘 없으니. 오랑캐는 오랑캐의 손으로.


“너를 끝까지 사랑해 주지 않았고, 너를 비참하게 만든 그놈, 네 손으로 나락으로 자빠뜨리라고.”

태오가 다해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차피 너도 그러고 싶잖아?”

정곡을 찔렸다.


“그러니까 내가 좋은 핑계가 되어 준다고.”

다해의 얼굴이 경련이 온 듯 부자연스럽게 변했다. 그걸 본 태오의 차가운 눈동자가 은은하게 빛났다.


“그리고 결과가 만족스러우면 널 살려 줄게.”

“…….”

“어때? 너에게 영 나쁜 제안은 아닌 것 같은데.”

“……나더러 어쩌란 소리야? 석재현을 죽이기라도 하라는 말이야?”

“내심 석재현을 죽이고 싶었나 봐?”

“뭐?”

“난 죽이라고까지 한 적은 없는데.”

속마음을 간파당한 다해가 시린 손끝을 감췄다. 당장이라도 손가락의 한 마디가 떨어져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잘 생각해 봐. 분명 죽음보다 더 비참한 벌도 많을 거야. 지금 네가 치르고 있는 죗값처럼.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어 놓고 쉽게 죽어버리면 아쉽잖아?”

태오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말했다. 숨이 턱 막혀 왔다.


“……넌, 넌 미쳤어.”

“그러는 넌 안 미쳤고?”

다해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통화를 할 때와 마찬가지로 제 용건만 끝내고서, 태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다해를 스쳐 지나가다 문득 다시 걸음을 멈췄다.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도망칠 생각은 접어.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너를 먼저 찾아내면, 너 정말 비참해져.”

“…….”

“머리가 썩 좋은 것 같진 않아서 말해 주는 거야.”

다해의 어깨를 툭툭 친 태오는 넓은 보폭으로 사라졌다.

그가 완전히 카페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다해는 참아 왔던 숨을 한 번에 내쉬었다. 아득해졌던 평범한 사람들의 소음이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를 따라 도는 듯한 기이한 현상을 경험했다. 방금도 그랬다. 그의 기에 억눌려 볼륨을 줄였던 소음들이 기다렸다는 듯 다시 활개를 쳤다.

누군가가 스위치를 끄고, 켠 것 같기도 했다.


“안 돼.”

다해는 손끝을 잘근잘근 씹으며 테이블에 고개를 푹 묻었다.


“안 돼. 안 돼.”

그녀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옆 테이블에선 그런 그녀를 이상하게 쳐다보았지만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할 덫에 빠져 버린 사람에게 타인의 수군거림이 대수겠는가.

강태오에게서, 아니, 제가 쌓은 업보에서 절대 도망치지 못한다.

다해에겐 그것만이 끔찍하리만큼 아프게 와 닿았다.

* * *

아이스크림을 통째로 들고 퍼먹는 소유에게로 태오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편히 쉬는 중이었던 소유는 태오에게 물었다.


“이번엔 또 무슨 속셈이야? 나 이거 먹는 중이니까 괴롭히지 마.”

“줄 게 있어서.”

“뭔데?”

그러자 태오가 등 뒤에 감추고 있던 무언가를 내밀었다.

덤덤하게 그것을 받아들었던 소유는 이윽고 눈이 동그래졌다.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던 아이스크림까지 내팽개칠 정도였다.

그건 분명 파티 초대장이었다.

향기 나는 빳빳한 종이에, 휘황찬란하게 반짝이는 스티커에, 정갈한 태오의 글씨까지 합쳐져 그 시절 감성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이게 뭐야?”

“초대장.”

물론 이번엔 사물함을 통하는 것이 아닌 당사자에게 직접 전해 준다는 것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아니, 그건 아는데…….”

“우리 그때 마무리 못 한 파티하자.”

전부터 소유를 위해 꼭 하고 싶은 이벤트였다. 소유가 과거에서 벗어난 것을 축하하고, 제가 첫사랑을 이룬 것을 축하하고, 또 임신을 결심한 것을 축하하는 파티 말이다.


“그때만큼 성대하게 준비할게, Hazel.”

눈을 반짝인 소유가 폴짝 뛰어올라 태오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직 파티는 시작도 되지 않았지만 이런 생각을 해 줬다는 것만으로도 감동해서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어? 예뻐 죽겠네. 넌 항상 날 너무 벅차게 해, 태오야.”

게다가 노아에게서 받는 두 번째 초대장이라니.

둘만 아는 특별한 추억이 되돌아오니 마치 꿈만 같았다.


“이번엔 꼭 가면 벗겨야지.”

“난 네 드레스를 벗길 거야.”

짓궂은 농담에 소유가 태오를 툭 치며 까르르 웃었다. 눈엔 눈물을 머금고 있는 주제에.


“아, 울다가 웃으면 몸 변한다던데.”

뒤늦게 걱정이 되었는지 소유가 눈물을 닦아 냈다. 그러자 태오가 다정하게 말했다.


“괜찮아. 네 몸에 뿔이 솟아도, 나지 말아야 할 곳에 털이 나도, 나는 널 사랑해.”

전혀 감동적이지 않은 멘트였는데, 웃기게도 감동적이었다. 하여튼 못 말려, 강태오.


“뿔이 나면 장신구를 끼워 주고, 털이 나면 매일 땋아 줄게.”

“징그러운 소리 좀 하지 마!”

태오와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고 있자니 어느새 눈물은 까마득한 곳으로 도망쳐 버렸다.


“소름 돋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심 기분은 좋았다. 제가 어떤 모습을 하든 사랑해 준다는 말이었으니.


“글씨는 어릴 때가 낫네.”

노아의 첫 초대장과 현재의 초대장을 비교하며 킥킥대자 태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뭐?”

그래도 난 하나도 안 무섭지롱. 소유는 봄에 피어난 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소유는 초대장 두 개를 포개어 꼭 안다가 귀엽게 입을 맞췄다.

태오와 추억할 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 이건 그 어떤 보물보다도 소유에게 소중한 것이었다.


“리마인드 웨딩도 아니고, 리마인드 파티라니. 우린 정말 특별해.”

그날 우린 예전처럼 허무하게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서로의 가면을 벗기고, 서로의 멋진 얼굴에 반하겠지. 그러곤 기꺼이 사랑 고백을 하겠지.

화려한 불꽃이 과분하지 않은 멋진 밤이 될 테다.

태오는 거의 액체가 된 아이스크림을 안전하게 옆으로 치우고 정중하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고전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격식을 차리며 소유에게 손을 내밀었다.


 


“Hazel. Do you wanna come to my party?”

소유는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얹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Of course.”

어차피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노아가 주최하는 파티인데, 헤이즐이 거절할 리가.

벌써부터 마음이 두둥실 떠올랐다. 어린아이 같지만, 소유는 눈을 감았다 뜨면 바로 파티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태오는 그대로 소유의 손을 잡아당겨 꼭 안았다. 소유는 터질듯한 얼굴을 남편의 단단한 가슴에 폭 묻었다.


“나 행복해, 태오야.”

“나도.”

“불안할 만큼 행복해.”

“행복한데 왜 불안해?”

“가끔 그럴 때가 있어. 너무 행복해서, 진짜 너무 너무 행복해서, 역설적으로 불행할 때.”

행여나 이 행복이 깨져 버리면 나도 같이 무너지겠지.

너무 행복하다 보면 이따금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특히나 행복에 익숙하지 않은 소유 같은 사람에겐 더더욱 자주 벌어지는 흔한 일이다.


“뭐야, 그게.”

태오는 가볍게 웃어넘겼지만, 소유는 따라 웃을 수 없었다.


“그냥 행복하기만 해도 돼.”

“……응.”

나도 이제는 많은 양의 행복에 적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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