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절정의 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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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절정의 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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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절정의 절정
2022.09.30.
한동안 뜸하던 연옥에게 새로운 면회 신청이 들어왔다.
신은 참 얄궂다.
“다해야…….”
모든 기대를 다 버리고, 포기했을 즈음에야 바라던 사람을 보내 주었으니까.
연옥은 자나 깨나 걱정하던 딸의 방문에 투명한 유리문 앞으로 달려갔다. 저를 찾아오지 않은 것에 대한 원망은 이미 잊은 후였다.
타인에게 놀라울 정도로 이기적인 연옥이 유일하게 자신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가 바로 딸이었다.
“괜찮니? 밥은 먹고 다니는 거야? 얼굴 좀 보자.”
다해는 눈물이 고인 얼굴을 들었다.
연옥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딸의 얼굴은 마지막으로 봤던 때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피죽도 먹지 못한 사람처럼 야위어 있었고, 눈 아래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퀭했다.
게다가 헝클어진 머리엔 윤기가 하나도 없이 버석했다.
“안색이 왜 그러니? 네 아버지가 아직도 너를 용서 안 했어?”
“엄마. 나한테 아버지가 어디 있어.”
다해가 새로운 눈물을 떨어뜨리며 흐느꼈다.
“애초에 진짜 사랑한 적도 없으면서.”
“다해야.”
“우린 이제 끝났어.”
“소유 그 계집애는? 널 보고도 모른 척하니?”
이 와중에도 연옥은 마음 약한 소유를 이용하려 들었다.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연옥에게 소유는 그저 그런 존재였다. 세뇌시키고, 필요할 때까지 이용하면 그만인 존재. 애초에 딸로 받아들일 생각도 한 적 없던 존재.
그랬기에 연옥은 언제나 소유를 함부로 대했고, 밝고 따뜻하던 소유는 서서히 변해 갔다.
“내가 그 계집애 가만히 안 둘 거야. 누구 덕에 재벌가에 시집갔는데.”
“엄마. 아마 걔네 엄마도 우리 보면서 이렇게 화냈겠지?”
다해도 분명 그 과정을 똑똑히 목격했다. 그러나 엄마를 말릴 생각은 하지 못하고 오히려 동참했다. 어떤 날은 연옥보다 더 혹독하게 군 적도 있었다.
“뭐?”
“하늘에서 말이야.”
다해는 하루하루를 버티는 게 어려웠다.
반드시 죄를 지은 만큼 벌을 받게 되리란 진리를 알았더라면 조금만 못되게 굴걸, 그 아이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 만큼만 잘못할걸.
“마음 약한 소리 하지 마.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야. 당장 소유 찾아가서 협박이라도 해. 그래서…….”
“엄마. 엄마 인생의 가장 큰 실수가 뭔 줄 알아?”
“…….”
“싫다는 정소유를 억지로 그 남자와 결혼시킨 거야.”
역설적이게도 소유와 태오의 필연 속에서 연옥도 하나의 장치였을 뿐이다. 태오에게 이용당했을 뿐이다.
“우리는, 졌어.”
“나한테 좋은 방법이 있어.”
“엄마. 제발 그만.”
다해가 소리를 질렀다. 감옥 속에서 판단력이 흐려진 엄마는 딸보다도 어리석게 변했다. 판의 흐름도 읽지 못했다. 다해는 그런 엄마를 미묘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나를 왜 이렇게 키웠어? 정소유한테 왜 그렇게 굴었어?”
다해는 어쩐지 위태로워 보였다. 연옥은 딸과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투명 유리 벽을 당장이라도 깨부수고 싶었다.
“우린 아마 벌 받겠지?”
이미 받고 있는지도.
“정다해.”
연옥은 무기력해진 딸의 이름을 차갑게 불렀다. 소유에게나 들려줄 법한 목소리였다. 새삼 그 온도가 얼마나 낮은지 실감한 다해가 입을 다물었다.
“한가롭게 너 달래 줄 시간 없어. 다시 한번 말할게. 소유를 찾아가. 협박이 안 먹히거든 불쌍한 척이라도 해서 매달려. 일단 살아. 살아야 그다음도 있는 거야.”
엄마가 방법이랍시고 내놓은 묘수는 딸을 더욱 벼랑 속으로 내몰았다.
한때는 자신은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야망이 가득한 엄마의 딸로 태어나 감히 엄두도 못 내던 상류층 생활을 즐길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새아버지와 동생은 너무도 착한 나머지 제게 모든 것을 양보했었으니까.
그런데 그 생각은 틀렸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저는 운이 지지리도 안 좋았던 것이다. 주변에 악한 사람들만 남은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물론 그만큼 저도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겠지만.
“그 계집애를 잘 구슬려서 엄마를 먼저 여기서 꺼내 주고…….”
마지막 희망이라도 붙잡고 싶어서 이곳에 찾아왔던 다해는 더 큰 절망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해야. 재현이 그놈은? 그만큼 오래 사귀었으면 널 책임지겠지.”
연옥이 다급하게 다른 대안을 내어놓았다. 하지만 어찌나 어리석은 방법이었던지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올 지경이었다.
“재현이는 한 번도 나 사랑한 적 없어. 그건 엄마도 알고 있잖아.”
“다해야. 엄마 금방 나가니까 잠깐만 기다려.”
“금방? 금방이 언젠데? 내년? 5년 후? 아니면, 10년 후? 그때까지 혼자 버티라고?”
“……”
“미안해. 난 못 해.”
다해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엄마, 잘살아. 그리고 출소하더라도 절대 정소유 다시는 찾아가지 마. 엄마를 위해서 마지막으로 하는 충고야.”
그 말은 마치 엄마에게 작별을 고하는 것만 같았다. 연옥은 초조함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는 절대 못 이겨.”
“다해야.”
“그 괴물 같은 남자를.”
연옥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러나 연옥도, 다해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슬픔에서 비롯된 눈물이 아니라는 것을.
“참회해. 어차피 지옥에 굴러떨어지는 건 똑같지만 시늉이라도 하라는 말이야.”
다른 사람이 저를 비난하는 건 참을 수 있었지만 애지중지하던 딸의 비난에 연옥은 크게 휘청였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누굴 위해 그렇게까지 했는데.
어떻게 감히, 네가.
“그래서 넌 나보다 깨끗하다는 소리니?”
연옥이 단숨에 돌변하여 캐물었다.
“나랑은 다르다, 이거야?”
문을 향해 걸어가던 다해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하지만 뒤로 돌아 다시 엄마를 마주 볼 자신은 없었다.
“웃기지 마. 너도 나랑 똑같잖아. 너도 내가 하는 짓 다 알고 있었잖아. 그러면서도 단 한 번도 나를 말린 적 없어. 왜? 너도 네 것이 아닌 것을 탐냈으니까.”
“면회 시간 끝났다.”
교도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연옥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연옥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딸의 등에다 대고 독설을 퍼부었다.
“내가 가져다준 돈을 마음껏 누리는 게 좋았으니까. 정소유한테서 모두 뺏는 게 너도 즐거웠으니까.”
독설은 그대로 비수가 되어 다해의 가슴에 꽂혔다.
“너도 결국 나랑 똑같은 부류일 뿐이야! 이제 와서 순결한 척하지 마.”
“공연옥, 나와!”
교도관이 억지로 연옥을 끌어내고 나자 면회실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엄마랑 다르다고 한 적 없어.”
연옥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다해는 등을 돌렸다.
“인정하기 싫어도 난 엄마를 많이 닮았거든.”
그곳엔 연옥이 앉아 있던 의자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눈앞이 뿌예졌다.
“그래도 참 다행이지.”
정말이지 너무나 지쳤다. 제가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도, 재현의 추락을 보는 것도, 태오의 포악함에 두려워하는 것도.
“난 딸이 없어서.”
이젠 전부 끝을 내고 싶었다. 그리고 평온하게 쉬고 싶었다.
강태오의 말이 맞다.
‘그러니까 내가 좋은 핑계가 되어 준다고.’
그는 다해에게 좋은 핑계가 되어 주고 있었다.
* * *
“이걸 언제 입나, 했는데 오늘 입네.”
결혼식 이후 고이 모셔 둔 웨딩드레스를 입은 소유가 해사하게 웃었다.
그녀가 착용한 세상에서 가장 화려할 법한 목걸이와 귀걸이도, 그녀의 아름다움에 빛을 잃고 말았다.
“나 어때?”
“예뻐.”
오늘은 고대하고 고대하던 파티가 열리는 날이다. 드디어 10년 전의 파티를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 봐. 사 두면 다 쓸모가 있다니까.”
멋지게 차려입은 태오가 흐뭇한 표정으로 턱을 들었다.
“우리 아빠가 보시면 좋아하시겠다.”
원래는 두 사람만의 파티를 열 예정이었지만, 새로운 시작을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는 소수의 사람도 부르기로 했다.
어떤 의미에선 이 파티가 진정한 결혼식에 가깝기도 했다.
소유가 태오의 목을 꽉 끌어안으며, 콩닥콩닥 떨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켰다. 그사이 태오는 창문에 서서 손님 맞을 준비를 마친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면.
그때 우리가 가면을 벗고 만났더라면.
수없이 상상했던 장면들이 현실이 될 순간이다.
“손님들 도착하셨습니다.”
오늘 손님 중 한 명인 권 비서가 태오를 부르러 왔다.
“가자.”
그러자 태오가 한쪽 팔을 구부렸다. 소유는 그에게 팔짱을 끼고 계단을 내려갔다.
벌써부터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와중에 말하긴 좀 그런데. 난 사실 우리 결혼식 때도 이랬어.”
“뭐가?”
“지금처럼 떨리고, 설렜어.”
태오가 고백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분한 얼굴로 고백했다.
사실 나도 그랬노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어 잠시 미뤄야만 했다.
이따가 말해 줘야지. 다짐하며 커다란 문을 열자, 오늘을 위해 고용된 웨이터에게 받은 샴페인 잔을 하나씩 든 손님들이 보였다.
사돈이지만 아직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서령과 희훈, 두 아들의 손을 꼭 잡은 도진과 그의 와이프, 소유 또래의 회사 동료들, 오랜만에 말쑥하게 차려입은 고 이사, 마지막으로 초롱초롱한 눈으로 형 부부를 쳐다보고 있는 준오까지.
모두가 부부의 추억 놀이에 동참해 줬다.
태오가 블랙 가면을 끼고서 소유에게만 들리게끔 읊조렸다.
“강준오는 네가 불렀어?”
그러자 토끼 가면을 쓴 소유가 중얼거렸다.
“웃어. 웃어.”
이런 순간에마저 티격태격하는 것이 참 그들다웠다.
“오늘 파티에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태오가 어른스러운 목소리로 첫마디를 꺼냈다.
희훈은 사진으로만 봤던 딸의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을 보고 울먹거렸다.
소유가 수줍게 아빠에게 손 인사를 건넸다.
“우리의 첫 만남이 파티였던 만큼 꼭 다시 한번 파티를 열고 싶었어요. 사랑하는 사람들을 초대하고서.”
서령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손수건을 꺼내 사돈에게 내밀었다.
희훈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뭐, 대단한 파티는 아닙니다. 그저 먹고, 웃고, 떠들자는 거죠. 결혼식 때 그러질 못했으니까. 참석하지 못하셨던 분도 계시고.”
크림을 마구 묻히고 입을 오물거리는 훈이의 볼을 닦아 주던 도진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것보다 오늘 중요한 공지가 있다고 하던데요.”
태오에게서 짓궂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가면 아래의 얼굴이 궁금해지는 웃음이었다.
“네. 맞습니다. 저희도 이제 임신하려고 합니다. 금슬이 워낙 좋은 부부니까 딱히 노력할 것도 없지만요.”
도진이 훈이의 귀를 잽싸게 막자 영문을 모르는 훈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많이들 응원해 주세요.”
아들의 통보에 서령은 머릿속으로 임산부에게 좋은 음식들을 떠올렸다.
희훈은 기쁘면서도 섭섭한 표정으로 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도진은 흐뭇하게 소유 부부를 바라보았고, 준오는 자신처럼 불행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태오도 저토록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을 보며 희망을 품었다.
고 이사는 소유의 어릴 적 천진난만한 얼굴을 떠올렸고, 손 비서는 그저, 제 상사가 앞으로 귀찮은 사고만 안 치길 바랐다.
그렇게 제각기 다른 생각들이 교차되어 하나의 결과로 모였다.
“제 정자는 아주 건강하다고 하니 너무 걱정들은 마시고.”
별소리를 다 한다며 소유가 태오의 팔을 툭 쳤다.
그와 동시에 하늘 위에서 폭죽이 펑 터졌다.
주택가라 초기 계획보다 규모가 작아지긴 했지만, 두 사람의 거룩한 결정을 응원하기엔 충분했다.
하늘을 수놓은 불꽃과 비슷한 빛이 정원과 작은 수영장을 물들였다.
소유도 황홀하다는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태오가 소유의 토끼 가면을 벗겨 냈다.
소유의 눈동자는 본래의 색을 잃을 정도로 갖가지 색이 담겨 있었다.
소유가 떨리는 손으로 가면으로 손을 뻗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얼굴인데도 새삼스럽게 떨려왔다.
열아홉의 헤이즐처럼.
가면을 벗겨 내자 잘생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Hey, Hazel. My name is Noah.”
너무 기뻐서도 눈물이 날 수 있구나.
“I will be your husband.”
소유의 눈에 오롯이 태오만이 눈에 들어왔다.
아빠와 시어머니가 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소유는 과감하게 태오의 입에 자신의 입을 꾹 가져다 댔다.
태오가 소유의 허리를 세게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깊이 파고들었다.
“거, 어른들도 있는데 너무하네.”
도진이 야유와 환호를 동시에 보냈다.
고 이사는 훈이의 눈을 손으로 가렸다.
귀에 이어 시야까지 차단당한 훈이는 심술이 나 작은 주먹을 마구 휘둘렀다.
“이해 좀 해 주세요. 태오 저놈이 좀 주책이라.”
“아니요. 우리 소유가 먼저 했는데요. 그래도 참 보기 좋네요. 아, 그리고 제가 서운하게 해드린 게 있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희훈의 사과에 서령이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지난 과거는 잊도록 해요. 그리고 나라도 불안하겠어요. 저런 토끼 같은 딸 옆에 시꺼먼 애가 있으면.”
“아니에요. 강 서방이 얼마나 잘생겼는데요.”
“역시 안목이 좋으시네요. 아, 조만간 식사 한번 하시지요.”
서먹한 사돈 사이도 점점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모두가 화목한 파티였다.
낮게 들리는 재즈 음악과 맛있는 음식, 화려한 불꽃까지.
정말이지 완벽했다.
태오가 조심스럽게 소유에게서 물러나 그녀의 붉게 번진 입가를 닦아 주었다.
그런데 그때, 단단히 묶여 있던 소유의 머리 끈이 툭 풀리며, 탐스러운 머리가 앞으로 쏟아졌다.
문득 소유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내려다보았다.
왜 하필 이런 순간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이 그녀를 싸고돌았다.
“왜?”
소유의 바뀐 표정을 보고 태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니야.”
하지만 쓸데없는 것일지도 모르는 걱정으로 파티를 망치긴 싫어 소유가 고개를 저었다.
그와 동시에 가장 성대한 마지막 불꽃이 터졌다.
그야말로 파티의 절정의 순간이었다.
파티를 이어 나가려는데 소유의 걱정이 그저 기우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사장님!”
손 비서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태오를 불렀다.
그는 휴대폰을 손에 들고 있었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일순간 그곳에 정적이 흘렀다.
재즈 음악도 뚝 끊겼다.
조금 전까지 벅찬 파티의 현장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끔찍한 정적이었다.
“큰일, 났습니다.”
절정의 절정의 순간, 마침내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