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최악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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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최악의 밤
2022.10.03.
태오와 소유의 집에서 성대한 파티가 열리고 있을 무렵, 재현과 다해는 한적한 도로를 달리는 중이었다.
아직 팔이 불편한 재현은 조수석에 탔고, 운전대를 잡은 것은 다해였다.
“도대체 소유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데?”
가면을 완전히 벗어던진 재현이 히스테리를 부렸다.
늦은 저녁, 다짜고짜 재현을 찾아와 소유에게 큰일이 생겼다며 그를 끌고 나온 다해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칠 땐 언제고.
“사람 말 안 들리냐? 그리고 여기 소유 집 방향 아니잖아!”
그럼에도 다해는 무표정으로 전방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재현의 인상이 험악하게 변해갔다.
“정다해.”
“오늘 소유네 집에서 파티가 열린다더라.”
“뭐?”
“사람 처지라는 게 이렇게 다르지. 누구는 죽고 싶은 마음뿐인데, 누구는 즐겁게 파티를 하고.”
“뭔 개소리야.”
그제야 재현이 다해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왜인지 그녀는 평소와 다른 느낌이었다.
모든 게 비어 버린 사람처럼 공허했다. 오싹하리만큼.
“어제 엄마를 보러 다녀왔어. 감옥에 가면 다들 자기 죄를 되돌아보고 반성한다던데, 우리 엄마는 전혀 그런 기색도 없었어. 애초에 갱생의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었겠지. 너와 나처럼.”
공허한 두 눈동자에 못지않게 공허한 눈물방울이 위태롭게 걸렸다.
“너희 모녀 사정 같은 거 하나도 안 궁금해. 난 소유에게…….”
“그만둘 생각은 전혀 없는 거지?”
다해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건 어쩌면 재현에게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곧 다가올 어마어마한 사건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
“역시 넌 끝까지 갈 생각인 거지?”
“당연하지. 난 너처럼 도망은 안 칠 거니까.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처럼 추한 것도 없으니까.”
하지만 재현은 망설임 없이 그 기회를 저 멀리 차 버렸다. 똑똑하던 그는 질투와 열등감에 어리석어졌다.
“생각할수록 어이없네. 왜 돌아왔냐?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살 길은 나한테 들러붙는 것밖에 없었나 봐?”
희망 따위 애초에 기대한 적도 없었지만, 다해의 마음은 더욱 삭막하게 변해 갔다.
동시에 주춤거리던 결심이 견고해졌다.
“너도 참…….”
재현이 다해를 신랄하게 비웃었다.
비참해.
“이렇게 비참하게 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부쩍 들어.”
다해는 재현의 질문에 전혀 맞지 않는 엉뚱한 대답을 내어놓았다. 하지만 재현의 흩어졌던 관심을 돌려놓기엔 충분한 답이었던 모양이다.
“어느 순간부터 깊은 수면 아래에 있는 것 같아.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는 가라앉기만 해. 절대 위로 올라갈 수 없어. 더 절망적인 건 앞으로도 나아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이야. 내일의 난, 내년의 난, 더욱 어두운 곳에 있겠지.”
차는 어느새 도심을 벗어났다. 주위엔 허허벌판이 펼쳐졌고, 불빛마저 드물어졌다. 스쳐 지나가는 차조차 없었다.
재현이 떨리는 눈동자로 칠흑 같은 창문 밖을 응시했다.
“소유 얘기는 거짓말이었구나.”
“난 왜 이 모양일까. 유일한 엄마도, 순정을 바친 첫사랑도, 이렇게 다 최악인 걸까.”
“정다해.”
“물론 내가 그만큼 최악이어서 그랬겠지만.”
“누나.”
“불안하니? ‘누나’란 소리를 다 하고.”
다해가 재현의 비웃음을 돌려주었다. 가엾게도 재현은 되돌릴 수 없는 순간이 되어서야 제 운명을 직감했다.
“곰곰이 생각해 봤어. 가장 외롭게 죽지 않는 방법은 뭘까. 외로운 건 정말 싫거든.”
“차 세워, 누나.”
“누구나 그런 꿈을 꾸잖아. 살면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과 동시에 죽고 싶다는 그런 꿈.”
“차 세우라고!”
재현이 고함을 지르고 발악을 했다. 그러나 다해는 자신의 말만 계속할 뿐이었다.
“강태오가 그러더라.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너를 내 손으로 마무리하는 것이라고. 고귀하신 자기 손엔 더러운 걸 묻히지 않겠다는 소리겠지.”
이렇게 된 김에 고백하건대, 강태오 그 남자 핑계를 댔지만 사실 이건 오롯이 내 의지인지도 몰라.
어쩌면 내게 도망칠 기회가 생겼다고 해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했을지도 몰라.
너를 향한 끝이 없는 증오와 원망을 떨쳐 낼 방법은 이것뿐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대단한 남자는 교묘하게 나의 심리를 이용했겠지.
“그런데 네가 사라진 세상을 내가 살아서 뭐 하겠니, 안 그래?”
다해는 마치 드라마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처럼 애틋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와 달리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 괴리감이 서늘한 오늘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재현아. 끝내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았고, 나를 비참하게 만든 우리 자기야.”
다해가 서서히 액셀러레이터를 세게 밟았다. 급격히 올라간 속도에 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재현의 심장도 불안정하게 뛰었다.
아무리 한적한 도로라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누나, 차 세워!”
이젠 늦었다. 자동차는 더 이상 운전자의 의지대로 멈출 수 없을 만큼 폭주했으니까.
결말을 맞이한 그들의 관계처럼.
“이젠 너를 죽이고 싶어졌어, 자기야.”
“정다해!”
다해의 손가락이 하나씩 핸들에서 멀어졌다. 그 모든 광경이 재현에겐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보였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리고 마침내 반대편 손마저.
끔찍하리만큼 자세한 과정을 보여 주며 다해가 그대로 핸들에서 손을 놓았다.
“역겹지만, 이러면 적어도 네 마지막 여자 친구는 내가 되겠지.”
제어를 할 방법을 잃은 차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재현이 다급히 팔을 뻗어 핸들을 돌리려고 했지만, 그조차도 곧 다해에게 저지당했다.
다해는 손바닥으로 재현의 눈을 가렸다. 재현의 시야가 차단되었다.
끼이익. 차는 요란한 마찰음을 내며 이리저리로 흔들렸다. 차 안에 탑승하고 있던 그들의 몸도 이리저리 세게 부딪혔다.
그렇게 달리는 폭탄과도 같았던 차는 가드레일에 세게 부딪혔다.
“우리 지옥에서 다시 만나.”
큰 굉음이 주변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충돌로도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고, 차는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되는 순간에도 차의 바퀴는 한참 동안 움직였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피로 추정되는 뜨거운 액체가 얼굴 위로 쏟아졌다. 재현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느끼며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온몸이 부서지는 고통이 그의 육체를 덮었다.
그간의 모든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옆에 있던 다해는 먼저 의식을 잃은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죽은 건 아니겠지. 재현이 남의 것 같은 자신의 팔을 뻗어 식어가는 다해의 목을 만졌다. 정말이지 묘사도 할 수 없는 참혹한 경험이었다.
이윽고 재현의 눈도 천천히 감겼다.
* * *
드레스를 갈아입을 여유도 없이 소유는 한국대학교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 그녀의 옆엔 태오와 아버지가 있었다. 혼자였다면 진작 혼절하고도 남았을 테다.
그때 응급실 간호사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혹시 정다해 씨 보호자 분 오셨나요? 지금 당장 응급 수술 들어가야 하는데, 보호자 동의서가 필요합니다!”
심각한 상태의 환자들로 인해 응급실은 거의 전시상황이었다.
바닥엔 새빨간 피가 흐른 자국이 있었고, 전공의들은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위로 올라가 재현의 옷을 가위로 찢었다.
같이 딸려온 유리 조각들은 아래로 툭툭 떨어졌다.
형사들은 어딘가와 통화를 하며 수첩에 무언가를 끄적였고, 알 수 없는 기기들이 삑삑대는 소리가 현기증을 유발했다.
소유가 휘청거리다 태오의 팔로 겨우 지탱했다.
“정다해 씨 보호자분!”
간호사가 다시 한번 보호자를 찾았다.
희훈이 손을 들며 앞으로 나섰다.
“네. 제가 보호자입니다.”
다해를 완전히 용서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목숨은 살려야 했다.
현재로선 희훈이 다해의 유일한 보호자였다.
“관계가 어떻게 되시죠?”
“아버지입니다.”
“네. 그럼 서명 좀 부탁드립니다.”
둘 다 중증이긴 했지만, 다행히도 사망한 이는 없었다.
다만, 운전대를 잡은 다해는 재현보다 상태가 심각했다. 당장 응급 수술을 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하다고 했다.
“블랙박스를 확인해야 확실해지겠지만, 의도적인 사고로 추측됩니다.”
담당 형사의 말에 소유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타이어가 쓸린 자국, 다른 차량과 충돌이 없었던 점으로 보아…….”
“그러니까, 스스로 죽으려는 시도를, 했다는 말인가요?”
제가 말을 내뱉으면서도 너무 충격적이라 소름이 돋았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네. 정황상으로는 그렇습니다.”
담당 형사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지금 무슨 소리요!”
무어라 설명을 덧붙이려는데, 때마침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석영재 교수가 호통을 쳤다. 내부가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였다.
“우리 애가 왜 자살을 합니까. 앞날이 창창한 아이인데.”
“혹시 석재현 씨 아버님이십니까?”
“네. 얘 아비요. 우리 애는 절대 그런 무모한 짓을 할 애가 아닙니다. 분명 그 여자가 저지른 짓일 거요. 헤어진 여자 친구인데, 아주 집착이 심하고 지속적으로 재현이를 괴롭혀 왔어요.”
“아버님. 일단 진정하시고, 아드님은 생명에 큰 지장이 없으니까…….”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언제나 점잖던 석 교수의 새로운 모습은 이 응급실 광경만큼이나 몹시 생소했다.
소유의 젖은 눈동자가 그를 멍하니 응시했다.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애달피 보던 석 교수가 희훈에게 따졌다. 원망할 상대를 찾았다는 듯.
“도대체 딸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요? 아무리 친딸이 아니더라도 제대로 훈육은 했어야지.”
“석 교수.”
과거의 돈독하던 사이는 잊은 것처럼 굴었다.
“당신 딸이 내 아들 인생 망쳤어. 망쳤다고!”
당장 멱살이라도 잡을 듯 굴었다. 그러자 태오가 장인어른을 보호하기 위해 앞을 막아섰다. 이 혼란한 상황에서 홀로 침착한 태오였다.
“진정하시죠. 장인어른도 공연옥 씨와 그 딸에게 당한 피해자일 뿐입니다. 아시잖아요?”
“넌 비켜. 아…… 이제 보니 네가 부추겼구나?”
아들 걱정에 눈에 뒤집힌 석 교수는 이제 태오를 향한 두려움 따위는 던져 버린 지 오래였다.
모두를 손에 넣고 주무르던 남자, 태오가 그 배후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다해처럼 멍청하고 비겁한 계집애가 홀로 이런 대범한 일을 벌였을 리 없다.
태오의 본성을 알고 있는 석 교수는 확신했다.
“그러고 보면 재현이가 다칠 때마다 네가 있었어. 이 음흉한 놈. 네가 뱀처럼 교활한 혀를 놀려 정다해를 부추긴 거지?”
“아저씨!”
참다못한 소유가 석 교수를 날카롭게 불렀다.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가 있어요.”
그러자 석 교수가 소유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소유야. 너도 정신 차려라. 저놈은 너처럼 평범한 애가 감당할 수 있는 놈이 아니야. 머리 구조 자체가 다르다고. 저놈은 목표를 위해서라면 사람도 도구처럼 쓸 놈이야.”
맹렬한 비난에도 태오는 무표정하게 서 있을 뿐이다.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만하시고, 일단 나가시죠. 여기 응급실입니다.”
결국 희훈이 겨우 석 교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소유가 깊은 한숨을 쉬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어디선가 묻은 핏자국이 하얀 드레스를 물들였다. 아마 세탁을 해도 지워지지 않는 자국이 남을 것이다.
정말 좋은 날이 될 줄 알았는데.
얼마나 고대하던 날이었는데.
파티는 망했고, 하객들은 충격에 빠진 채 발걸음을 돌렸다.
살면서 다시는 볼 일 없으리라 생각했던 의붓언니는 생과 사를 넘나드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것도 스스로 그런 선택을 했다.
최악이다.
진짜, 최악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