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깃털 같은 죄
(55/95)
55. 깃털 같은 죄
(55/95)
55. 깃털 같은 죄
2022.10.07.
다해의 수술은 새벽이 늦도록 이어졌다. 언제 끝날지 모를 길고 위험한 수술이었다.
소유는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끌어안고 수술방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희훈은 한 시간 전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아직 심하게 무리를 하면 안 되는 상태였기에 소유가 간곡하게 부탁했다.
물론 가기 전 소유에게도 함께 돌아가자고 권유했지만, 소유는 고개를 저었다.
왠지 오늘 밤, 그녀만은 이곳을 지켜야 할 것 같았다. 다해가 죽든, 살든.
어쩔 수 없이 태오도 불편한 옷차림으로 수술방 근처 벽에 기대어 있었다.
방금 막 파티에서 뛰어나온 듯한 화려한 두 사람, 그리고 무채색의 수술방.
그 두 개의 색은 어우러지지 못하고 이질적인 느낌을 만들어 냈다.
소유는 두통이 찾아온 머리를 감쌌다. 고작 몇 시간 전의 불꽃이 아주 먼 과거처럼 아득하게 느껴졌고, 감흥은 사라졌다.
아직도 실감 나지 않은 현실에 괴로워하다 문득 맞은편에 서 있는 태오를 응시했다.
‘이 음흉한 놈. 네가 뱀처럼 교활한 혀를 놀려 정다해를 부추긴 거지?’
석 교수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태오가 다해를 부추겼고, 그 결과 오늘의 이 참혹한 사고가 일어난 것이라고.
무분별한 비난을 쏟아 내는 석 교수에게 화를 내긴 했지만, 사실 소유는 태오가 그 일에 전혀 관련되어 있지 않노라고 확신할 순 없었다.
재현이 여러 방법으로, 몹시 끈질기게 태오의 인내심을 긁어 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으려는 껄끄러운 말을 억지로 끄집어내야만 했다.
“아저씨 말, 진짜야?”
복도에 아무도 없었던 탓일까.
아니면 오랜 적막을 깨고 힘겹게 내뱉은 말이었던 탓일까.
그 짧은 질문이 메아리처럼 여러 겹으로 겹쳐 들렸다.
태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유와 눈을 마주쳤다. 오늘도 그의 눈동자는 심연을 떠올릴 만큼 깊고 어두웠다. 한 폭의 그림처럼 또렷하기도 했다.
“네가 부추겼어?”
“…….”
그런 눈을 보며 이런 질문을 하는 소유 스스로도 무척 아팠다. 그녀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추궁하고 있다.
“네가, 언니한테 재현이 해하라고 했어?”
“어.”
아픈 질문에 비해 너무나 쉬운 대답이 돌아왔다. 망설임도 없었다.
마음 한구석이 무너져 내리는 굉음이 내부에서 울려 퍼졌다.
“뭐?”
“어.”
다시 물어도 대답은 똑같았다.
한기가 느껴졌다.
숨을 내쉬면 하얀 입김이 나올 만큼.
“내가 그랬다고.”
“…….”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줄은 몰랐지만.”
태오는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했다.
재현은 더 이상 수술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다해는 생과 사의 기로에 서 있는 이 처절한 상황 속에서 분명 적절한 반응은 아니었다.
“……왜?”
소유의 동그란 눈에서 차가운 눈물이 툭 떨어지는 것을 태오의 건조한 눈이 빤히 응시했다.
“당연하잖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괴롭게 하니까. 나는 죽을 때까지 너와 장인어른을 지킬 거니까.”
태오의 말엔 소유와 희훈을 향한 애정이 가득했다. 다만 그 방법이 이번에도 정상적인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런데 매일 널 안는 내 손 더럽히기는 싫어서. 그래서 정다해한테 말했어. 네 손으로 석재현 나락으로 자빠뜨리라고. 그럼 널 살려 주겠다고.”
고작 몇 걸음 거리건만 그가 있는 곳과 제가 있는 곳이 전혀 다른 공간 같았다.
우리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맞을까.
“죄를 지었으면 벌은 받아야 하잖아? 정다해도, 석재현도 진작 치렀어야 할 죗값을 이제야 치르고 있는 건지도 몰라.”
“그 두 사람이 잘못한 건 맞지만 그게 죽을죄는 아니잖아.”
소유는 얼어붙은 입술을 필사적으로 뗐다.
“그리고 너 나랑 약속했잖아. 뭐든 나랑 대화하고 상의하기로 했잖아.”
점점 언성이 높아졌다. 목에 힘을 주지 않고서는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할 것 같았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넌 왜 이런 끔찍한 일을 혼자서…….”
“죽음은 정다해가 선택한 거야.”
태오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태오야.”
“석재현을 차에 태운 것도, 가드레일에 차를 박은 것도, 모두 정다해의 선택이야.”
태오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재현을 나락으로 자빠뜨리라고 다해를 부추긴 건 맞지만, 가장 극단적인 ‘죽음’이라는 선택을 한 건 결국 다해였다.
모든 것을 잃고 정신 상태가 온전하지 못한 다해가 스스로 재현과의 죽음을 택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사고에 태오의 죄는 깃털처럼 가벼운지도 모른다. 태오의 개입이 없었더라도 다해는 기어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을 테다.
그러나 그럼에도 소유가 무너진 마음을 다시 세울 수 없는 이유는 ‘죽음’의 문턱까지 간 이들을 보고도 크게 동요가 없는 태오의 태도 때문이었다.
당연한 업보라고 여기는 태오의 뉘앙스 때문이었다.
소유는 폐허가 된 삭막한 마음을 들여다보며 절망에 빠졌다.
“소유야. 그런데 너, 왜 나를 그렇게 봐?”
“…….”
소유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태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너까지 날 그렇게 보면 안 되지.”
사고 소식을 들은 이후, 태오의 표정이 처음으로 변한 순간이었다.
아름답지만 조금의 생동감도 느껴지지 않던 조각상 같은 모습에서, 주인에게 당장이라도 버림을 받을까 두려운 새끼 짐승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는 마치 모든 사고의 회로가 소유를 향해서만 맞춰진 존재 같았다.
다른 사람의 죽음의 문턱에도 반응이 없던 그가, 소유의 작은 변화에도 크게 요동쳤다. 초조해하며 서러워했다.
태오의 처연한 시선에 소유는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너의 세상도, 너의 가치관도, 너도 도덕관념도, 오롯이 그 기준이 나구나.
그의 헤아릴 수 없는 커다란 사랑이 벅차면서도, 한편으로는 염려가 되기도 했다.
널 조금만 덜 사랑했더라면 이토록 혼란스럽진 않았을까.
타인의 일이었다면 명확한 결론을 낼 수 있었을까.
“이리 와. 안아 줘.”
태오가 애원하듯 팔을 뻗었다. 새끼 짐승은 주인의 온기를 좇아 애처롭게 낑낑거렸다.
그러나 이전처럼 선뜻 안아 줄 수 없던 소유가 잠시 망설이는 사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수술방의 문이 열렸다.
“어떻게 됐나요? 수술은 잘 끝났나요?”
소유가 곧바로 의사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태오의 팔이 무기력하게 아래로 축 처졌다.
“정다해 씨 수술은 잘됐습니다만…… 신경 쪽 손상이 커서 장애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가령 말을 못 한다든가, 신체적 장애가 온다든가. 그건 경과를 지켜봐야 알 것 같습니다.”
의사는 고단한 듯 눈가를 어루만지며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어쨌든 살았다는, 말씀이시죠?”
“네. 목숨은 살렸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소유는 손을 모으고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연신 의사에게 허리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의사가 만류할 정도로 애절한 몸짓이었다.
“그만 하세요. 보호자 분도 기다리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지금은 봉합 중이니 병실로 옮기면 다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진심이었다.
다해가 죽지 않아 정말 고마웠다.
하지만 그 고마움이 단순히 다해가 삶을 이어 나갈 수 있음에서 비롯된 것뿐만은 아니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태오가 살인이라는 무거운 일과 관련되지 않았음에 감사하는 것이었다.
오늘 사건이 태오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지 않게 되었음에 감사하는 것이었다.
의사가 다시 들어간 후, 소유가 태오에게로 돌아섰다. 그녀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남편을 응시했다.
이런 나는, 과연 정상이라고 할 수 있나.
너를 비난할 자격이 있나.
설령 네가 더 큰 죄를 지었다고 해도, 나는 너를 버릴 수 있나.
* * *
다해가 병실로 옮겨지고 난 후 소유는 보호자 의자에 앉아 물끄러미 다해를 바라보았다.
기기에 의지한 채 가까스로 호흡을 이어 나가는 다해는 도저히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잠시 후 소유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는 끝까지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구나.”
다해는 과거의 희훈처럼 무력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어릴 땐 다해가 정말로 무서웠는데. 이렇게 약한 모습으로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이러면 내가 언니한테 평생 미안해할까 봐?”
“…….”
“아니면 죽은 사람까지 모질게 미워할 수는 없으니 언니를 용서할까 봐?”
그것도 모자라 태오를 비난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차분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소유의 몸은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원망과 분노 그 중간 즈음의 감정에서 소유는 힘겹게 발버둥 쳤다.
“언니. 아니, 정다해, 너 진짜 이기적이다. 너무 이기적이야.”
악연의 시작점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달려갈 테다. 그리고 아빠의 재혼을 반대하고 연옥과 다해와는 엮이는 일조차 없게 할 테다.
소유는 치가 떨릴 정도로 다해가 미웠다.
“징그러울 정도로 너밖에 몰라.”
할 말은 더 많았지만, 꾹 참은 소유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태오는 멀찍이 떨어져서 소유를 지켜보았다. 물론 독백과도 가까운 소유의 말도 모두 들었다.
소유가 이렇게나 힘들어하는데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어 입 안이 썼다. 지금 상황에선 제가 무엇을 하든 소유를 더 괴롭게 할 뿐이니까.
“…….”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쉬다가 문득 링거 거치대를 밀고서 걸어오는 재현과 눈이 마주쳤다.
애틋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그 변화가 어찌나 극적이었던지 마치 메소드 연기를 하는 배우 같았다.
재현은 움찔하며 걸음을 멈췄다.
태오가 조용히 턱짓을 했다. 소유에게 들키지 않고 저를 따라오란 소리다.
재현은 거스를 수 없는 명령을 들은 것처럼 그의 뒤를 따라갔다. 무척 위험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지칠 대로 지친 재현은 더 이상 태오에게 대항할 힘이 없었다.
태오는 소유에게 보이지 않을 복도 끝까지 가서야 걸음을 멈췄다.
“꼴이 우습네.”
그러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재현을 비웃듯 말했다.
그에겐 일말의 동정심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너한텐 다행이지. 죽지는 않았잖아. 안 그래?”
재현이 태오의 시선을 피해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태오는 혀를 쯧 찼다.
“성에 안 차. 이왕이면 네가 정다해 처지가 되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래야 진정한 ‘나락’이라고 할 수 있지.
겁을 주려는 것이 아닌 진심이 가득 담긴 말이었다.
“자, 그럼 우리 이번에야말로 진짜로 계산을 끝내 볼까?”
재현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두 번 다시 무모하게 그를 자극하거나, 도발하는 짓은 하지 않을 테다.
그 대가가 어떤 건지 처절하게 느끼고 있으니까.
태오는 자신의 힘을 직접 드러내는 것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을 조종하는 방법으로 재현의 목을 조여 오고 있었다.
“내,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하라는 건 뭐든 할게. 그러니까 제발…….”
“뭐든? 정말 뭐든 해?”
태오의 완벽한 입꼬리 한쪽이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