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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악마의 속삭임 (56/95)


56. 악마의 속삭임
2022.10.10.



 
재현이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진작 이런 태도를 취했더라면 오늘과 같은 사달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예정된 탄탄한 미래를 걷고 있었을 텐데.

후회를 해 본다고 한들 이미 늦었다.

이미 맹수는 발톱을 드러냈으니.


“그래? 그럼 무릎이라도 꿇을래?”

태오가 대수롭지 않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 하지만…….”

재현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주춤댔다.

그의 한쪽 다리는 깁스를 한 탓에 굽히기 힘들었다. 설령 굽힌다고 한들 엄청난 고통도 감수해야 한다.

망설이는 재현을 보다가 태오가 코웃음을 쳤다.


“못 하겠어? 그럼 ‘뭐든’이라는 단어를 쓰지 말아야지.”

“아, 아니! 할게. 할게. 그러니까 제발 살려 줘.”

재현은 곧 닥칠 어마어마한 고통보다 무릎을 꿇는다는 행위 자체가 치욕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모두에게 떠받들어진 채 살아온 재현에겐 무척 힘겨운 일이었다.

만약 아는 사람이 이 장면을 본다면…… 정말 과장 하나 보태지 않고 죽는 편이 나을 것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소유가 이 남자와 결혼하자마자 바로 짝사랑을 접었을 것이다. 최대한 이들 부부와 엮이지 않도록 몸을 사렸을 것이다.

그의 자존심은 그가 여태껏 전부처럼 추앙했던 사랑까지 이겼다.

재현의 나약한 속마음을 간파한 태오가 신랄하게 비난했다.


“야. 석재현. 나는 말이야. 소유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네 구두도 핥을 수 있어.”

재현의 떨리는 눈동자가 태오를 바라보았다.

이 대단한 사람이 남의 구두를 핥는 것. 분명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생경한 장면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말에 반박을 할 수 없는 건 그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걸 이제는 알아서였다.

어쩌면 그보다 더 굴욕적인 일도 소유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하리라.

그것이 이 남자, 강태오의 사랑이었다.


“이것보다 간절하지 않다면, 사랑이라고 하지 마. 넌 그저 네 처음에 집착했고, 아집을 부렸을 뿐이야. 소유에게 순정을 바치는 자신에게 취해 있었던 거겠지. 그리고 소유를 포기하면 네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멋진 너’가 깨질까 봐 두려웠던 거겠지.”

“…….”

“뭐가 어려워? 고작 무릎 꿇고, 구두 한 번 핥는 게.”

재현의 왼쪽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슬픔의 눈물은 아니었다.

패배의 눈물이었다.

재현은 태오에게 힘으로도 졌고, 사랑으로도 졌다. 아니, 애초에 태오에게 이길 수 있는 부분이 있긴 했던가.


“됐어.”

태오는 조금씩 굽혀지고 있는 재현의 무릎을 보고서 진저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거기까지.”

재현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꼴사나워서 더는 못 봐 주겠네.”

재현이 바람이 빠진 풍선처럼 털썩 주저앉았다.

이마에 맺힌 땀은 처량하게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아래에서 바라본 태오의 몸집은 평소보다 더 거대했다.


“너한테 마지막 기회를 줄게.”

태오는 고개를 돌려 다해의 병실을 바라보았다. 그의 뒤로 강한 조명이 내리쬐고 있어 정작 그의 표정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정다해, 알다시피 앞으로 어떤 장애를 가지고 살게 될지 몰라. 말을 못 하게 될 수도 있고, 어린아이처럼 굴 수도 있고, 어쩌면 몸을 가누지 못할 수도 있지.”

어찌 되었든 사고가 나기 전으로 완벽히 돌아갈 순 없을 거라고 의사가 말했다.


“네가 평생 데리고 살아.”

“……뭐?”

재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제게 닥칠 수 있는 모든 불행들을 가늠해 보았지만, 태오는 언제나 그랬듯 감히 예측조차 할 수 없는 형벌을 내렸다.

태오는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네가 책임지라고. 정다해는 너와 함께 죽을 각오도 했던데, 너도 그에 상응하는 정성을 보여 줘야지?”

재현의 인생에서 다해는 유일한 오점이었다.

그런데 그 오점과 평생 함께하라는 말을 하는 거다, 지금.


“그리고 원래 똥은 똥이 치우는 거야.”

태오는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재현의 턱을 쥐고 속삭였다.


“그럼 다시 널 잊어 줄게.”

사악한 말을 속삭이면서도 태오는 지나치게 매혹적이었다. 그에게서 풍기는 시원한 향은 같은 남자인 재현조차 홀릴 것 같았다.

그래서 더 공포스러운지도. 그는 마치 사람들을 꾀어내는 사탄 같았다.


“우리 의사 선생께서는 머리가 좋으시니, 내 말 이해하겠지?”

그렇게 말하고서 태오는 몸을 일으켰다.

재현이 땅을 짚으며 제게 닥친 최악의 엔딩을 실감했다. 이번 생은 완전히 망가진 것이다.

재현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소유야, 집에 가자.”

태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병실로 걸어가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들 사이에서 오간 대화를 알 리 없는 소유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서 자야 할 것 같아. 지킬 사람도 없고. 피곤하면 너 먼저 들어가서 자.”

“그럴 필요 없어.”

“어?”

“오늘 밤은 남자 친구가 지극정성으로 돌볼 거라고 하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소유의 시야에 비실비실 걸어오는 재현이 들어왔다.

어쩐지 재현은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빼앗긴 듯 버석해져 있었다.


“앞으로는 둘이서 잘 헤쳐나갈 거니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된대.”

“하지만…….”

“가자. 그만 방해하고.”

태오가 망설이는 소유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내가 널 두고 어떻게 혼자 가?”

태오가 소유를 일으켜 세우는 순간에도 소유는 위태로운 재현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재현은 소유의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정다해에게는 해피엔딩일 거야.”

태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토록 사랑했던 석재현이 죽을 때까지 지켜 줄 테니까.”

태오의 말이 거짓말이란 것쯤은 소유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여전히 재현에겐 다해를 향한 애정이 조금도 깃들어 있지 않은 것이 보였다.

그럼에도 소유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녀가 평생 다해를 책임져 줄 순 없었기 때문이다.

중간에 손을 뗄 거라면 애초에 시작하지 않는 편이 좋다.

소유는 긴 생각을 마치고 마침내 얼마 없는 짐들을 들고 일어섰다. 안도한 태오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그대로 병실을 빠져나가려는데, 소유가 재현의 앞에서 불쑥 걸음을 멈춰 섰다.


“잠깐만.”

그에 태오도 덩달아 멈추어야만 했다.


“석재현.”

소유가 재현의 앞에 서서 차갑게 그의 이름 석 자를 불렀다.


“아저씨더러 사과하시라고 해, 우리 태오한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태오가 놀란 눈으로 소유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소유는 재현에게만 시선을 줄 뿐이다.


“오늘 사고는 정다해가 벌인 일이고, 정다해를 그곳까지 내몬 건 너야. 너희 둘 사이의 일이지. 태오가 그런 말 들을 이유가 없잖아.”

“…….”

“과연 태오가 없었다면 오늘의 너희는 무사했을까?”

재현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나는 왜 태오가 없었어도 오늘의 사고는 반드시 일어났을 것만 같지?”

“…….”

“그런데도 모든 비난의 대상이 태오가 된다는 건 너무 부조리한 거 아닌가? 그러니 너희 아버지한테 말씀드려. 내 남편한테 사과하라고.”

‘내 남편’이라는 당연한 말이 태오에겐 몹시 감명 깊게 들렸다. 그녀도 그녀 나름의 방법으로 태오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다.

태오의 애틋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유는 그대로 돌아섰다. 재현에게 대답도 듣지 않고서.

정말이지 너무 지친 하루였다. 이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벗어던지고 편히 쉬고 싶었다.

* * *

돌아온 정원엔 파티의 잔해들이 남았다.

하지만 반가운 하객들도, 화려한 불꽃도, 끈적한 재즈 음악도 모두 사라지고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마치 몇 시간 전의 달콤했던 기억은 꿈이었던 것처럼 아득했다. 오늘도 우리의 파티는 끝내 마무리되지 못했구나.

입 안이 썼다.

소유는 잔해들을 애써 밟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태오는 아무런 말 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오며 드레스 자락을 잡아 줬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밟고 넘어지지 않도록.

이제는 익숙해진 남편의 배려 덕분에 편하게 침실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침실 문 앞에서 태오는 드레스 자락을 놓았고, 걸음을 우뚝 멈췄다.

이미 침실 안으로 들어선 소유는 뒤로 돌아 남편을 빤히 보았다.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하는 것처럼 태오의 몸은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오늘 내 얼굴 보기 힘들면 다른 방에서 잘게.”

“…….”

그러고 보면 병원에서 집에 오는 내내 우린 대화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던가.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던 터라 정면만 바라보았다.

아마 태오는 제 눈치를 보느라 말도 걸지 못하고 운전만 했으리라.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는 건 상관없어. 그런데 네가 생각하기에도 내 방법이 잘못됐다면 벌 받을게.”

태오는 모든 해가 저문 세상에 서 있는 것처럼 어두웠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마저 외로워 보였다.

소유는 애달피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나 버리지 마.”

적들에겐 한없이 잔인했던 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네가 허락해 줄 때까지 다가가지 않을게. 마음이 풀릴 때까지 기다릴게. 대신 나 버리지만 마, 소유야.”

태오가 최대한 오래 소유를 눈에 담았다.


“잘 자, 소유야.”

그러곤 뒤로 돌아 멀어졌다.

본격적인 신혼 생활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쓰는 각방이었다.

물론 평소와 똑같이 태오를 대할 자신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거리를 둘 생각은 없었던 터라 소유는 당황스러웠다.


“내가 뭐라고 했다고.”

혼자 중얼거리다 닫힌 문고리를 덥석 잡았다. 문을 열고 멀어지는 그를 붙잡으려는 생각이었다.

오늘 같은 날, 나를 혼자 두지 말라고. 함께 있어 달라고.

툭.

하지만 곧 문고리를 잡았던 손은 아래로 떨어졌다.

지금 잡으면? 그러면 다 해결되는 건가?

결론적으로 본질적인 해결은 아니었다. 그저 잠시 덮어 두고 회피할 뿐인 거다. 현재의 고단함을 이겨내기 위해 진짜 중요한 것을 뒤로 미뤄 두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되면 당장 오늘은 평안하게 보내겠지.

하지만 날이 밝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면 마음은 변할 것이다.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은 찜찜함은 다시 부부 사이를 서먹하게 만들 것이다.

편의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은 오히려 태오를 더 힘들게 하는 일인 것 같아 소유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리하여 오늘 밤은 어떻게든 혼자 이겨내 보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현재 제겐 시간이 필요했다. 이 모든 문제들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태오에게 브리핑하기 위해 준비할 시간이 말이다.

첫 번째, 태오의 모든 인격적 결함을 가뿐히 무시할 정도로 그를 사랑하는가.

두 번째, 그렇다면 태오를 변화시킬 것인가. 아니면, 그를 따라 자신이 변할 것인가.

그것은 단 몇 분 만에 답을 낼 수 있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결혼 생활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할 순간이었기 때문에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었다.

소유는 한숨을 쉬고 드레스룸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모든 액세서리를 풀고, 드레스를 벗기 시작했다.

그러나 홀로 벗기 어려운 드레스라 한참을 낑낑대다가 지쳐 풀썩 주저앉았다.

입을 땐 태오가 도와줘서 수월했다.


“벌써 보고 싶어.”

소유는 부스스해진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고서 울먹였다.

지금 넌 뭘 하고 있을까.

같은 집에 있으면서도 아주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또, 우스울 정도로 보고 싶었다.


“너도 잘 자, 태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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