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발꿈치를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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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발꿈치를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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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발꿈치를 들고
2022.10.17.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태오에게 소유가 멀어진 삶은 생각보다 더 힘들었다.
그저 기다리지 않고 먼저 다가가고 싶었고, 소유의 ‘사랑한다’라는 고백이 듣고 싶었다.
그러나 태오는 그저 소유의 결정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의지대로 할 수 없다는 게 이토록 힘든 일인지 태오는 이 나이를 먹고서야 처음 깨달았다.
아마 태오의 인생에서 이런 경험을 선사할 수 있는 이는 소유가 유일할 것이다.
“손 비서. 먼저 퇴근할게.”
“……네? 갑자기 어딜 가세요?”
종일 소유의 사진만 들여다보던 태오가 불쑥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손지욱 비서가 잡으려고 했지만 그럴 새도 없이 태오는 긴 다리로 이미 사라진 후였다.
“부사장님도 사랑 앞에선 어쩔 수 없네요.”
엉망인 태오의 책상을 대신 정리하던 손 비서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미우나 고우나 제 상사였던지라 안쓰러움이 생겨났다.
그래도, 태오에게도 한 번쯤 이런 시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따금 제어가 되지 않는 태오는 위험했으니까. 그의 고삐를 잡아 줄 누군가가 필요했으니까.
이번 사건을 통해 태오는 변해 있을 테다. 좋은 방향으로.
손 비서의 기특한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오는 묵묵히 차를 몰았다. 스스로도 이유를 모르겠지만, 그의 차는 본가에 도달해 있었다.
태오의 차를 알아본 경호원이 차고의 문을 열어 줬다.
태오는 아무렇게나 차를 주차하고 성큼성큼 걸어 현관문을 벌컥 열었다. 현관에 익숙한 구두가 놓여 있었지만, 정신이 없던 태오는 보지 못했다.
서령은 거실에 앉아 홀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손님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일단 현재는 없었기에 태오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머니에게로 다가갔다.
“네가 웬일이니? 연락도 없이.”
서령이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녀의 눈이 찰나의 순간, 야윈 아들의 얼굴에 닿았다. 이놈, 마음고생이 영 심한 모양이지.
“앉아라.”
걱정을 티 내지 않고 권하자, 태오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러고서도 태오는 한참 동안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했다. 서령은 하고 싶은 무수히 많은 말들을 삼켰다.
“어머니가 보기에 제 성격이 이상합니까?”
묵묵히 기다리자 드디어 태오가 입을 열었다. 뚱딴지같은 말에 서령이 귀걸이를 만지작댔다.
“무슨 말이니?”
“그렇게 비정상적이고 이해받지 못할 성격이냔 말입니다.”
문득 서령이 고개를 돌려 먼 곳을 응시했다. 그러다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평범한 성격이었다면 지금 그 자리에 있지도 못하겠지. 그래. 넌 남들보다 잔인하고 포악한 면이 있지.”
“절 왜 이렇게 키우셨어요?”
태오는 마치 이 사태의 원인을 서령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 같았다. 황당해진 서령이 되물었다.
“너 지금 소유랑 소원해진 걸 내 탓을 하려는 거니?”
“자식이 잘못된 길로 가면 부모가…….”
“어머나. 네가 우릴 부모로 여기긴 했어?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가서 비웃던 거 아니었어?”
“…….”
한 번도 지는 법이 없던 태오를 한 방 먹인 서령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 상황이 기분 나쁘지만은 않았다.
태오가 난생처음으로 어리광 아닌 어리광을 부리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나이 서른이 다 되어 첫 어리광을 부릴 줄은 몰랐지만…… 재밌네.
이것도 소유가 몰고 온 변화라면 변화랄까.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뭐?”
“어떻게 해야 소유가 떠나지 않게 잡을 수 있냐고요.”
“알려 주면 듣긴 할 거니?”
“들으려고 여기 왔잖아요.”
순순히 돌아온 대답에 어쩐지 기분이 묘해졌다.
잠시 말을 멈추고 먹먹함을 지워 낸 서령이 곧 평소의 목소리로 돌아와 대답했다.
“둘의 성향이 다른 걸 어쩌겠니. 맞춰 본다고 한들 서로를 영영 이해하지 못하고 살 텐데.”
“그러니까 방법을…….”
“소유를 너처럼 만들면 되잖아.”
서령의 의뭉스러운 말에 태오가 미간을 팍 찌푸렸다.
“너처럼 잔인하고 포악하게 만들어. 피도 눈물도 없이 타인을 대하고, 미소보다는 조소가 익숙하게 만들어.”
“소유는 그런 애가 아니에요. 착한 애예요.”
“네가 나쁜 건 아는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게 조언인지, 험담인지 모를 일이었다. 역시 이곳에 오는 게 아니었다며 태오가 후회하고 있을 때 즈음 서령이 다시 말했다.
“그럼 네가 바뀌어야지. 별수 있니?”
태오가 멈칫했다.
“소유를 너처럼 만들기 싫다면, 네가 소유처럼 되어야지.”
아들의 까만 눈동자가 생소한 감정으로 어머니를 담았다.
“타인에게 너그러워지고, 동정심을 가지고, 소유가 아닌 사람들의 슬픔에도 공감을 하고, 그들을 배려하는 법을 배워야지.”
분명 그런 태오는 서령이 바라던 태오는 아니었다. 이 거대한 강화 그룹을 호시탐탐 노리는 하이에나들에게서 지키기 위해서는 다소 잔혹하더라도 최대한 강한 게 나았다.
그런데도 서령이 태오에게 그렇게 조언한 것은, 소유와 함께하는 태오의 인생이 더 행복할 것이라는 걸 알아서였다. 약해질지언정 외롭지는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아서였다.
부모처럼 비참하게 나이가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아서였다.
소유는 서령의 우선순위와 가치관마저 바꿔 버렸는지도 모른다.
이제 어머니는 아들이 강화 그룹이 아닌 가정을 우선으로 지켜 내는 것을 응원하기로 했다.
“넌 지금까지 많이 변해 왔잖니. 거기서 더 변하는 게 어렵겠니?”
“…….”
“세기의 사랑 중이신데, 그 정도는 극복해야지?”
방금 한 말은 반쯤 놀리는 말이었다. 그러나 서령의 말에 감명을 받은 듯한 태오는 딱히 대꾸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니?”
“…….”
“얘. 태오야.”
그러곤 인사도 없이 쌩 하니 본가를 떠났다.
“이제 용건 끝났다, 이거지?”
서령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픽 웃었다.
“고얀 놈. 내가 교육을 잘못시키긴 했네. 그렇지, 새아가?”
제가 그토록 열망하는 소유가 이곳에 있는지도 모르고.
소유가 거실과 통해 있는 응접실 문을 열고 슬그머니 나왔다. 사실 태오보다 서령을 먼저 찾아온 것은 소유였고, 또 태오와 서령과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다.
“평생 남에게 굽혀 본 적 없는 놈이, 잘못을 인정하고 바뀌려는 것 같은데.”
소유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넌 어쩔 생각이니?”
“…….”
“팔은 안으로 굽는 터라, 나는 네가 우리 아들을 다시 예뻐해 줬으면 하는데.”
서령이 소파에서 일어나 우두커니 서 있는 소유에게로 걸어갔다.
“너랑 있으면 태오는 정말 행복해 보인단다.”
서령의 고운 손이 소유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첫 만남 때는 상상도 하지 못하던 손길이었다. 너무나 따뜻한 기분에 소유는 당장이라도 시어머니의 품에 안겨 울고 싶어졌다.
“난 태오가 행복한 게 좋단다.”
“…….”
“그리고 그런 태오를 보며 행복해하는 네가 좋단다.”
“어머니.”
“그때 태오를 미국에 보내길 잘한 것 같아. 내가 태오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니었나 싶어.”
그곳에서 소유를 만나 지금에 이르렀으니.
“태오에겐 그 무엇과도 못 바꿀 중요한 순간이었을 거다. 너랑 만난 그 순간이.”
* * *
소유는 태오보다 집에 늦게 도착했다. 서령과 이야기를 더 나누고, 생각도 정리할 겸 느긋하게 산책까지 했기 때문이다.
밤이 무르익어 가는 시간, 소유는 집 근처에 도착했다. 그때 대문 앞에 서 있는 한 인영을 발견하고 우뚝 걸음을 멈춰 세웠다.
때마침 태오도 소유를 발견한 듯 그녀를 응시했다.
“걱정했어. 늦었는데 안 오길래.”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에 혼자 서 있었을까. 피곤하고 추웠을 텐데. 소유는 괜히 속상했다.
“안에서 기다리지, 왜 밖에서 기다려.”
“전화도 안 받길래…….”
그러고 보니 아까 휴대폰은 배터리가 없어 꺼졌다.
“오래 안 기다렸어. 방금 막 나왔어. 진짜야.”
“거짓말하지 마.”
“귀찮게 하려거나 그런 건 아니었어.”
소유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런 게 아니라 춥잖아. 바보야.”
“난 괜찮아. 넌 안 추워?”
태오가 재킷을 벗어 소유의 어깨 위에 둘러 주었다. 귀가 빨개질 정도로 추운 날씨였는데 말이다. 얇은 셔츠 차림의 태오는 금방이라도 감기에 걸릴 온도였다.
“너 입어.”
“소유야. 나 진짜 안 추워.”
그런 태오가 답답하면서도 너무 애틋했다. 남들한테 하는 것처럼 내게도 좀 매정하게 굴지. 그렇다면 이 모진 시간들이 이렇게 미안하진 않았을 텐데.
“들어가자.”
“안 물어봐? 왜 이렇게 늦었는지?”
소유는 걸음을 움직이는 대신 태오에게 물었다. 그러자 태오가 잔잔한 얼굴로 뒤로 돌았다.
“응. 안 물어봐.”
“왜? 안 궁금해?”
“궁금해. 그런데 안 물어봐. 네가 싫어할까 봐 무서워.”
애써 세운 장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소유는 가여운 태오를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아렸다. 아까 서령과의 대화도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지금은, 일단 지금은, 네가 내 눈앞에 있는 것만 해도 너무 좋아.”
“…….”
“집으로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워.”
태오는 한 걸음 물러나 문을 향해 손짓했다. 소유가 안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태오야.”
소유가 떨리는 손을 들어 태오의 손목을 꽉 잡았다. 내내 닿고 싶었던 소유의 손길이 닿자 태오는 얼어붙었다. 꼭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잊고 있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이렇게 따뜻했었지. 이렇게 부드러웠지. 너란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네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태오는 소유를 잡고 제게로 더 가까이 잡아당기고 싶은 충동을 필사적으로 참아 냈다. 대신 소유가 이왕이면 아주 오래 저를 잡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유가 한 걸음 나아가 태오의 앞에 마주 보고 섰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소유의 입에서 불투명한 입김이 나왔다. 어깨에 걸친 태오의 큰 재킷이 아래로 주륵 미끄러지려고 하자 태오가 급하게 그것을 다시 올렸다.
“어?”
그러고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소유의 말을 되새김질했다.
소유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눅눅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이상해진 것 같다고.”
“…….”
이제는 어떤 너라도 괜찮은 것처럼 너를 사랑하고 있다고. 설령 네가 바뀌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너를 떠날 수 없을 정도로 너를 아끼고 있다고.
내 세계가 너로 인해 완전히 뒤바뀌고 있다고.
“그게 무슨 의미야?”
태오는 비로소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소유에게 붙잡히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그녀의 손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러자 상기된 얼굴의 소유가 처연한 시선으로 저를 응시했다.
“네가 생각하기엔 어떤 의미 같은데?”
“…….”
소유는 멍한 태오에게로 다가가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이제야 이리저리 불안정하던 마음이 고정된 것만 같다.
“소유야.”
태오는 함께 소유를 안아 주지 않고 그녀의 이름만 부를 뿐이었다. 도리어 소유가 안달이 났다. 소유는 발꿈치를 들고 그의 목을 아래로 내렸다.
태오의 숨결이 그녀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소유는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의 입술이 닿기 직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