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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첫눈 (60/95)


60. 첫눈
2022.10.24.



 


― 병원에서 전화가 왔어.

뜻밖의 소식은 평범한 일상 중 평범하지 않게 들려왔다.

소유는 급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휴대폰을 바로 잡았다.


― 다해가 깨어났다는구나.

묘한 기분이 들었다.

기다려 왔으면서도 기다리지 않았던 순간이 찾아왔을 때 드는 그런 기분.


― 나는 병원에 가 보려고 해. 그래도 병원 쪽에는 내가 보호자로 되어 있으니, 병원비 수납도 할 겸. 너는 편한 대로 하렴.

“……가야죠. 태오랑 갈게요.”

아버지와 전화를 끊은 후에도 도통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소유는 퇴근을 하자마자 태오와 함께 다해가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아저씨, 배고파요.”

처음 다해를 대면하고 소유는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소유가 아는 다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신체적 장애는 없지만, 언어적 능력이 손상되어 말을 어눌하게 한다고 했다.

거기다가 유년 시절로 돌아가 그 이후의 기억을 모두 잃었다고 한다. 의사 소견으로는 환자 본인이 선택한 기억상실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죄가 없던 순수한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겠지.”

태오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믿기지 않는 말이지만, 의사도 다해와 비슷한 사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적어도 그땐 지옥에 굴러떨어질 만큼 악독한 존재는 아니었을 테니까.”

태오의 말을 들으며 소유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표정 관리를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 소유를 알고 있다는 듯 태오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아저씨, 나 배고파!”

그렇게 다해는 어린아이가 되었고, 그 옆은 재현이 지키게 되었다.

재현에게 남겨진 마지막 형벌이었다.

물론 석영재 교수는 거세게 반대했지만, 재현은 묵묵히 제 운명을 받아들였다. 진짜 오롯이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인지, 태오에게 겁을 먹어서인지는 그만이 알겠지만.

다해가 재현의 옷자락을 주름이 지도록 잡아당기고, 재현이 작은 초콜릿 껍질을 까는 광경을 보다가 부부는 병원을 나섰다.

어느새 하늘은 어둡게 물들어 있었다.


“공연옥한테 이 사실을 알려야 할까?”

완벽하게 밤이 된 풍경을 보던 소유가 태오에게 나지막하게 물었다.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태오는 소유의 생각이 어떻든 지지해 주겠다는 듯한 뉘앙스였다.

소유는 골똘히 생각하다 대답했다.


“그래도 말은 해 주고 싶어. 또, 그 사람이 반성하고 있는지 한 번쯤 확인하고 싶기도 하고.”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소유에겐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소유에게 연옥은 가장 암울했던 페이지였기 때문이다.

또, 그 얼굴을 다시 마주한 후 어떤 트라우마가 되살아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무섭기도 해.”

“뭐가 무서워? 내가 같이 가 줄 건데.”

태오의 말에 침울했던 소유의 눈이 반짝였다.


“정말이야? 같이 가 줄 거야?”

“당연한 이야기를 왜 해. 내가 설마 거기에 널 혼자 보내겠어?”

용기가 생겼다.

태오와 함께라면.

당당하게 연옥과도 마주 볼 수 있었다. 그녀에게 하지 못했던 남은 말들을 털어 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럼 갈래.”

“그래. 그러자.”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추운 날씨도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어?”

그러다 소유가 문득 반가운 듯 외쳤다. 하늘에서 하얀 눈이 조금씩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태오야. 눈이야. 올해 첫눈이야!”

오늘 눈 온다는 소식은 없었는데. 마치 깜짝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뻤다. 오늘 하루 종일 안고 있던 무거운 마음이 잠시나마 씻겨나가는 기분이었다.

소유는 코앞의 차를 두고 다시 쪼르르 뒷걸음질 쳤다. 이미 운전석 문을 열었던 태오가 신기한 표정으로 소유를 바라보았다.

고작 눈 좀 오는 게 그렇게 좋은가.

소유는 자신과 어울리는 새하얀 눈 사이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손으로 눈송이를 잡으려는 무모한 시도를 하면서도 까르르 웃었다.


“감기 들어.”

그에 반해 태오는 소유의 건강 걱정뿐이었다. 가뜩이나 몸도 약한 애가.

이제 소유가 아픈 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태오였다.


“지금 감기가 중요해? 눈이라고, 태오야.”

“눈 좋아해?”

예상하지 못한 태오의 물음에 소유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넌 눈 안 좋아해?”

“눈을 왜 좋아해?”

부부는 서로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눈을 안 좋아하다니.

눈을 좋아하다니.


“이것 좀 봐. 안 예뻐?”

“보여. 내일 도로 얼겠다. 너 내일 내 차 타고 출근해. 위험해.”

“맙소사. 그런 건 내일 걱정하라고!”

“내가 군대에 있을 때, 제일 싫은 날이 언제였는지 줄 알아? 바로 눈 오는 날이야. 그거 다 삽으로 퍼내느라…….”

“에, 안 들려. 안 들려.”

감성 파괴자 강태오가 지금 내 첫눈을 망치고 있어. 사랑하는 사람과 첫눈을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데.

올해 있었던 일 중 손에 꼽히게 기쁜 순간이다.


“눈은 내리는 것도 예쁜데, 바닥에 소복소복 쌓이면 얼마나 더 예쁜데. 밟으면 기분 좋은 소리도 나고.”

“밟으면 진흙투성이 돼서 회색으로 변할걸.”

머리에 하얀 눈을 덕지덕지 묻힌 소유가 태오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태오의 목소리가 저를 놀리려는 것이 아닌 너무나 진심 같아서 마냥 화를 내기에도 머쓱했다.


“곧 서른인데, 내 새끼는 아직 순수하구나.”

“아직 서른인데, 네가 너무 염세적인 거야.”

사실 태오는 어릴 때도 그다지 눈을 좋아했던 적이 없었다. 눈의 낭만을 즐기기엔 그의 하루 일정은 몹시 빡빡했다. 조금이라도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눈싸움을 한다든가, 눈사람을 만든다든가 등의 놀이를 한 적 없었다.

그러나 소유는 전혀 아닌 듯했다. 태오는 소유의 눈으로 보는 겨울을 경청했다.


“어릴 땐 아빠랑 눈사람 자주 만들었어. 아빠가 나랑 눈사람이랑 닮았다고 되게 좋아했거든.”

“그래. 닮긴 했네. 뽀얀 게.”

“난 매년 아끼던 모자를 눈사람에게 양보했었어.”

하지만 왠지 이렇게 좋아하는 소유를 보니 태오도 올해부터 눈이 좋아질 것 같았다. 이제는 그도 남들이 다 즐기는 평범한 일상과 낭만을 사랑하는 사람과 만끽하고 싶었다.

목표만을 위해 아등바등 애쓰기엔 우리의 삶은 너무나 짧으니까.


“아빠랑 눈싸움했는데, 아빠가 많이 봐주셨어. 난 그것도 모르고 아빠 이겼다고 좋아했지.”

태오는 자신의 목도리를 풀어 소유의 목에 돌돌 감아 주었다.


“그리고 소원이었어. 사랑하는 사람과 첫눈 맞는 거. 그럼 사랑이 영원히 이루어진대.”

소유가 태오의 손을 맞잡고 기도하듯 눈을 꼭 감았다.

그랬나.

그런 유치한 미신이 있었던가.

태오는 태어나 처음으로 하얀 눈들을 관심 있게 응시했다. 보다 보니 가벼운 소유들이 내리는 것 같아 사랑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자, 됐다. 내가 소원 빌었으니까 우린 평생 행복할 거야.”

잠시 후 눈을 뜬 소유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런 소원 안 빌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어.”

“그렇긴 한데, 일종의 부적 같은 거지.”

소유로 인해 특별하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둘씩 특별해진다.

겨울이란 계절, 첫눈, 눈사람.

소유만의 감성이 메마른 태오를 마구 간지럽혔다.

그리 썩 나쁘진 않은 감각이었다.

기나긴 1년을 보내며 겨울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도 생겼고.

인생이 더 재밌어질 것만 같다.


“곧 네 생일이네.”

12월 31일.

겨울의 절정이자 한 해의 마지막 날, 소유는 태어났다.

자신의 생일은 까먹고 지나는 일이 잦던 태오였지만 소유의 생일만은 최고의 날로 만들어 주고 싶었다.


“뭐 갖고 싶어?”

“음, 너?”

소유가 태오를 와락 끌어안았다.

태오는 진짜 눈사람이 되기 직전인 소유를 코트 안에 넣고 귓가에 속삭였다.
 

 


“난 이미 네 건데.”

또 귀가 빨개진다.

참 솔직하고 순수한 내 새끼의 귀.

확 깨물어 버리고 싶지만, 소유가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 태오는 꾹 참았다.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다 네 건데.”

얼른 찾아오길 고대해 본다.

네가 세상에 태어난 그 소중한 날이.

내겐 아기 예수가 태어난 크리스마스보다 더 귀한 그날이.

* * *



“자, 올해도 이제 끝이네요.”

12월의 마지막 날, 도진은 직원들에게 따뜻한 인사를 건넸다.

근래 유아 물산은 정말 우여곡절이 많았다.

정신적 지주 같았던 정희훈 사장이 사고를 당해 혼수상태에 빠졌었고, 무역의 ‘무’자도 모르는 공연옥 여사의 폭정 속에 직원들은 이탈, 휴직 등 정처 없이 방황해야만 했다.

그렇게 그대로 바닥으로 고꾸라질 듯했던 유아 물산은 소유가 존재감을 드러내며 터닝 포인트를 맞이했다.

공연옥 여사는 살인 미수 및 공금 횡령, 아동 학대 등으로 감옥에 수감되고, 회사의 운영진은 정희훈 사장의 딸인 소유와 조카인 도진으로 교체되었다.

거기다가 소유의 시댁인 대기업 강화 그룹의 협력체가 되며 유아 물산은 스프링이 달린 신발을 신은 것처럼 힘차게 재도약했다.

짧은 시간 동안 이런 격동을 겪은 회사는 드물었다.

여러모로 유아 물산은 새로운 역사를 쓰는 중이다.


“우리 유아 물산이 이토록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여러분들 덕분입니다.”

도진은 모든 공을 직원들에게로 돌렸다.

단지 그가 겸손해서가 아니었다.

직원들의 노고는 단순히 인센티브 때문이라고 하기엔 모자람이 있었다. 그들이 진심으로 회사를 사랑하고, 사명감을 가져 줬기에 이 대단한 일들이 가능했다.


“여러분의 애사심에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도진의 감동적인 연설에 소유가 작게 박수를 쳤다.


“내년에도 우리는 여러 번 넘어지고, 실패를 하겠지만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해 봅시다. 올해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내년엔 인원을 증원할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그 말엔 직원들 전원이 박수를 쳤다.

애타게 바라던 소식이었으니까.


“그럼 오늘은 단 한 명의 야근자 없이 정시에 퇴근합시다. 그리고 연휴 동안 행복하게 보내시고, 내년에 다시 봅시다.”

“네!”

“마지막으로 정 팀장님, 생일 축하드립니다.”

도진이 센스 있게 소유의 생일을 언급하며 윙크를 했다.


“축하해요, 팀장님.”

“그리고 곧 30대 되시는 것도 축하드립니다.”

“에, 그거 축하할 일 맞아?”

괜히 수줍어진 소유가 직원들에게 생일 축하를 받았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생일은 처음이라 얼굴까지 붉게 물들었다.

올해는 정말 힘들기도 했지만 많은 것을 얻은 해였어.

당연히 그중 가장 큰 이벤트는 태오와의 결혼이겠지만.


“오늘 퇴근하고 강 서방이랑 알콩달콩 데이트하려나?”

소유의 속마음을 읽은 도진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와, 부러워요.”

“그러니깐요. 그렇게 잘생긴 남편은 존재 자체가 선물이죠.”

“게다가 엄청 애처가로 유명하시잖아요.”

“재벌에, 미남에, 로맨티시스트에, 순정까지. 에이, 이건 설정 과다다.”

“그래도 정 팀장님이 그만큼 좋은 분이니까 그렇죠.”

도진을 시작으로 직원들의 부러움 섞인 말들이 이어졌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소유가 도진을 흘겨보지만, 도진은 태평하게 ‘뭐.’라는 입 모양만 보여 주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못 살아, 저 오빠.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데, 메시지가 하나 날아들었다.


[퇴근하고 회사 앞으로 데리러 갈게.]

물론 도진의 말이 영 없는 말은 아니었다.

오늘 저녁, 태오와 소유는 둘만의 오붓한 파티를 하기로 했다.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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