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12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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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12월 31일
2022.10.28.
소유의 퇴근 시간에 맞춰 기다리던 태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금쯤 내려오고도 남았을 소유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조하게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다가 태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때마침 한 인영이 뒤뚱뒤뚱 나타났다.
온갖 케이크 상자와 선물 상자에 몸을 잡아먹히기 직전인 소유였다.
태오는 소유에게로 달려가 짐을 덜어 주었다. 태오가 들어도 꽤 묵직한 무게였다.
“짐 많으면 올라오라고 연락을 하지.”
태오가 도와주고 나서야 소유의 시야가 탁 트였다.
넘어질까 봐 어찌나 불안하던지.
“직원들이랑 인사 주고받느라 정신이 없었어.”
“너희 회사는 진짜 분위기 좋다?”
규모는 강화 호텔이 훨씬 컸지만, 대기업 계열사에서 이런 따뜻한 연말은 어쩐지 기대하기 어려웠다.
일단 그런 문화도 없거니와 직원들도 어색할 게 분명했다. 강태오 부사장의 따스한 인사라니.
그냥 말없이 연말 보너스를 통장에 꽂아 주는 게 최고의 연말인사일 테다.
“태오야. 태오야.”
태오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사이 소유가 신이 난 듯 그의 이름을 연달아 불렀다.
이럴 때 소유는 꼭 아이 같다.
태오가 관심을 줄 때까지 쉬지 않고 재잘재잘 태오를 불렀다.
“왜. 왜.”
그럼 태오는 자신의 생각을 접어 두고 부름이 불린 횟수만큼 대답해 주곤 했다.
“나 태어나서 이렇게 케이크랑 선물 많이 받은 생일은 처음이야!”
생일이어서 이토록 기뻤던 적, 정말 오랜만이었다.
모두가 예쁜 마음이 그득그득 담긴 선물을 건네주었다.
“아니다.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 처음인가. 그래도 미국에 있었을 땐 친구들이 챙겨 줬었으니까. 아무튼 너무 좋다!”
너무 기뻐서도 눈물이 날 수 있구나.
소유의 코끝이 붉게 물들었다. 이미 지나온 크리스마스 속 루돌프처럼.
소유는 이 행복을 정확히 반으로 잘라 태오와 나눠 가지고 싶었다.
“날 사랑해 주는 사람이 이만큼이나 많아질 줄은 정말 몰랐어. 난 운이 좋은가 봐.”
“넌 원래 그랬어야 했어. 그럴 가치가 있는 애니까.”
그동안은 그 나쁜 모녀가 소유의 행복을 중간에서 가로챘을 뿐.
마땅히 소유의 몫이어야 할 행복이었다.
운이 아니라.
“넌 가끔 말을 너무 사랑스럽게 해, 태오야. 연습이라도 해 온 것처럼.”
태오가 뒷좌석 문을 열고 상자들을 소중히 실었다. 어딘가 찌그러지거나 구겨지는 일이 없도록.
그러곤 소유의 품에 안긴 남은 짐들도 마저 실었다.
텅 비었던 뒷좌석이 사람들의 소중한 마음으로 가득 찼다. 태오의 마음도 덩달아 두둥실 떠올랐다.
“올해 내가 가장 잘한 일은 널 만난 일이야, 태오야.”
동의하듯 태오가 씩 웃었다. 그건 맞지.
물론 올해 태오가 가장 잘한 일 또한 소유를 만난 일이다.
“널 만난 날을 기점으로 내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어.”
태오의 직설적이었던 말들이 스쳐 지나갔다.
‘더 이상 시간 끌 필요도 없어 보이는데.’
놀라울 만큼 단 한 마디도 흐려지지 않고 소유에게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마치 바로 전날에 들은 말 같았다.
‘결혼하시죠?’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이 결혼 말고 다른 방법이 있나?’
거만하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튕길 시간이 필요한가?’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태오도 초조했던 것 같다.
‘나는 괜한 시간 낭비 싫어합니다.’
제가 거절할까 봐.
그래서 의도치 않게 저를 몰아붙였던 모양이다.
‘……해야죠, 결혼.’
태오에 대해 완벽히 파악하고 나니 몰랐던 사실이 보였다.
그 순간, 태오는 분명 안도하고 있었다.
저의 대답에.
“나도 사랑에 거의 문외한이었으니까. 서툴렀지.”
소유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태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넌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계모에게 떠밀려 낯선 남자와 대뜸 맞선을 보러 나왔는데, 내가 달가웠겠어? 그래서 빨리 대답을 듣고 싶었어.”
“네가 원하는 대답을?”
“당연하지.”
귀여운 태오의 말에 소유가 해사하게 웃었다.
조금만 더 침착하게 대했더라면 네 첫인상이 더 좋았을 텐데. 우리의 결혼에 대해 의문을 덜 가졌을 텐데. 아주 살짝은 달콤한 순간이 되었을 텐데.
“사실 나, 네 대답 듣자마자 도망친 거야.”
“왜?”
“무르자고 할까 봐.”
태오가 부끄러운지 눈썹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정소유 씨, 또 봅시다.’
어쩐지.
대답 듣자마자 휑 사라지더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그를 보며 겁을 먹었었는데, 사실 그도 자신 못지않게 겁을 먹어서 도망친 거라고 생각하니 그 무례한 행동이 귀엽게 느껴졌다.
나 정말 지독한 사랑에 빠지긴 했나 봐.
“귀여운 내 새끼.”
소유가 참지 못하고 태오의 볼을 조물조물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우리 첫 만남 시나리오를 썼고…….”
“어, 그거 손 비서님이 쓴 거 아니었어?”
고등학교 때 떠난 유학길에서 만난 두 사람이 남몰래 사랑을 키워 오다 마침내 결혼에 골인했다는 그 진부하면서도 특별한 러브스토리.
우연치고 너무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태오가 썼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내가 썼어. 직접. 손 비서가 우리의 미국 이야기까지 알 순 없으니까.”
“와, 우리 태오. 문학 소년이었네.”
놀란 소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쯤은 허구였지만, 읽는 저도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감동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놀리지 마.”
소유가 놀리는 것인 줄 알았던지 태오가 툴툴댔다.
“놀리는 거 아니야. 너 글에 소질 있어. 작가를 해 봐.”
소유는 태오의 양쪽 볼에 입을 맞췄다. 태오가 소유의 코를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오빠한테 까부네. 예뻐서 봐준다.”
“아, 네. 오빠 감사합니다.”
태오는 얄미운 소유를 보며 바보처럼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소유를 진정시키고 턱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근데 너, 지금 눈 오는 건 알아?”
“어?”
그제야 소유가 처음으로 올려다보았다.
“정말이다.”
하얀 눈이 내려와 소유의 보드라운 볼에 닿았다가 단숨에 녹았다.
낮엔 안 왔는데. 언제부터 오고 있었지.
무거운 짐을 들고 오느라, 태오를 보느라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크리스마스에도 안 오던 눈이 생일날 오다니.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던 사람들에겐 미안하지만, 더 기뻤다.
“Happy birthday, Hazel.”
하얀 눈 아래에 있는 소유는 정말 찬란하리만큼 빛났다.
사진으로 찍어 평생 남겨 두고 싶을 만큼.
앞으로 눈이 오는 풍경 속의 너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내 인생에 몇 번이나 남았을까.
왠지 시간이 흘러가고 나이를 먹어 가는 게 아쉬워졌다.
“고마워, Noah.”
용케도 눈을 만끽하느라 태오를 잊지 않은 소유가 그의 품에 쏙 안겼다.
“가자. 맛있는 거 먹으러. 배고프겠다.”
“그다음엔?”
“그다음엔 집에 가서 영화 보고, 케이크 먹고, 선물 풀어 보고…….”
“그러지 말고, 우리 오늘은 거기서 잘까?”
“어디?”
“우리가 첫날밤을 보냈던 그 스위트룸.”
남들이 보통 생각하는 그런 첫날 밤은 아니었지만, 그들 나름의 첫날밤이 이루어진 장소였다.
“다시 가 보고 싶어. 너무 늦게 이야기하는 거지만 그때 어찌나 고마웠는지 몰라. 오갈 데 없는 나를 재워 줘서.”
좋은 생각이었는지 태오가 웃으며 바로 휴대폰을 꺼내 호텔로 전화를 걸었다.
객실에 손님이 있다고 해도 어떻게든 그곳에서 밤을 보내겠노라, 다짐하고 있는데 다행히도 객실은 비어 있었다.
오늘처럼 바쁜 연말엔 행운이나 다름없었다.
소유의 생일이 불러온 기적이란 말 말고는 설명할 말이 없었다.
“저녁 먹고 갈 테니까 그때까지 준비해 주고…….”
아직 통화가 끝나지도 않았건만 소유는 대범하게도 태오의 입에 짧게 키스했다.
놀란 태오가 얼어붙자 이번엔 소유의 손이 태오의 몸을 더듬었다.
이거 지금, 대놓고 유혹하는 거 맞지?
― ……부사장님?
태오가 말이 없자 직원이 되물었다.
“아, 그리고 와인 하나 가져다 두세요.”
태오는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나 지금 통화 중이잖아.”
“우리 태오, 오늘은 하늘을 좀 보게 해 줄까?”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임신을 결심한 이후, 태오가 늘 말하는 말이었다.
왠지 태오가 조급해져 속삭였다.
“지금 바로 호텔로 가자.”
소유가 킥킥 웃었다.
우리 태오는 어쩜 이렇게 본능에 충실할까.
“나 배고픈데.”
“사람 자극했으면 책임져.”
“내 새끼, 그렇게 급해?”
문득 태오는 깨달았다.
제가 농락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알면서도 농락당할 수밖에 없었다.
약간 짜증 나지만, 그건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 * *
새빨간 와인마저 매혹적으로 출렁이는 밤이었다.
태오와 소유는 가득 쌓인 선물 상자를 한쪽에 쌓아 두고서 와인잔을 부딪쳤다.
“많이 마시지는 마.”
태오가 신신당부했다.
저러다 나 몰라라 잠들어 버릴까 봐 걱정이 되었던 탓이다.
“알았어.”
술이 약한 소유는 목을 축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강화 호텔은 정말 야경이 최고인 것 같아. 서울이 한눈에 다 보여.”
한강, 높은 아파트, 별빛처럼 총총 빛나는 자동차 불빛까지.
사람들의 꿈이라 불릴 만큼 황홀했다.
“일부러 그런 부지를 고른 거지.”
감상에 젖은 소유와 달리 태오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이젠 그런 사업가적인 태오도 적응이 되어 소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웃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때도 정말 아름다웠는데…… 이렇게 너와 마음을 확인하고 다시 오니까 더 더 더 아름답다고.”
“아, 그런 뜻이었어?”
그제야 태오가 소유와 같은 무드 속으로 들어왔다.
소유는 고작 와인 한 모금에 얼굴이 뜨거워짐을 느끼며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참 낭만 없는 우리 남편.”
“낭만은 없어도 돈은 많잖아.”
저런 유머에 웃어 주면 안 되는데.
저도 모르게 웃음이 픽 새어 나왔다.
태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었다.
“가자.”
“어딜?”
“하늘 보러. 너 그러다 금방 잠들겠다.”
“나 술 진짜 못 마셔, 그렇지? 분위기 좀 내고 싶은데.”
소유는 태오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아무렴 어때.
그래도 예쁜데.
태오는 소유를 조심스럽게 밀어 침대에 눕혔다.
조금씩 다가오는 태오를 느끼며 눈을 감고 있는데, 어째 뜨끈한 호흡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목 부분에 차가운 금속 느낌이 났다.
소유가 천천히 눈을 떠 태오가 걸어 준 목걸이를 쓰다듬었다.
“이건 내 선물.”
‘Noah’라는 알파벳 모양이 느껴졌다.
“커플 목걸이야.”
태오가 셔츠 단추를 풀어 같은 디자인의 목걸이를 밖으로 꺼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태오의 목걸이엔 ‘Hazel’이 있었다.
“우리가 서로의 소유라는 걸 티 내고 다니는 거야.”
“목줄이야, 이거?”
소유가 키득대며 농담을 던졌다.
마치 강아지들 목에 걸어 주는 목줄 같았다.
혹시 애가 방황하고 있으면 연락해 주세요, 라는 문구가 적혀 있어야 할 것 같은 그런 목줄.
뭐, 그래도…….
“마음에 들어. 고마워.”
“절대 빼면 안 돼.”
“알았어.”
소유가 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했다.
“자, 그럼 보던 하늘 마저 볼까?”
태오의 진득한 입맞춤이 시작되었다.
소유는 천장을 보며 태오에게 몸을 맡겼다.
“너무 아프지 않게 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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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날밤, 두 사람에겐 예상하지도 못했던 진짜 선물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