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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불건전한 생일선물 (62/95)


62. 불건전한 생일선물
2022.10.31.



 
어쩐지 평소의 아침보다 기분이 좋았다. 왠지 속이 따뜻하기도 하고, 이유 없이 웃음이 실실 나오기도 했다.

옆에 태오가 있어서 그런가.

아닌데. 태오는 늘 옆에 있었는데.

영문은 알 수 없지만, 소유는 이 산뜻한 기분을 마음껏 만끽하기로 했다.


“내 새끼, 올해도 잘 부탁해.”

소유가 잠든 태오의 볼에 입을 맞췄다.


“Happy new year, Noah.”

1월 1일.

한 해가 지나가고 새로운 해가 왔다.

태오와 보내는 첫 새해이기도 했다.


“나도.”

그때, 불쑥 눈을 뜬 태오가 소유를 세게 끌어안았다. 깜짝 놀란 소유가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태오가 소유를 제 위에 앉히고 얼굴을 감싸 쥐었다.


“새해 복 많이 받자, 우리.”

복마저 둘이서 같이 받자는 특이한 새해 인사였다.

소유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우리 벌써 서른이야. 앞자리가 바뀌었어.”

태오를 더 일찍 만났다면 더 찬란한 20대를 보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생겨났다.

소중한 20대 중 딱 1년, 스물아홉에 이르러서야 소유는 빛나는 청춘을 즐길 수 있었다.


“괜찮아. 넌 아직 10대 같아.”

생각이 많아진 소유를 달래 주려는 것인지 태오가 등을 토닥였다.


“거짓말. 나도 그 정도 양심은 있어.”

태오의 주접을 원천 봉쇄한 소유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너 없이 20대를 거의 다 흘려보낸 게 서러워.”

“남들은 20대가 인생에서 제일 빛나는 시절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30대가 제일 빛나는 시절일걸.”

그제야 태오는 소유가 원하는 대답을 내어주었다.

속 보이지만, 기다리던 대답을 듣자 소유의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우리는 이제 만났으니까.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태오답지 않은 로맨틱한 말이었다.

그래. 너도 새해엔 좀 로맨틱해야지.


“그리고 왠지 올해엔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길 것 같아.”

태오의 말에 소유가 격하게 동의했다.


“맞아. 나도 그런 생각 했어. 오늘따라 이상하게 기분이 좋더라니까?”

기다리던 소식이 마침내 들려올까.

부부는 들떴다.


“참, 우리 선물 풀어 보자!”

다시 진득한 시선을 쏘아 대며 저를 잡아먹으려는 태오에서 가까스로 도망친 소유는 가운을 걸쳤다.

아, 하마터면 넘어올 뻔했는데.

아쉬운 태오가 혀를 쯧 차고 있는 사이 소유는 어젯밤에 쌓아 둔 선물 상자들 앞으로 다가갔다.

태오와 와인을 마시고, 뜨거운 밤을 보내느라 다소 늦은 개봉식이 되었다.


“빨리. 이리 와!”

소유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태오도 가운을 걸치고 상자 앞으로 다가갔다.


“아빠가 주신 선물부터.”

아버지의 선물은 어린 소유의 사진이 담긴 예쁜 액자였다.

소유도 처음 보는 것으로 보아 아버지가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보물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이건 날 위한 선물 같은데?”

태오는 액자를 가져와 한 손에 잡힐 아기 소유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귀여워라. 눈앞에 있었다면 당장 깨물어 줬을 테다.

그러다 소유를 꼭 안은 소유의 어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장모님과는 초면이었다.


“우리 엄마 예쁘시지? 사실 나도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응. 그래서 네가 이렇게 예쁘구나.”

마치 지금의 소유라 해도 믿을 정도로 꼭 닮은 모습이었다.

소유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보던 태오는 액자를 세워 두고 대뜸 절을 올렸다.


“갑자기 뭐 하는 거야!”

덕분에 소유의 눈물은 쏙 들어갔다.


“감사하잖아. 이렇게 예쁜 딸 낳아 주셨는데. 절이라도 올려야지.”

“진짜 못 말려.”

소유는 태오를 툭 치고 다음 선물 상자를 풀었다.

도진의 선물이었다.


“와, 예쁘다.”

명품 구두가 담겨 있었다.

[좋은 구두를 신으면 좋은 곳으로 데려가 준대.]

도진다운 완벽한 쪽지까지.

맞춤인 듯 편한 구두를 신고 이리저리 걸어 보는 사이 태오는 새로운 상자를 뜯어보았다.


“이게 뭐지?”

그러다 옷이라기엔 너무 빈약한 천 쪼가리를 손가락에 걸고서 소유에게 물었다.

순간 소유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회사 직원 중 소유와 가장 친한 송승아 대리의 선물이었다.


‘남편분이랑 좋은 밤 보내세요.’

선물을 줄 때 의미심장한 말을 하기에 어리둥절했는데, 이래서였구나.


“이리 줘!”

급하게 달려온 소유는 망측한 그것을 등 뒤에 숨겼다.


“옷이야, 그거?”

알면서 묻는 건지, 정말 몰라서 묻는 건지, 태오의 질문은 의뭉스러웠다.


“스, 스카프야.”

“무슨 스카프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

태오가 긴 팔을 뻗어 소유의 등 뒤의 그것을 빼앗아 왔다.


“흠.”

야한 속옷을 이리저리 돌려 보던 태오가 말했다.


“이건 어젯밤에 먼저 풀어 봤어야 했는데.”

역시나 알고서 놀리는 것이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입어 봐.”

태오가 음흉하게 웃었다.


“아, 싫어.”

아침부터 이런 옷을 어떻게 입어!

소유가 고개를 세게 저었다.


“왜, 입어 봐. 선물이잖아.”

“싫어. 싫다고!”

태오가 도망 다니는 소유를 졸졸 따라다니며 속옷을 내밀었다.


“너랑 잘 어울릴 것 같아.”

“말도 안 돼, 무슨!”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입어 보면 알지.”

입으면 왠지 아침부터 곤란해질 것 같다.


“내 선물로 네 사심 채우려고 하지 마.”

단호한 소유의 말에 태오가 눈썹을 만지작댔다.

이래서 눈치 빠른 애들은 싫다니까.

시무룩하게 다음 선물을 열어 보는 태오를 보다가 소유가 슬쩍 말했다.


“밤에.”

“밤에, 뭐.”

그다음 선물은 비교적 평범한 화장품 세트였다.

다시 태오의 옆으로 다가온 소유가 그를 꼭 안았다.


“그건 밤에 입어 줄게.”

“…….”

“대신 지금은 안 돼.”

“진짜야?”

단순한 태오가 금방 눈을 반짝였다.

소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따가 아빠랑 밥도 먹어야 하니까.”

“약속했다, 너.”

“알았다고. 그러니까 삐지지 마.”

“뭐야. 나 막 삐지고 그런 남자 아니야.”

“방금 좀 삐졌던데?”

“아니거든.”

티격태격하면서도 동갑내기 부부는 그 많은 선물을 사이좋게 뜯어 보았다.

모든 선물이 고마웠고, 전부 되돌려주어야 할 사랑스러운 진심이었다.

소유는 풍족한 선물들을 보며 세상을 다 가진 듯 웃었다.

물론 그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노아 목걸이였다.

항상 끼고 있어야지.

잃어버리지 않게.


“됐고, 조식이나 먹으러 갈까?”

헤이즐 목걸이를 낀 태오가 물었다.

소유는 꼬르륵 소리가 나는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


“응. 나 지금 엄청 배고파.”

 

* * *

오랜만에 본 연옥의 모습은 사뭇 낯설었다.

매일 비싼 돈을 들여 관리받던 피부는 거칠어졌고, 부스스한 머리는 아무렇게나 묶여 있었다.

고작 몇 개월 사이에 폭삭 늙어 버린 것이다.

이전의 아름답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약해진 연옥의 모습을 보고도 소유는 덜컥 겁이 났다.

그녀가 이제 함부로 저를 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몸이 얼었다.

소유는 그런 스스로가 바보 같다고 느껴졌다.

그 순간, 태오가 소유의 손을 꽉 잡아 주었다.

괜찮다는 듯.

움츠러드는 게 너의 잘못이 아니라는 듯.


“넌 또 뭐니? 네 아비랑 번갈아 가면서 구경하러 왔니?”

예상에서 조금도 빗나가지 않은 연옥에게선 후회나 반성의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팔짱을 낀 채 거만하게 소유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유의 입에서 한숨과 웃음 그사이의 애매한 것이 새어 나왔다.

난 뭘 바라고 있었던 건지.


“어때? 그래서, 구경은 재밌어? 그럼 관람료로 사식이라도 넣어 주고 가지 그러니?”

사건의 내막을 알고 있는 교도관조차 경악스러운 눈으로 뻔뻔한 연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연옥은 거리낄 것이 없었다.

이젠 성미에 안 맞는 착한 척을 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마음껏 자신의 천한 본성을 드러냈다.


“더 이상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을게요.”

마침내 소유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내 어머니였던 적 없으니까.”

그 말에도 연옥은 그저 미동 없이 입꼬리만 끌어올릴 뿐이었다.


“그러렴. 너도 내 딸이었던 적 없으니까.”

소유는 준비한 말을 온전히 내뱉기 위해 힘을 짜내야 했다.

태오의 온기가 없었더라면 연옥의 냉기에 그대로 얼어 버렸을 테다.

태오와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소유가 말했다.


“언니가 사고를 당했어요.”

“……뭐?”

그제야 연옥에게 동요가 찾아왔다. 소유가 그 모습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애초에 연옥에게 딸은 다해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녀에게 사랑받기 위해 그토록 애쓰지 않았을 텐데.

나를 좀 예뻐해 달라, 애원하지도 않았을 텐데.

어린 날의 자신이 너무 가여웠다.


“교통사고예요.”

“교통사고? 어떤 놈이 그런 거니? 얼마나 다쳤어? 살아는 있니?”

“교통사고는 아빠도 당하셨는데. 그때랑은 다른 반응이네요.”

다른 사람의 교통사고는 고의로 냈던 대범한 여자가, 제 딸의 교통사고 소식에 마치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굴었다.

그 꼴이 조금 우습기도, 화가 나기도 했다.


“시끄럽고, 지금 다해 상태는 어때!”

연옥은 다 갈라진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소유는 그 끔찍한 모습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마주했다.


“당신이랑, 당신 딸 정말 많이 닮았어. 남의 목숨을 마음껏 주무르려고 하니까. 마치 신이라도 된 것처럼.”

“…….”

“뭐, 유일하게 다른 점은 정다해는 스스로의 목숨까지 바쳤다는 거지만.”

“그게 무슨 소리야?”

연옥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죽으려고 했어요, 재현이랑.”

“우, 우리 다해가?”

“네. 당신의 소중한 딸 정다해가.”

연옥은 무언가를 토해 내듯 구역질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 밖으로 삐져나오는 건 절규뿐이었다.


“죽었니?”

한참 후에 다 쉬어 버린 목소리가 그렇게 물었다.


“우리 다해, 죽었니?”

“…….”

소유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연옥이 털썩 무릎까지 꿇었다.

교도관이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소유야. 내가 다 잘못했다. 내가 너의 것을 모두 빼앗았고, 어린 너에게 몹쓸 짓을 했다. 정말 미안하다. 죽을죄를 지었다. 나는 지옥으로 굴러 떨어져도 싸.”

“…….”

“그러니까 제발 말해 주렴. 우리, 우리 다해 죽었니?”

“이제야 사과를 하시네요. 진심은 느껴지지 않지만.”

소유가 차갑게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릴 적에 아빠가 읽어 주신 동화책의 교훈은 모두 같았어요. 죄를 지은 자는 반드시 벌을 받게 되어 있다. 이게 당신의 벌이에요.”

사랑하는 딸이 자신이 저지른 악행과 똑같은 방법으로 무너진 것.


“달게 받으세요.”

“소유야!”

소유는 냉정하게 돌아섰다.


“소유야, 제발.”

그러다 문 바로 근처에서 잠시 걸음을 멈춰 섰다.


“살아는 있어요.”

어쩌면 ‘죽었다’라는 말보다 더 잔인한 말이었다.

그럼에도 연옥은 바닥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연옥의 감사 인사를 들으며 소유는 그곳을 떠났다.

태오는 경멸 가득한 눈으로 바닥을 뒹구는 연옥의 마지막 모습을 응시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단 한순간도 빼먹지 않고 역겨운 존재였다.


“우리 다해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번 다시 자신들의 앞에 나타나지 않길 바랐다.

만약 나타난다면, 소유가 발견하기 전에 제가 먼저 처리할 생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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