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임신은 처음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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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임신은 처음이라서
2022.11.07.
“임신 맞네요.”
“정말요?”
“네. 축하드려요.”
산부인과 의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소유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선명했던 두 줄이 꿈이 아니라는 걸 직접 확인받으니 그 감정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옆에 있던 태오가 말없이 소유의 손을 꽉 잡았다.
“초기엔 무조건 조심하셔야 하는 거 아시죠? 당분간은 너무 무리하시면 안 돼요. 그리고 입덧이 심하시니 약 처방해드릴게요.”
“아이는 건강한 거죠?”
“아기집은 제대로 자리 잡았는데, 그 후의 일은 부모들의 몫이죠. 엄마께서 적극적으로 본인 몸을 챙기셔야 해요.”
“네. 그럴게요.”
소유가 배에 손을 올려 보았다.
아직은 아무런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 좁은 곳에 태오와의 아이가 생겼다니.
신기하고 거룩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나를 처음 가졌을 때, 우리 엄마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이토록 벅차올랐을까.
이럴 때 엄마가 있었다면 이것저것 물어볼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래? 피곤해?”
모든 진료가 끝나고 나오는 길, 태오가 소유의 표정을 살폈다.
“아니. 너무 좋아서 피곤한 줄도 모르겠어.”
“그런데 표정이 안 좋아.”
앞으로 태오도 소유만큼이나 그녀의 몸에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태오가 소유의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소유의 어깨를 약하게 쥐었다.
결국 소유는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좋은데, 너무 좋은데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해.”
벌써부터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졌다.
이 작은 생명은 자신들에게 전부를 내맡기고 있다.
그런 아이가 힘들지 않도록 잘 해내야 할 텐데.
아는 게 없는 초보 부모라 덜컥 겁이 났다.
“임신은 처음이라서.”
태오에게도, 제게도.
이 모든 게 첫 경험이었다.
“물어볼 엄마라도 살아 계셨다면 좋을 텐데.”
“난 또 무슨 걱정인가 했네.”
처음을 향한 막연한 두려움은 태오도 마찬가지였지만,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볍게 말했다.
이제부터 소유는 아이를 품고, 힘든 여정을 시작할 가장 예민한 존재이다.
제가 옆에서 해 줄 수 있는 건 더 강해져서 불안해하는 소유를 달래 주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약한 티를 내지 않기로 했다.
“요즘 관련 책이 얼마나 많은데. 젊은 부부들 다 책으로 공부한다더라. 그게 어른들에게 듣는 것보다 더 정확할걸. 전문적이잖아.”
“하지만…….”
“나 똑똑하잖아. 내가 더 공부할게. 내가 장모님처럼 널 챙겨 줄게. 사실 예비 부모를 위한 강의도 있다기에 들어 보려고.”
“그런 건 또 언제 알아봤어.”
한없이 가라앉다가도 태오의 말에 결국엔 또 웃고 마는 소유였다.
소유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제 너 잘 때.”
낯선 사람들 사이에 멀뚱멀뚱 앉아 강의를 들을 태오의 모습을 상상하니 살짝 웃겼다.
아마 어울리지 않게 필기도 열심히 할 거야.
우리 태오는 나를 위해서라면 뭐든 하니까.
“그러니까 나만 믿어.”
“든든하네, 우리 태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태오와 함께라면 두려울 것도 없었다.
지금껏 태오와 많은 처음을 같이 해 왔으니.
여태까지 그랬듯 이번 처음도 별 탈 없이 잘 해낼 테다.
“밥은 어떻게 할까?”
태오가 조수석 문을 열어 주며 물었다.
“나 아직 속이 안 좋아서 그냥 가벼운 과일 먹고 싶어.”
“그래. 그럼 가는 길에 마트 들러서 사 가자.”
“그런데 넌 밥 먹어야지. 배고프잖아.”
소유의 얼굴엔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앞으로 이 입덧이 얼마나 이어질지 알 수 없는데 그때까지 태오도 덩달아 밥을 못 챙겨 먹을까 봐.
“아니야. 사실 나 다이어트 중이거든.”
태오가 또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했다.
아마 제 미안함을 읽은 모양이다.
“뭐래. 네가 살 뺄 데가 어디 있어. 근육밖에 없는 게.”
“자세히도 봤다, 너?”
“부부끼리 보면 좀 어때?”
제법 뻔뻔해진 소유가 당돌하게 되물었다.
그런 소유를 보며 픽 웃던 태오가 안전벨트를 매 주고서 소유의 입에 짧게 뽀뽀를 했다.
더 이상 사랑할 수도 없을 만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매일 조금씩 더 소유를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그녀와 얼굴을 맞대고 있자면 뽀뽀를 참을 수가 없어진다.
“네가 입맛 없으면 나도 없어.”
나지막하게 말한 태오가 문을 닫고서 보닛을 돌아 운전석으로 걸어왔다.
설레는 태오의 멘트에 소유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아마 난 노부부가 되어서도 너에게 설렐 거야.
“태명은 뭐로 하지?”
평소보다 조심스럽게 차를 몰던 태오가 불현듯 말했다.
소유가 운전에 집중한 태오의 섹시한 옆모습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사실 방금 즉흥적으로 떠오른 게 하나 있긴 한데.”
“뭔데?”
“태랑이.”
“태랑이?”
더 귀엽고 앙증맞은 태명을 기대하던 태오는 다소 기상이 굳센 태명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태랑이야? 무슨 의미야?”
“태오랑 호랑이처럼 강하게 자라라.”
마침 신호가 걸려 태오가 부드럽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별로 부드럽지 않았다.
“너랑 밤톨이는 왜 자꾸 호랑이 타령이야?”
“세상에서 제일 강한 동물이니까.”
오늘도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군.
고모와 조카만의 암호인 모양이다.
“성별이 아들이든, 딸이든 나처럼 약하진 않았으면 해서. 이왕이면 너처럼 강한 게 좋잖아. 싫어? 마음에 안 들어? 더 예쁜 이름으로 하고 싶어?”
“아니. 뜻은 좋네. 네가 마음에 든다면 그렇게 해. 네가 좋으면 나는 다 좋지, 뭐.”
“진짜? 그래. 그럼 앞으로 태랑이라고 한다.”
키득 웃은 소유가 배를 쓰다듬으며 아이에게 정식으로 인사했다.
“안녕, 태랑아. 앞으로 잘 부탁해. 우리 건강한 모습으로 10개월 뒤에 보자.”
인사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태오는 소유의 미래가 대충 예상되었다.
아마 하루 종일 재잘재잘 태랑이에게 인사를 건넬 테다.
상상만으로도 무척 사랑스러운 광경이라 절로 웃음이 나왔다.
“태오야, 초록 불.”
넋 놓고 소유를 보느라 하마터면 신호를 못 볼 뻔했던 태오가 소유의 다급한 말에 차를 출발시켰다.
태랑이. 태랑이.
몇 번 불러 보니 나름 귀엽네. 입에도 착 달라붙고.
마음에 든 태오에게서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그때, 소유의 휴대폰이 약하게 울렸다.
“어머니네.”
“우리 어머니?”
“그럼 우리한테 어머니가 더 있어?”
진 여사한테 벌써 말한 거야?
자신의 뒤에서 은근히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 소유와 서령이었다.
어째 태오는 두 여자 사이의 불청객이 된 듯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내가 어머니한테까지 질투를 해야 하나.
“네, 어머니.”
― 병원은 다녀왔니?
통화 내용을 공유하고 싶었던지 소유가 스피커폰을 켰다. 그러자 어머니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소유가 인사를 하라고 태오를 툭 쳤지만, 그는 못 들은 척 앞만 보고 운전했다.
무뚝뚝하기도 해라.
우리 태랑이는 엄마한테 안 저랬으면 좋겠는데.
결국 소유는 어쩔 수 없이 홀로 어머니와의 대화를 이어 나갔다.
“네. 임신 맞대요, 어머니.”
― …….
잠시 수화기 너머로 대답이 없었다.
통신 상태가 안 좋은가, 싶어 휴대폰을 확인해 보지만 특별한 문제는 없어 보였다.
“어머니?”
그 순간 수화기 너머로 쿠당탕탕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 괜찮으세요? 넘어지셨어요?”
소유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제야 태오도 어머니와의 통화에 관심을 기울였다.
― 아니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단다.
“네. 어머니, 그런데 혹시…… 우세요?”
소유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은 했지만, 서령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고, 훌쩍거리는 소리도 약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 울긴 누가 울어. 얘도 참.
하지만 차가운 말과 달리 그녀는 분명 울고 있었다.
태오도 놀란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철의 여인이 손주 소식에 울음을 터뜨릴 줄이야.
― 혹시 지내면서 모르는 게 있거든 언제든 물어보렴.
울음을 그쳤던 소유도 시어머니를 따라 도로 훌쩍였다.
― 아이는 한 명밖에 안 낳아서 큰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아는 한에선 모두 대답해 줄게.
“네. 감사합니다.”
열심히 공부를 하겠다는 남편과, 아는 한에선 모두 대답해 주겠다는 시어머니가 있는데 뭐가 걱정일까, 싶다.
아까의 기우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 입덧은 어떻니?
“심해요.”
소유가 솔직하게 어리광을 부렸다.
― 잘 먹어야 하는데. 내일 집으로 입덧에 좋은 음식 보내마.
“감사합니다.”
― 마음 굳게 먹어. 생각보다 힘든 과정일지도 모르니.
“네.”
잠시 숨을 들이켜던 서령은 낯간지럽지만, 진심이 담긴 말을 털어놓았다.
― 아이도 중요하지만 언제나 너를 우선으로 뒀으면 한다.
시어머니에게 들을 수 있는 최고 따뜻한 말이었다.
― 우리에겐 네가 가장 중요하니까.
“네. 명심할게요. 나중에 남편이랑 한번 뵈러 갈게요.”
― 그래. 몸 상태 좀 괜찮아지면 언제든 놀러 오렴.
이제 소유에게 시댁은 더 이상 지옥이 아니었다.
기댈 수 있는 따스한 집이었다.
* * *
아버지와 도진에게 소식을 알렸더니 바로 집으로 찾아왔다.
딸의 손을 꼭 잡고 있던 아버지가 낡고 작은 수첩을 하나 내밀었다.
“이거 너한테 주려고 계속 가지고 있었어.”
“이게 뭐예요?”
“네 육아 수첩이야. 엄마가 정말 꼼꼼하게 기록했으니, 도움이 될 거다.”
소유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엄마의 육아 수첩을 받아들었다.
소유의 초음파 사진과, 생전 엄마의 글씨체까지…… 모두 애틋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소유의 존재를 처음 알았던 날, 소유의 심장 소리를 처음 들었던 날, 소유의 태동을 처음 느꼈던 날.
모든 과정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수첩을 넘기며 소유는 가슴께에 뜨거운 무언가가 쫙 퍼지는 것을 느꼈다.
“나 입덧 심한 거, 엄마 닮아서 그렇구나.”
“그래. 네 엄마도 입덧을 너무 많이 해서 걱정이었어.”
“엄마는 나를 정말 많이 사랑했나 봐요.”
“당연하지. 네 존재를 안 순간부터 너를, 어쩌면 나보다 더 사랑했을지 모르지.”
희훈이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소유를 닮은 여인을 떠올렸다.
아마 이 자리에 있었다면 가장 기뻐하는 이가 아니었을까.
“이토록 작던 네가, 언제 이렇게 커서 임신을 했는지.”
희훈이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딸을 꽉 끌어안았다. 그러자 도진이랑 놀던 훈이 쪼르르 달려와 고사리 같은 손으로 고모의 등을 토닥였다.
도진이 훈이를 번쩍 안아 들고 차근차근 설명했다.
“고모 배 속에 훈이 동생 있어.”
“내 동생?”
훈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소유의 배를 바라보았다.
“동생 나오면 잘해 줄 거지?”
“웅! 좋은 형아가 될 거야.”
형과 함께 자라 ‘형아’가 세상에서 제일 멋진 말인 줄 아는 훈이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런데 동생은 언제 나와? 열 밤 지나면 나와?”
“아니. 이백 밤은 훨씬 넘어야 나와.”
“흠.”
아무래도 어린아이에겐 너무나 긴 시간인 모양이다.
“왜 그렇게 늦게 나와? 더 빨리 나오라고 해!”
“더 빨리 나오면 아기 ‘아야’ 해서 안 돼.”
“‘아야’ 하면 안 되지.”
“그렇지?”
귀여운 훈이에게 사탕을 쥐여 주고서 태오는 소유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소유의 초음파 사진을 빤히 바라보다가 태랑이의 초음파 사진을 바라보았다.
태아 때부터 예쁜 내 새끼들.
태오가 숨이 다 하는 날까지 지켜야 할 소중한 존재들이자, 태오의 전부였다.
“강 서방은 초음파 사진만 봐도 좋나 봐요.”
도진이 놀리듯 희훈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땐 다 그렇지. 보이지도 않는 사진 보면서 좋아 죽으려고 하고.”
“내 애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줄 알고.”
이미 먼저 아버지가 되어 본 희훈과 도진은 현재 태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첫 아이니까.
첫 아이는 유독 특별하기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