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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야하고 해로운 (65/95)


65. 야하고 해로운
2022.11.11.



 
소유는 서령과 백화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아직 성별도 모르고, 출산일까지 까마득하지만, 손주의 선물을 해 주고 싶다고 했다.

그 성급함이 그녀가 얼마나 태랑이를 기다리고 있는지 보여 주었다. 그래서 소유는 덩달아 기쁜 마음으로 서령을 기다렸다.

눈에 들어오는 아기 옷 몇 벌을 구경하고 있는데,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이미 쇼핑을 끝낸 듯 쇼핑백을 들고 있는 세리가 보였다.

잠시 잊고 있던 존재였는데, 얼굴을 보니 안 좋았던 기억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오랜만이에요.”

세리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아…… 아는 언니가 임신을 해서.”

그러곤 묻지도 않은 방문 목적을 밝히며 쇼핑백을 흔들었다.


“얘기는 들었어요. 정소유 씨도 임신하셨다고.”

“…….”

“참, 여러모로 대단한 거 같아요. 그 사이코 옆에서 버티는 걸 보니 같은 종류의 사람인가, 싶기도 하고.”

잔뜩 비꼰 목소리에 백화점 직원들도 그녀들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뭐, 어쨌든 잘살아요. 난 이제 그 집안에 미련 한 톨 없으니.”

한쪽 입꼬리를 매끄럽게 올린 세리가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멀어졌다.

독한 향수 냄새가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잠깐만요.”

하지만 소유는 애써 참아 내고서 세리를 불러세웠다.


“사과하세요. 그때, 태오에 대해서 나쁜 말 한 거.”

“뭐?”

그나마 있던 예의마저 던져 버린 세리가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날카롭게 되물었다.

소유는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원래도 세리는 소유보다 키가 컸다. 거기다 오늘 세리는 하이힐을, 소유는 단화를 신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극명하게 키 차이가 났다.

세리가 잔뜩 거만한 표정으로 소유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소유도 밀리지 않고 그녀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때, 임세리 씨가 한 말은 정말, 정말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어요.”

아무리 화가 나도 해야 할 말, 안 해야 할 말을 구분해야 하는 법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교육을 받는 거니까.


‘나중에 네가 강태오 손에 죽으면 조문은 가 줄게.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세리가 던진 그 말은 도저히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태오에게는 티를 내지 않고 버텨 보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말은 깊이 박혀 상처를 만들어 냈다.

그러니 꼭 사과를 받아야겠다.

아이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높은 학력을 자랑처럼 떠들어 대시면서, 부끄럽지도 않으시나요?”

“뭐야? 너 지금 감히 누구한테 훈계질이야?”

제가 내뱉은 말에 비하면 해수욕장의 모래 한 알에 불과한 사소한 말이건만, 세리는 불같이 화를 냈다.

그 역설적인 태도에 소유에게서 드문 비웃음이 나왔다.


“누누이 말하지만 네가 강태오에 대해서 모르니까…….”

“알아요, 태오의 진짜 모습. 이제는 알아요.”

“그런데도…….”

“당신 말대로 때론 잔인하고 때론 위험할 때도 있죠.”

그럼에도 소유는 변함없이 태오를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당신의 발언에 정당성을 부여하진 못해요.”

“얘 진짜 웃기네.”

“그리고 임세리 씨가 용서 못 받을 짓을 했겠죠.”

“뭐?”

“우리 태오는, 아무에게나 잔인하고 위험하지 않으니까.”

처음 소유를 만났을 때 그저 세상 물정 모르고 나약한 여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서 보니 그녀도 겉모습과 달리 꽤나 강한 사람이었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데 그동안 감추고 살았는지, 아니면 태오와 살며 덩달아 강해졌는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확실한 건 처음처럼 소유를 막 대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강태오는…….”

“형수님.”

세리가 무어라 말을 하려던 순간,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강화 백화점의 실질적 운영을 맡고 있는 강준오 이사였다.


“역시나 계셨네요.”

준오는 세리는 본 척 만 척하고, 소유에게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어머니랑 쇼핑 오신다고 해서 내려와 봤어요. 임신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소유를 보며 따뜻하게 웃던 준오는 그제야 세리를 바라보았다.

준오의 표정은 사뭇 달라져 차갑게 굳어 있었다.

태오와 형제가 되며 세리와도 친분이 있었지만, 친근함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강준오. 많이 컸네. 누나 보고 인사도 안 하고?”

“형수님. 임세리한테는 당연한 것도 바라지 않는 편이 좋아요. 가진 게 돈이랑 자존심뿐이라.”

“야, 강준오!”

세리가 고함을 쳤다.

그러나 준오는 대꾸도 하지 않고 소유에게 다시 말했다.


“그리고 사과는 받을 필요 없어요. 얼마 전에 어머니한테 머리채를 세게 잡혔거든요.”

“네? 어머니한테요?”

듣고도 믿기지 않는 상황에 소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상한 서령이 세리의 머리채를 잡는 장면.

아무리 노력해도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마치 미지의 세계처럼.


“네. 쫓겨나는 꼴이 어찌나 추했는지 그 일대에 소문이 자자해요.”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를 여자한테서 태어난 X끼가.”

세리가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너, 회장님이 아들 취급해 주니까 네가 강태오라도 된 줄 알지? 주제도 모르고…….”

“조용히 해. 손님들 쇼핑하는 데 방해되니까.”

준오가 나지막하게 세리에게 명령했다. 소유도 처음 보는 순한 준오의 반전이었다.

그 살벌한 시선에서, 묘하게 태오가 겹쳐 보였다.

강 씨 집안의 유전자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회장님 아니었으면 지금쯤 내 발밑에서 빌빌 기고 있을 천한 놈이.”

“말로는 안 통하네.”

준오가 팔을 들었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경호 요원이 달려왔다.


“이 여자, 진상이니까 내쫓으세요.”

“네. 알겠습니다.”

“놔! 내가 누군 줄 몰라? 나 클로버 그룹 임세리야.”

“따라오십시오.”

“너 이름 뭐야? 내가 너 죽여 버릴 거야.”

세리의 진정한 수모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행패를 부리며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는 모습이 사람들 휴대폰에 녹화되었으니까.

그것은 며칠 후 ‘재벌의 갑질’로 미디어를 탔다.


“이게 웬 소란이니?”

약속 시간에 딱 맞춰 도착한 서령이 끌려 나가는 세리를 보다가 소유에게로 다가왔다.


“저 계집애가 또 너한테 뭐라고 했니?”

서령이 심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준오는 어머니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그냥 싸웠어요. 하마터면 질 뻔했는데, 도련님이 도와줬어요.”

딱히 지고 있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소유는 준오를 추켜세우며 빙긋 웃었다.


“도련님이 아니었으면 전 아마 아주 우스운 꼴을 당했을 거예요.”

“……얘가?”

서령이 아주 드물게 준오와 눈을 마주쳤다.

무어라 말을 하진 않았지만, 준오는 서령의 시선이 예전과 달라졌음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런 형수님을 존경하지 않을 수가.

이런 형수님을 따르지 않을 수가.


“당연히 그래야지. 아무리 사이 나쁜 형제라도, 형수님이 당하는데 가만히 보고 있으면 안 되지.”

서령이 ‘아차’ 하고 다시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준오는 그것만으로도 정말 고마웠다.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며, 서령에게 사랑받는 걸을 포기하라던 선오가 보면 놀랄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소유가 준오에게만 보이게끔 따뜻하게 웃었다.


“그럼 이만 가자. 온 김에 네 옷도 좀 사고. 요즘 임산부 옷도 예쁘게 나왔더라.”

“네.”

준오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그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젠 제법 사이가 좋은 고부지간이었다.

그런데 그때.


“너도 안 바쁘면.”

불현듯 서령이 뒤로 돌았다.


 


“따라오겠니? 짐꾼이 필요하구나.”

준오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짐을 들어 줄 사람이야 많다는 걸, 준오도 알고 있었다.

방금 그 퉁명스러운 말은, 서령이 제게 아주 조금은 마음을 열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소중한 며느리와의 시간에 저를 끼워 줬으니까.


“배고프면 이따 밥도 같이 먹고 가든지.”

 

* * *

태오가 퇴근을 하고 돌아왔을 때, 소유는 고단한지 잠이 들어 있었다.

어디서 났는지 모를 정체 모를 아기호랑이 쿠션을 베고서.

쿠션에 눌려 주욱 밀려 올라간 소유의 볼살을 보고 있자니 픽 웃음이 나왔다.

뽀뽀를 무자비하게 퍼부어 대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아 낸 태오가 드레스룸으로 가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외부의 먼지를 깔끔하게 씻어 내기 위해 샤워를 했다.

머리를 털며 욕실에서 나왔을 때, 소유는 부스스하게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언제 왔어?”

“방금. 많이 피곤했나 봐. 나 오는 것도 모르고 자더라.”

“아니. 그냥 좀 졸려서 쪽잠 잤어. 도련님이 무거운 건 다 들어 주셔서 쇼핑은 편했거든.”

“강준오도 같이 있었어?”

강화 백화점으로 간다고 했을 때부터 어쩐지 불안하더니.


“그런데 이 쿠션은 뭐야?”

“아, 이거? 귀엽지?”

소유가 폭신폭신한 아기 호랑이 쿠션을 흔들며 자랑했다.

본인이 더 귀여울 거란 생각은 하지도 못하는 듯했다.


“도련님이 태명 듣고 사 주셨어.”

“자기 닮아서 못생긴 것만 사 줬네.”

“우리 태랑이한테 왜 그래.”

소유가 쿠션을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그러자 샘이 난 태오가 쿠션을 치워 버리고 그 자리에 제가 쏙 들어갔다.

다소 좁긴 했지만.

그런 태오가 너무 귀여운 나머지 소유가 끙끙 앓았다.


“그리고 나 열 달 동안 옷 걱정은 없을 것 같아.”

“왜?”

“도련님이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주세요.’ 하고 필살기를 썼거든. 그래서 옷이 엄청 많아졌어. 나 그런 거 드라마에서만 봤는데. 재벌은 재벌이다, 싶더라니까?”

“너 그런 거 좋아했어? 말을 하지. 난 매일 해 줄 수 있어. 아니다. 지금 당장 백화점으로 가자.”

정말 무서운 소리를 한다.

태오가 하는 말은 반쯤은 진심이라 더 그랬다.


“그런 말이 아니라 어머니랑 도련님이 정말 잘해 주셨다고. 요즘 사랑받는 기분을 만끽하느라 하루하루가 바빠.”

“너 말 서운하게 한다? 전부터 내가 계속 사랑해 주고 있었잖아.”

“너한테 받는 사랑이랑 가족들한테 받는 사랑은 다르지.”

너에게 받는 사랑은 이제 내 신체의 일부처럼 당연한 거지.

가족들에게 받는 사랑은 부가적인 것이라 자랑하고 싶은 거고.


“참. 도련님이 커플로 입으라고 잠옷도 사 주셨어! 세탁소에 맡겨 뒀으니까 내일부터 입자.”

“강준오 얘기 그만해. 관심 없어.”

“왜. 도련님은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구르던데.”

“웃기네.”

속마음을 드러내기 꺼리는 이런 모습조차 서령과 태오는 닮았다. 사실 그다지 싫은 건 아니면서.

태오는 소유를 끌어안은 채 침대에 함께 누웠다.


“얼굴 좀 보자. 하루 종일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태랑이도 안녕.”

태오의 커다란 손이 배를 감쌌다.

소유는 태오를 끌어당겨 진하게 키스를 했다.

부부의 침실엔 한동안 끈적한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무아지경으로 소유를 헤집다가 태오가 나른하게 눈을 떴다.


“내가 전에도 말했지. 못 하는 날은 건들지 말라고.”

아이가 생긴 건 정말 기쁘지만, 의도치 않은 금욕 생활이 시작되어 태오는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너 무리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고.”

“그래? 그럼 10개월 동안 키스도 못 해?”

“그런 건 아니지만…….”

소유가 태오를 조련하듯 다시 입을 맞췄다.

태오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10개월 동안 아무것도 못 하는 건, 나한테도 힘든 일인데?”

오늘따라 소유가 유독 야해 보였다.

소유의 야함과 비례하듯 태오의 괴로움은 위로 치솟았다.

해롭고 해로워라.


“방법은 많아, 태오야.”

“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있어?”

몹시 위험한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나도 이제 서른이야. 가끔 너는 내가 아직도 10대인 줄 아는 것 같아.”

그래봤자 동갑인 주제에.

소유가 태오의 가운 속으로 팔을 뻗어 그의 근육을 쓰다듬었다.

좋다, 내 남편.

근육도, 향기도, 호흡도.


“그동안 잘 참아 왔으니까 상 줄게.”

“너 누구야. 정소유 아니지.”

아무리 봐도 여우에게 잡아 먹힌 소유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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