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누군가의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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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누군가의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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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누군가의 엄마
2022.11.21.
“아빠 다녀가셨나 보다.”
소유는 깔끔하게 닦인 엄마의 공간을 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태오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듯 끌어안았다.
오늘은 태오의 장모의 기일이었다. 봄이 오기도 전인 차가운 계절, 소유의 어머니는 잠들 듯 눈을 감으셨다.
“장인어른도 우리랑 같이 오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
슬픈 순간도 함께할 수 있는 가족이 되고 싶었다.
“싫으시대.”
하지만 곧이어 들려온 말에 태오는 고개를 돌렸다.
“오늘만큼은 엄마랑 단둘이 보내고 싶으시대. 사실은 내게 우는 모습을 보여 주기 싫으신 건지도 몰라.”
태오는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날, 장인어른은 아마 수도 없이 무너질 것이다. 그 나약한 모습을 딸과 사위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으리라.
자신이었어도 그랬을 테니까. 사회적 체면을 모두 던져 두고 아이처럼 서글피 우는 모습을 자식에게까지 보여 주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넌 어때?”
먹먹해진 감정을 애써 내리누르고 태오가 물었다.
“아빠의 슬픔에서 딱 한 움큼 덜어 낸 것만큼 슬퍼.”
소유가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태오는 시선을 돌려 소유가 어릴 적 접었을 서툰 종이꽃을 응시했다.
엄마 사랑해요. 그 아래 삐뚠 글씨체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애틋했다.
그러다 용기를 내어 장모님의 사진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살면서 한 번도 만나지 못했고, 앞으로도 절대 만나지 못할 존재였다.
아무리 모든 것을 다 가진 태오였어도, 그것만큼은 어쩌지 못했다.
“아름다우시네.”
사진 속 장모님은 소유와 똑 닮아 있었다.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두 사람이 모녀지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뽀얀 피부와 둥그스름한 눈매, 봄 같은 미소.
현재 감옥에서 죗값을 치르고 있는 추악한 누군가와는 비교도 하지 못할 정도로 찬란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네가 이렇게 예쁜가 봐.”
소유가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이 순간,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참 할 말이 많았을 텐데. 사랑하는 나의 남편과 소중한 우리의 아이에 대해 쉴 새 없이 재잘댈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축하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아빠는 내게 엄마가 필요할 것 같았대.”
소유는 얼마 전 아버지가 힘겹게 털어놓은 진심을 태오에게도 전해 주었다.
“그때 난 너무 어렸고, 매일 울었대. 그러다 내가 정말 죽어 버릴 것만 같았대. 웃음을 잃었고, 표정이 사라졌대.”
그런 딸을 보며 아버지는 속이 타들어 갔겠지. 남은 딸마저 아내처럼 잃을까 봐 두려웠겠지.
“나 때문에 서둘러 재혼을 하신 건지도 몰라.”
제가 만난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도 파악할 새도 없이. 제가 얼마나 정교한 연극에 속고 있는지도 모른 채. 제가 빠지게 될 함정이 끝도 없는 구렁텅이인지도 짐작하지 못하고.
“내가 아니었으면 아빠도 공연옥 그 여자를 만날 일이 없으셨을까.”
태오는 대답 없이 소유에게로 팔을 뻗었다. 그러곤 얼굴을 가리고 있는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눈물범벅인 얼굴이 오롯이 드러났다.
“잘 들어.”
태오의 정확한 발음이 납골당에 퍼져나갔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어. 그건 큰일이야. 누구에게나 시간은 필요해. 너에게도 극복할 시간이 필요했던 거야. 그런데 그게 어떻게 네 탓이야?”
“…….”
“그때의 넌,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어. 이겨 내려 했고, 버텼어. 그건 장인어른도 마찬가지야. 그 당시에 장인어른이 하실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거야. 그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물론 그로 인해 모든 비극은 시작되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상실에 허덕이던 자들의 책임은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은 공연옥 그 여자가 한 거야.”
여태까지 들어 왔던 그 어떤 위로의 말보다도 소유의 다친 마음을 어루만졌다. 소유가 쓰러지듯 태오에게로 안겨들었다.
태오가 소유의 등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아마 장모님이 살아 계셨다면 우리는 영영 못 만났을 수도 있겠지? 나의 구원 따위 필요 없는 행복한 삶을 살았겠지, 넌?”
소유는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랑을 모두 받으며 밝게 자라났을지도 모른다. 냉정하고 잔혹한 제 손 같은 거, 잡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녀는 다른 불행한 이의 손을 잡아 구원해 줬을지도 모른다. 특유의 따뜻한 에너지로.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내 목숨이라도 바쳐서 장모님을 네 옆에 모셔 오고 싶어.”
“그럼 넌? 네가 이 세상에 없잖아.”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아. 네가 행복하면 됐어.”
소유가 태오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태오를 올려다보았다.
“그만큼 너를 사랑해.”
소유는 대꾸 없이 사진 속 어머니와 눈을 마주쳤다. 잠시 후 그녀가 푸념하듯 중얼거렸다.
“엄마 봤지? 얜 가끔 이렇게 바보처럼 굴어요.”
환영인 것은 알지만 사진 속 어머니가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인 것만 같았다.
“자기가 없는데 어떻게 내가 행복해. 맞죠?”
소유가 아프지 않게 태오를 툭 치다가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툭 떨어뜨렸다.
“네가 없으면 태랑이가 없고, 그건 즉, 나도 없다는 거야. 더 이상 네가 없는 삶은 의미가 없다고.”
“…….”
“난 돌아가신 엄마가 살아 돌아오시길 바라는 헛된 희망을 품을 나이가 아니야.”
엄마 미안해. 그렇게 말하면서도 소유는 속으로 어머니에게 사과를 했다.
“난 이제 너와 곧 태어날 태랑이가 제일 중요해.”
누군가의 딸로 태어나 누군가의 엄마가 되는 과정 안에 있는 오늘, 소유는 조금 더 단단해졌다. 보통 엄마들이 그렇듯이.
“그러니까 빈말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 가슴이 철렁해.”
“소유야.”
“어떻게서든 살아, 나랑. 태랑이가 부모의 도움이 필요 없어질 때까지 악착같이 함께 살아.”
어쩐지 소유의 그 말이 감동스러웠다. 첫 만남의 무력했던 모습과 대조되어 더욱 그랬다.
“약속했잖아. 태랑이는 우리와 달리 결핍 없이 키우겠다고.”
태오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방금 그 말은, 그냥 네가 날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표현하기 위한 비유라고 생각할게.”
“…….”
“그리고 잊을게.”
단호하게 말한 소유는 먼저 자리를 떴다. 와이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태오는 벅찬 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새로 앉으려는 먼지를 손가락으로 덜어 냈다. 평생 더러운 것이라고는 만져 본 적 없던 고결한 손으로.
손이 더러워지는 것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음엔 셋이서 올게요.”
태오가 아직은 어색한 장모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땐 조금 더 밝게, 떠들썩하게 있다가 갈게요.”
태오가 장모의 사진 앞에 태랑이의 초음파 사진을 정성스럽게 내려놓았다.
“예쁜 딸 낳아 주셔서, 그리고 저처럼 짐승 같은 놈한테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디도 떠나지 않고 평생 행복하게 살게요.”
그건 장모와 사위만의 비밀스러운 약속이었다.
“저 이제는 압니다. 장인어른이 그토록 사랑했던 영화 속 ‘Hazel’이 장모님이라는 거.”
장인어른이 사랑했던 헤이즐, 태오가 사랑하는 헤이즐. 과거와 현재의 헤이즐은 어김없이 아름다웠다.
“소유는 제가 반드시 지킬게요.”
현재의 노아가 과거의 헤이즐에게.
“편히 쉬세요.”
그렇게 약속했다.
* * *
선오는 과로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진통제를 먹어도 가시지 않는 것이, 아무래도 크게 아플 것을 예고하는 것만 같았다.
“도착했습니다.”
그 순간 차는 본가에 멈춰 섰고, 선오의 상태를 바로 알아본 비서가 말했다.
“그런데 몸이 안 좋으신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아버지만 잠깐 만나고 바로 집으로 가서 쉬어야겠어.”
“네. 바로 출발할 수 있게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오늘 선오는 강화 전자 해외 생산 공장 이전 건을 담판 지으러 왔다.
선오가 뜨거운 호흡을 느끼며 차에서 내렸다. 스산한 바람이 뼈 틈으로 파고들었다. 여러모로 힘겨운 하루가 될 것이라는 걸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다.
모든 육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니까.
빠르게 걸음을 옮기려는데 누군가가 세게 선오의 팔을 붙잡았다.
선오가 미간을 팍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가뜩이나 컨디션도 안 좋은데.
그곳엔 키가 작은 한 가녀린 중년 여성이 서 있었다. 가로등이 수명을 다한 듯 깜박거려 여성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뭐야?”
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알 바는 아니니.
선오가 가뿐하게 자신을 붙잡은 손을 내쳤다. 그대로 무시하고 또 앞을 향해 나아가지만, 성가신 손은 끈질기게도 선오를 잡았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선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자, 잠깐만. 잠깐만.”
“아줌마, 제정신이야? 감히 누굴 붙잡아?”
“너…… 선오 맞니?”
선오가 다시 한번 여자를 매정하게 뿌리쳤다. 단, 아까보다는 살짝 더 힘이 들어가 여자의 몸이 휘청였다.
“또 잡으면 죽여 버릴 줄 알아.”
“선오니, 준오니?”
제 이름에 이어 준오의 이름까지 나오자 선오가 멈칫했다.
“……아줌마 누구야?”
“선오구나.”
“묻잖아. 아줌마 누구냐고!”
선오의 고함에 차에 있던 비서와 기사가 황급히 내렸다.
“이사님, 무슨 일이십니까?”
“재수가 없으려니까. 이 미친 아줌마 좀 떼어 놔.”
“네. 알겠습니다.”
비서와 기사가 합심해 중년 여성을 떼어 내려고 했다. 그러자 중년 여성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선오야. 엄마야!”
“……뭐?”
“엄마야, 엄마.”
“아줌마, 술 취했어?”
그때 깜박거리는 불이 팍 밝아지더니 중년 여성의 얼굴이 정면으로 시야에 들어왔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선오는 강렬한 자극을 받았다. 그건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차원의 것처럼 낯선 생소한 느낌이었다.
“선오야. 내 아들.”
중년 여성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선오가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선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웬 소란이냐?”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 소란을 듣고 강 회장과 진 여사가 대문 밖으로 나왔다.
선오는 눈을 질끈 감고서 목을 가다듬었다.
“지나가던 취객입니다.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세요.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하지만 강 회장과 진 여사도 단박에 중년 여성을 알아보았다. 선오가 초조하게 진 여사의 얼굴을 응시했다. 진 여사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들어가세요, 어머니.”
선오가 ‘어머니’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에 중년 여성이 털썩 주저앉았다.
“형한테 무슨 일 있어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뒤늦게 준오까지 나타났다. 동시에 중년 여성이 짐승처럼 흉하게 울부짖었다.
“……준오야. 잘 컸구나.”
“…….”
준오가 커진 눈으로 중년 여성을 바라보았다. 선오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방금 전 자신이 중년 여성을 보며 느꼈던 감정을 동생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쫓아내세요. 우리 가족들 눈에서 안 보이는 곳으로.”
선오는 기사와 비서에게 지시했다. 기사와 비서는 선뜻 나서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어찌 되었든 선오의 생모였기 때문이다.
“내 말 안 들립니까?”
결국 선오가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기사와 비서가 여자의 팔을 한쪽씩 잡고 멀어지기 시작했다.
“잠깐만.”
“준오야.”
“안 돼, 엄마!”
준오가 강 회장과 진 여사를 단숨에 지나쳐 달려 나왔다. 그런 준오를 보는 강 회장의 얼굴이 묘했다.
“엄마. 가지 마요, 엄마!”
준오가 어린아이처럼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의 형인 선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놔, 형. 엄마잖아. 형도 알아봤잖아.”
“그만해.”
“우리 엄마라고!”
선오는 준오의 멱살을 잡고 벽으로 세게 밀었다. 타인에겐 늘 가시를 세우는 선오였지만, 놀랍게도 준오에게만큼은 그토록 난폭하게 군 적이 없었다.
“난 못 봤어.”
“형.”
“그냥 술 취한 여자였을 뿐이야.”
형제가 대립하듯 서로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어머니 아버지가 보고 계시잖아. 저런 취객 때문에 인생 말아먹는 정신 나간 짓은 하지 마.”
여태까지 우리가 어떻게 버텨 왔는데. 지금 우리가 가진 건 우리의 몫이야. 이 거지 같은 집안에서 버티면서 받아 낸 정당한 대가라고.
“끝까지 그저 강태오의 소모품으로 남고 싶어?”
“강선오.”
“난 싫거든. 그러니까 진정하고 눈물 닦아.”
읊조리는 선오의 말을 듣던 진 여사가 뒤로 돌아 천천히 걸었다. 그녀는 말없이 귀걸이를 만지작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