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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예쁜 짓 (69/95)


69. 예쁜 짓
2022.11.25.



 
예정되어 있던 일은 결국 언젠가는 터지고 만다. 언제까지 티 나지 않게 곪는지 그 기간의 차이만 있을 뿐.

지금도 그랬다.

강화 가(家)에선 말해서는 안 될 금기와도 같지만, 그래서 모두가 필사적으로 모른 척하며 살아왔지만, 마침내 대면하게 된 오늘의 일처럼 일은 결국 일어난다.

급하게 도망쳐 나온 듯 짝짝이 신발을 신은 중년 여성이 선오의 기사와 비서에 의해 길 한복판에 내쳐졌다. 덕분에 안 그래도 생채기 가득한 발에 새로운 상처가 생겼다.

소유가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중년 여성을 돕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태오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소유는 심각한 시아버지와 도련님들의 상태를 보고 가만히 걸음을 멈췄다. 여기선 자신이 나설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잠시 후, 중년 여성은 까만 차에 태워져 사라졌다. 마지막까지도 중년 여성의 시선은 몇십 년 만에 만난 두 아들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원래도 그리 화목하지 않은 집안에 끔찍한 적막이 흘렀다.


“다쳤잖아요.”

그러다 소유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소유가 가리킨 곳엔 피가 맺힌 선오의 주먹이 있었다. 아까 전 준오와 실랑이를 하다가 생긴 상처였다.

준오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기고서 테라스로 사라졌다. 소유는 약상자를 가져와 선오의 옆에 앉았다.


“내가 할게.”

그 순간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태오가 불쑥 말했다. 소유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오는 면봉에 연고를 덜고 선오의 손을 잡아끌고 왔다.


“뭐 하는 짓이야, 놔.”

“나도 좋아서 하는 거 아니야. 내 와이프가 네 놈이랑 손잡는 꼴 보기 싫어서 그런다.”

두 사람은 평소와 다름없이 서로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댔다. 하지만 참 기묘하게도 선오의 다친 부위는 잘 치료되고 있었다.

선오에겐 처음이 아니었을까. 이 집에 들어온 이후, 누군가가 제 상처를 알아주고 치료해 준 게.

성의 없는 태오의 손길에서 왠지 모를 먹먹함이 느껴져서, 틱틱 대는 선오의 표정에서 왠지 모를 설움이 느껴져서, 소유는 조용히 물러났다.

그러곤 시어머니인 서령이 있는 안방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렴.”

서령은 화려한 귀걸이를 빼 화장대 뒤에 내려놓았다.


“미안하다. 오늘 사부인 기일이라 맛있는 저녁 대접해드리고 싶었는데, 못난 모습만 보였네.”

소유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어머니는 괜찮으세요?”

“괜찮지, 그럼. 나랑 관련된 일도 아닌걸.”

그렇게 말하는 서령도 분명 평소와 달랐다.


“끈기 하나는 인정한다. 그 어마어마한 감시를 뚫고 또 이곳까지 탈출해 온 게.”

“네?”

“처음은 아니란다. 몇 번이고 찾아왔단다. 그때마다 오늘처럼 험한 꼴로 쫓겨났지만.”

소유는 해야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왜? 내가 매정하니? 자식 한번 보겠다는 어미를 무시한 게?”

“네? 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아니. 난 매정해. 친모의 존재를 철저히 숨기면서, 그 아이들에겐 곁 한 뼘 내어주지 않았지. 내겐 태오만이 중요했어.”

눈물이 나오려는 걸 꾹 참은 소유가 서령에게로 다가가 손을 꼭 잡았다.


“소유야.”

“네, 어머니.”

“엄마란 뭘까. 우린 자식을 위해서 무엇까지 할 수 있을까.”

“…….”

서령이 반대편 손으로 소유의 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한 아이의 엄마인 서령이, 한 아이의 엄마가 될 소유에게 물었다.


“그 여자도 엄마라 그런 힘을 낼 수 있었겠지?”

단순히 서령이 오늘 일로 화가 났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서령이 내비치는 감정이 생각보다 복합적이라 소유의 기분도 묘해졌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엄마였다. 자식을 지키기 위해 우린 무엇이든 기꺼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그게 남의 자식을 해치는 길이라면, 그것 또한 합리화할 수 있을까.


“이 순간 내가 정말 원망스러운 건 그 여자가 아니라 이 사태를 만든 남편이란 작자와 집안사람들이다. 잘못된 선택은 그들이 했지만, 그 대가는 오롯이 우리가 치러야 하니까.”

“어머니.”

“그래도 이대로 주저앉진 않을 거다. 분명 우리 애들을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더 있을 거야.”

자연스럽게 우리 애‘들’로 바뀌었다는 걸 서령은 알고 있을까.


“그러니 너도 강한 엄마가 되렴. 남편이란 부류만 믿지 말고.”

“네.”

서령은 자신의 화려한 귀걸이를 소유의 손에 쥐여 줬다. 고가이기도 하지만, 서령을 상징하는 의미 있는 물건이었다.

서령은 소유가 자신만큼 강해지길 바랐다. 아니, 자신보다 더.


“이제 네 거다.”

소유는 심란할 때마다 귀걸이를 만지작대던 서령의 버릇을 떠올렸다. 이 귀걸이를 만지작대는 동안 당신은 얼마나 많은 고뇌와 갈등을 겪었을까.


“좋은 엄마가 되렴.”

 

* * *

선오와 준오를 각자의 집에 데려다주고 나서야 부부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태오는 피곤한지 집에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널브러졌다. 소유는 그가 아무렇게나 던져둔 재킷을 집어 들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오, 장남.”

“뭐?”

“네가 처음으로 장남 노릇을 한 거 같아. 대견해.”

소유의 놀림에 태오가 한쪽 눈썹을 추켜 올렸다. 하지만 하나도 겁을 먹지 않은 소유가 까르르 웃었다.


“동생과 처음으로 손잡아 본 소감이 어때?”

“누가 손을 잡아. 그냥 네가 그놈이랑 털끝 하나 닿는 게 싫어서 억지로 한 것뿐이야.”

“이럴 때 보면 정말 귀엽다니까.”

“자꾸 놀릴래?”

태오가 소유의 손목을 휙 잡아당겼다. 그러자 소유가 저항 없이 태오의 위로 떨어졌다. 그렇게 얄밉게 놀렸는데도 막상 가까이서 보니 화가 단숨에 가라앉았다.

소유에게서 은은히 풍기는 향을 만끽하다 솜털이 반짝이는 그녀의 볼에 짧게 입을 맞췄다.

소유는 익숙한 듯 팔을 뻗어 태오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이래저래 슬프고 놀라는 일이 많았던 오늘, 든든한 태오의 품이 정말 그리웠다.


“그런데.”

침묵하던 태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응?”

소유는 태오의 가슴팍에 턱을 얹고서 되물었다.


“네 말이 맞는 것도 같더라. 걔들이 잘못한 건 없더라. 애초에 이런 삶을 스스로 고른 것이 아니니까.”

나른한 소유의 눈동자가 다시 또렷해졌다.


“이제 와서 우애 좋은 형제가 되겠다느니, 살가운 안부를 주고받겠다느니 그런 건 아니지만 걔네가 내 불행에 일조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조금 더 빨리 깨달았으면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너무 늦어 버렸는지도 모르지만, 태오는 지금부터라도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소유와 아이에게 비겁한 남편, 아빠가 되지 않기 위해서.


“생산 공장 이전 건도 동의해 주려고 해. 내가 괜히 고집을…… 왜 그렇게 쳐다봐?”

주절주절 말을 하던 태오가 불현듯 진득해진 소유의 시선을 느끼고서 물었다. 소유는 남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꾹 내리눌렀다.


“왜긴 왜야. 사랑스러워서 그러지.”

점점 따뜻하게 변해 가는 태오를 관찰할 수 있는 건 배우자의 특권이다. 소유는 자신만의 특권을 마음껏 누렸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내가 오늘 자기 전에 백번은 말해 줄게.”

“잠깐만. 너 지금 내가 그놈들 인정하겠다고 하니까 이렇게 잘해 주는 거야? 이거 기분이 좋아야 해, 나빠야 해.”

“아니야. 설마. 난 언제나 널 무척, 몹시 사랑하지.”

태오가 몸을 휙 뒤집어 소유의 위로 올라탔다. 심술을 부리는 태오의 모습조차 소유의 눈엔 그저 귀여웠다.


“전엔 이렇게 적극적으로 말해 준 적 없잖아.”

태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추궁했다.


“평소에도 그렇게 좀 해 주란 말이야. 내가 예쁜 짓 할 때만 그러지 말고.”

“본인이 예쁜 건 아나 봐?”

“에이, 안 되겠네.”

욱한 태오가 벌을 내렸다. 그래 봤자 고작 여기저기에 뽀뽀를 퍼붓는 것이 다지만 말이다. 소유는 태오의 키스 세례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활짝 웃었다.


 


“간지러워.”

“그러니까 날 사랑해 줘.”

“사랑해! 사랑한다니까?”

“더 사랑해 줘.”

“더 사랑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해.”

“아니야. 한계는 없어. 어떻게든 더 짜내 봐.”

이미 한계까지 사랑하고 있는데 더 사랑해 달라고 한다면 너를 끌어안는 수밖에.

소유가 힘을 줘 태오를 세게 끌어안았다. 소유의 배가 태오의 몸에 닿았다. 소유는 생각했다. 지금 엄마, 아빠가 얼마나 행복한지 우리 태랑이도 다 느끼고 있으면 좋겠다고.

그러니 새로운 세상에 발을 디디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진짜 사랑해, 태오야.”

설령 무섭다고 하더라도 네 옆엔 엄마가 있을 테니. 누구보다 강해진 엄마가 널 지켜 줄 테니.


“‘사랑해’라는 단어조차 모자람이 느껴질 만큼 널 사랑해.”

 

* * *

선오와 준오를 낳은 생모인 노지수는 24시간 자신을 감시하는 경호원들과 함께 생활했다.

물론 처음부터 그녀의 삶이 이토록 숨이 막혔던 건 아니다. 다만 점점 차오르는 아들들을 향한 그리움과 애절함에 여러 번 사고를 쳤고, 강화 가(家)는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지수가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던 것은 처음 선오를 낳을 때 서명한 계약서가 발목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계약서에 따르면 오히려 약속을 어기고 막무가내로 구는 건 지수였다. 지수는 대기업다운 철저한 계략에 몇십 년을 처절하게 발버둥 쳤다.

그러다 죽을힘을 다해 도망쳐 다 큰 어른이 된 아들들을 처음 봤던 그 밤이 지나고 이틀 후에 뜻밖의 손님을 맞이했다.


“둘이서 이야기하고 싶군요. 다들 나가 있어요.”

절대 지수의 집에 스스로 발을 들일 리 없다고 생각했던 서령의 방문이었다.


“사모님,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 모르니 저희가 대기하고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지수의 돌발 행동에 당한 적 있던 경호원은 염려했지만, 서령은 우아하고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괜찮아요. 혹시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가 다 책임질 테니 자리 비켜 주세요.”

그렇게까지 말하자 경호원은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성큼성큼 사라졌다.

제가 아무리 애원해도 꿈쩍도 하지 않던 경호원이 서령의 한 마디에 냉큼 움직이는 것을 보니, 지수에게선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서령은 그런 지수를 보다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넓고 호화스러운 아파트였지만 사람이 사는 흔적은 전혀 없었다.

삭막하고, 또 삭막했다.


“강화 가(家)가 아주 원망스럽겠지만, 우리가 아니었다면 노지수 씨가 이런 집에서 살 수 있었을까요?”

정곡을 찌르는 말에 지수가 날카롭게 대꾸했다.


“그 말씀 하시려고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하지만 아주 많은 일을 겪은 서령은 그런 삐딱한 말 따위에 당황하지 않았다. 균열 없이 완벽한 얼굴로 지수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손님 대접이 형편없군요. 차 한 잔도 내어주지 않으실 예정인가요?”

무어라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지수는 불가항력적인 명령을 들은 것처럼 어기적어기적 주방을 향해 걸어갔다.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찬장에서 내리는 지수를 보던 서령이 덤덤하게 물었다.


“원하는 게 더 큰 돈인가? 잘생긴 아들들의 효도?”

쨍그랑. 위태롭던 찻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마치 그들의 사이처럼.

지수가 미간을 찌푸린 채 서령을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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