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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한밤중의 손님 (70/95)


70. 한밤중의 손님
2022.11.28.


정반대의 삶을 살아온 두 여자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사모님,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지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서령은 아무런 요동도 없었다.


“방금 내 질문이 그렇게 충격받을 만한 질문인가?”

“사모님도 아들이 있으시잖아요. 그럼 누구보다 제 마음 잘 아실 거 아니에요.”

“죽을 때까지 아이들 앞에 나타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서령이 팔짱을 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약서에 직접 서명을 한 건 노지수 씨고. 또, 강화 가(家)는 그에 대한 대가를 충분히 치렀어요.”

반박할 수 없는 맞는 말에 지수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털썩 주저앉은 그녀의 손바닥으로 뾰족한 유리 조각이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 어떤 고통도 아들을 그리워하는 엄마의 심정만큼 처참하진 않았다.


“처음이 아니죠? 그 애들을 찾아온 게. 매번 실패했겠지만.”

“사모님이라면 저처럼 하지 않았겠어요?”

“그럼 애초에 그런 추악한 계약은 하지 말았어야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걸 알았어야지. 강화 가(家) 인간들은 뼛속까지 장사치라 연민이나 동정 같은 거 못 느낀다는 걸 알았어야지.”

지수의 손바닥과 마음에서 흘러나온 빨간 피들이 바닥을 물들였다.

서령의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지수도 그녀의 말이 모두 옳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 그 제안을 받았을 때, 지수는 어리디어린 20대였다. 집안은 빚에 허덕이고, 그와 별개로 어린 허영심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다.


“몰랐으니까요. 천륜은 절대 돈 따위로 끊어 낼 수 없다는 걸.”

그렇게 돈에 눈이 멀었던 철없는 여자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어긋난 것을 되돌리려고 했을 땐 이미 모든 게 늦은 후였다. 강한 힘 앞에서 나약한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받은 돈, 한 푼도 쓰지 못했어요. 그대로 가지고 있어요. 쓰려고 할 때마다 죄책감이 들어서, 내 아이들 팔아먹은 돈으로 잘 먹고 잘살려니 온몸이 찢어질 듯 아파서 쓸 수가 없었어요.”

입술을 달싹이던 서령이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하려고 했던 말조차 의지대로 튀어 나가지 못했다. 그건 서령에겐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지수가 보지 못한 서령의 눈동자엔 햇빛에 반사된 눈물이 반짝이고 있었다.


“돌려드릴게요. 이 아파트도 두고 나갈게요.”

지수가 애원하며 흐느꼈다.


“난 그냥 우리 애들 얼굴 한번 어루만지고, 대화 한번 나누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 외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정말이에요.”

이제 와 선오와 준오의 효도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 정도로 염치가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죽기 전,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아들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게 당신 욕심 채우고 나면?”

서령이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서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 애들은? 그 애들은 이제 강화 가(家)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어요. 그 애들이 겪을 혼란은 생각 안 하세요?”

지수는 시선을 들어 곧게 선 서령을 올려다보았다.


“끝까지 이기적이시군요, 노지수 씨.”

분명 제 친아들의 자리를 넘보는 선오와 준오가, 서령에겐 눈엣가시였을 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방금 그 말엔 선오와 준오를 향한 걱정이 은은하게 담겨 있었다.


“다신 찾아오지 마세요. 정말로 그 애들을 사랑한다면.”

서령이 소파에 놓여 있던 자신의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넓은 보폭으로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사모님껜 죄송해요.”

지수는 서령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 간절하게 외쳤다. 다행히도 서령은 다이닝 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잘 보여서 원하는 거 얻어 내려는 수작 아니에요.”

서령의 눈이 피로 범벅된 지수의 손에 닿았다. 그 광경은 지난밤, 엉망이 되었던 선오의 손과 닮아 보였다.


“평생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살아왔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지더라고요. 진짜 피해자는 모든 걸 지켜보며 버텨야 했던 사모님이라는 걸.”

“…….”

핸드백을 쥔 서령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얗게 질릴 만큼.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심정으로 그 긴 세월을 보내셨을 사모님이 가장 힘들었을 거라는 걸.”

서령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완벽한 위로를 남편도 아니고, 아들도 아닌 이 여자에게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절대 그런 선택 하지 않았을 거예요.”

서령의 고개가 아래로 푹 떨어졌다.


“내가 당신 아들들에게 한 짓을 알면 그런 말 못 할걸. 그러니까 그만합시다.”

“아니요. 그래도 죄송합니다.”

문드러진 마음에 새로운 칼날이 다가오지만 아무런 느낌도 받을 수 없었다.

그만큼 서령의 내부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웬만한 일엔 간지럼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서령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참 망할 집안이죠.”

그러다 가방 속에서 비싼 명품 손수건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돈뿐인 고약하고 악취 나는 집안.”

그게 서령이 지수에게 줄 수 있는 단 한 뼘의 배려였다.

* * *



“무슨 일이야?”

평소보다 늦는 태오를 기다리던 소유는, 이윽고 놀라고 말았다.

태오가 선오와 함께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한 선오와.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선오를 부축하는 태오의 모습은 소유에게조차 생소할 정도였다.


“몰라. 지하 바(bar)에 쓰러져 있더라. 술 마실 곳도 없는지 왜 맨날 우리 호텔에서 난리야. 더럽게 성가시게 하네.”

“혼자?”

“응. 혼자.”

“일단 들어와.”

소유는 황급히 몸을 비켜 줬다. 선오는 태오만큼이나 키가 컸고 건장했기에, 몸에 힘이 빠진 그를 부축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테다.

태오는 1층 소파에 던지듯 선오를 내려놓았다.


“애가 정신은 못 차리지, 직원들은 나만 쳐다보고 있지. 그래서 여기로 데려올 수밖에 없었어.”

“도련님 집으로 바로 데려다드리지 그랬어?”

“얘 집을 몰라.”

“아…….”

형제끼리 서로의 집도 모른다. 사정을 모르는 이의 눈에는 무척 이상하게 보일 수는 있겠으나 이 기형적인 집안에서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소유조차 선오의 집 주소를 몰랐다. 그나마 준오와는 교류가 있었으나 선오와는 정말 남보다도 못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혼자가 되겠노라 스스로 결심한 것은 선오였지만, 큰 도련님이 퍽 외로웠겠다는 생각이 드는 소유였다.


“밤늦게 미안해.”

곤히 생각에 잠긴 소유가 신경 쓰였는지 태오가 사과했다. 소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렇다고 길에 버릴 순 없잖아. 잘했어.”

소유가 까치발을 들어 태오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태오야. 우리 이제 큰 도련님 주소 정도는 알아 가자. 그러고 싶어.”

태오는 딱히 긍정의 대답은 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부정의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아주 큰 발전임이 분명했다.


“그나저나 얘 어디서 재우냐.”

“게스트 룸 있잖아.”

“이놈 뭐 예쁘다고 게스트 룸까지 내줘. 그냥 소파에서 재워.”

“안 돼. 너한텐 미운 놈일지 몰라도 나한텐 도련님이야.”

소유가 단호하게 말하자 태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혀를 찼다. 어차피 태오는 소유를 이길 길이 없었다.

태오가 널브러진 선오를 일으켜 세우려고 팔을 뻗는데, 몽롱한 선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강태오. 너 강준오랑 연락되냐?”

“네 동생을 왜 나한테 찾아.”

“……내 전화를 안 받으니까.”

태오가 멈칫했다.


“웃긴 X끼야, 그거. 남한테는 착한 척하지? 근데 그거 다 가식이야. 나한테는 엄청 독한 놈이야. 나는 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거 알면서.”

“…….”

“영영 내 전화 안 받으면 어떡하냐. 나한테 가족이라곤 강준오뿐인데.”

처음이었다. 온몸에 가시를 두르고 있던 선오가 자신의 진심을 제대로 꺼내 보여 준 게.

가시를 빼고 나니 순하고 따뜻한 준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닮았구나. 소유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실감했다.

선오는 힘겹게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준오의 번호를 눌렀다. 통화음이 한참 동안 이어지지만, 준오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것 봐. 절대 안 받는다니까.”

“나라도 안 받겠다.”

“그렇지. 그래야 강태오지. 내 말엔 일단 태클 먼저 걸고 봐야 직성이 풀리잖아.”

“네 눈엔 강준오가 아직 어린 애 같냐?”

“뭐?”

“걔도 스물일곱 살이야. 그런데 네가 무슨 권리로 친어머니와의 만남을 막아?”

비아냥이 섞이지 않은, 태오의 진지한 물음에 선오가 가만히 눈동자를 굴렸다.


“네가 보호해 줄 나이는 지났다고. 아니, 내가 보기엔 강준오가 너보다 훨씬 더 강해. 오히려 약해 빠진 놈이 더 난폭하게 굴지.”

“내가 약해 빠졌다고?”

“그럼 왜 내가 있는 곳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강준오한테 외면받으니까 나라도 알아주길 바랐던 거 아니야?”

선오가 코웃음을 쳤다.


“뭐래, 미친놈이.”

그와 동시에 술기운을 이기지 못한 선오가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

한숨을 쉰 태오는 선오를 부축해 계단을 올랐다. 형제의 뒷모습을 보던 소유는 휴대폰을 꺼냈다.


― 네. 형수님. 이 시간에 웬일이에요? 무슨 일 있어요?

형의 전화엔 끝내 답이 없던 준오였지만, 소유의 전화는 바로 받았다.


“늦은 시간에 미안해요. 갑자기 도련님이 보고 싶더라고요.”

준오가 낮게 웃었다.


― 뭐예요. 빈말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요. 나 태오 형한테 맞아 죽어요.

“진심이에요. 그런데 이 순간에 나보다 더 도련님이 보고 싶을 사람이 있는 것 같네요.”

명랑하게 웃던 준오가 일순간 조용해졌다. 애써 하고 있던 밝은 척마저 사라졌다.

한참 후에 준오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선오 형이 형수님 찾아가서 행패 부렸어요?

“설마요. 그냥, 그날 이후 두 분 냉전 상태일 것 같아서.”

― …….

“큰 도련님은 작은 도련님을 정말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엔 그날, 큰 도련님은 필사적으로 작은 도련님을 보호하고 있었거든요.”

― 알고 있지만, 그날 일은 쉽게 용서가 안 돼요.

“그럼요. 이해해요. 서로 방법이 달랐던 거니까.”

소유는 냉장고로 걸어가 생수 하나를 꺼냈다. 내일 일어나자마자 갈증을 느낄 선오를 위한 것이었다.


“참, 도련님. 내일 주말인데 뭐 해요? 내일 아침에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식사하실래요?”

소유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는 준오가 대답을 망설였다.


“밥도 먹고, 차도 마셔요. 평범한 가족들처럼. 아, 아직 우리 태랑이 사진도 못 보셨죠? 보러 와요. 첫 조카잖아요.”

소유는 생수병을 든 채 천천히 3층으로 올라갔다. 그러곤 게스트 룸의 문을 열었다.


“태오도 좋아할 거예요.”

― 그럴 리가.

영문을 모르는 태오가 쳐다보자 소유는 찡긋 웃고서 협탁 위에 생수병을 내려놓았다.


― ……알았어요. 갈게요.

한참 고민하던 준오는 결국 소유가 원하는 답을 내어놓았다.

준오라고 평생 선오와 이런 관계로 남고 싶진 않을 테니까.


“내일 봐요, 그럼.”

소유가 전화를 끊자 태오가 물었다.


“방금 무슨 말이야?”

소유는 선오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으며 말했다.


“내일 작은 도련님 초대했어. 같이 식사나 하려고.”

“참나.”

태오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서 헛웃음을 지었다. 하여튼 보통이 아니라니까. 조용조용 사고를 쳐요.


“너도 기대되지?”

“퍽이나. 아침부터 꼴 보기 싫은 놈들 얼굴을 쌍으로 봐야 한다니. 진짜 최악의 주말이다.”

“그래. 너도 좋아할 줄 알았어.”

“야. 내 말 듣고 있어?”

소유가 새침하게 등을 돌려 2층 침실로 내려왔다. 그 뒤를 태오가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왔다.


“나는 하나도 안 좋거든. 진짜 하나도 안 좋아.”

“씁. 태랑이 들어. 거짓말은 나빠.”

“거짓말 아니야.”

그러거나 말거나 소유는 태오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 쥐고 마구 주물렀다.


“귀여운 내 새끼.”

“네가 더 귀엽거든.”

“그럼 뽀뽀할 수 있는 기회 줄게. 해 봐.”

오늘따라 얄밉게 구는 소유가 입술을 쭉 내밀었다.


“나도 자존심이 있지. 네가 뽀뽀하란다고 내가 바로…….”

쪽.


“뽀뽀를 하지.”

쪽쪽쪽.

픽 웃은 태오가 연신 뽀뽀를 하며 소유를 몰아붙였다. 소유의 부드러운 숨결이 태오를 따뜻하게 데워 주었다.

그래도 소유가 있어 우울할 뻔했던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이젠 소유가 없는 일상은 상상하기도 끔찍한 태오였다.


“내 새끼, 이제 보니 자존심이 없네?”

“응.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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