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호랑이 삼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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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호랑이 삼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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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호랑이 삼 형제
2022.12.02.
너무 늦지도, 그렇다고 너무 이르지도 않은 시간, 초인종이 울렸다.
차를 끓이고 있던 소유가 잰걸음으로 현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양손에 무언가를 잔뜩 들고 있는 준오가 보였다. 날씨가 꽤나 추운지 그의 코와 볼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서 와요! 추운데 오느라 고생했어요.”
“아니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설레서 잠도 못 잤어요.”
준오를 보자마자 소유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준오도 덩달아 예쁘게 웃었다.
“누군가에게, 그것도 가족에게 초대를 받은 건 처음이라. 아, 이건 오는 길에 형수님이랑 닮아서 샀어요.”
준오는 많은 짐들 중 화려하고 큰 꽃다발을 소유에게 내밀었다. 향기가 나는 꽃을 꼭 끌어안은 소유의 눈이 촉촉해졌다.
예뻐라. 이 예쁜 것을 태랑이도 함께 즐기고 있길 바랐다.
“내가 이렇게 예쁜가.”
“훨씬 더 예쁘죠.”
“빈말이겠지만 고마워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으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툭 끼어들었다.
“둘이 연애해? 짜증 나게 하지 말고 얼른 들어와라.”
두 사람을 못마땅한 얼굴로 응시하고 있는 태오였다. 그를 보자 긴장이 되는지 얼어붙은 준오를, 소유가 억지로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그나저나 뭘 이렇게 많이 샀어요?”
“과일 많이 드신대서 과일이랑 조카 선물 좀 샀어요.”
“어머. 저번에도 많이 사 주셨잖아요.”
태오는 시큰둥한 손짓으로 준오가 사 온 선물들을 뒤적였다. 어제 전화를 받고 급하게 준비를 했을 텐데 선물 하나하나에 준오의 마음과 진심이 가득했다.
손수 골랐을 준오를 생각하니 소유는 괜히 울컥할 것만 같았다.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 태오를 툭 쳤다.
“왜.”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겨우 그거다.
“아직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르는데, 돈 낭비하는 것도 아니고.”
“태오야?”
도련님 앞에서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여 줄 순 없어 다시 태오를 쳤다.
“즉등흐 흐르.”
소유가 이를 악물고 읊조렸다. 고집을 피우던 태오는 한숨을 푹 쉬더니 말했다.
“고맙다.”
영혼이 조금도 담기지 않은, 누가 봐도 소유에게 떠밀린 듯한 감사 인사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준오는 퍽 놀라웠다.
게다가 태오가 누구의 말을 순순히 듣는 것을 보니 신기했다.
“네 조카가 참 좋아하겠어, 조카가.”
그런데 어째 욕으로 들리는 건 기분 탓인가.
소유가 어색하게 웃으며 태오를 억지로 주방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곤 계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3층에서 큰 도련님 좀 깨워 주실래요? 아직 주무시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저나 태오가 가는 것보다는 작은 도련님이 가시는 게 편하실 것 같아서요.”
소유의 속셈쯤이야 준오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준오는 말없이 고분고분 계단을 올라갔다.
또 티격태격하기 시작한 큰형 부부의 기분 좋은 소음이 조금씩 멀어지더니 어느새 3층에 도달했다.
잠시 망설이던 준오가 게스트 룸 문을 열었다. 암막 커튼을 쳐 둔 탓에 방 안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그 안에서 선오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일어나.”
곧 어둠에 익숙해진 준오가 곧장 커튼을 걷었다. 잠을 방해하는 밝은 햇살에 선오가 눈가를 찡그렸다.
“이게 무슨 민폐야. 형수님 아직 초기라 조심하셔야 하는데, 신경이나 쓰이게 하고.”
준오가 조곤조곤하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작게 욕을 내뱉은 선오가 상체를 일으키곤 어젯밤 소유가 놓아둔 생수병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준오는 미우면서도 안쓰러운 자신의 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술은 또 얼마나 마신 거야. 방에 술 냄새가 가득해.”
생수를 반 이상 비운 선오가 손등으로 입술을 닦으며 대꾸했다.
“너 나랑 평생 말 안 하기로 마음먹은 거 아니었냐? 드디어 화가 풀리셨나?”
“형수님이 일어나서 밥 먹으래.”
“그렇겠지. 그놈의 형수, 형수. 아니다. 넌 나한테만 불친절하지. 그래서 강태오 옆에 붙으니까 좋냐?”
“전화 안 받은 건 미안해.”
선오가 짜증스럽게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런데, 형. 나 엄마 만날래.”
“뭐?”
“형이 뭐라고 하든, 아버지가 뭐라고 하든 만나고 싶어.”
준오는 늘 그렇듯 신중하게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함부로 비아냥대지도 못하게.
“차라리 안 봤다면 몰랐겠지만, 봤잖아. 그런 이상 모르는 척은 못 하겠어.”
“네가 많이 외로웠단 거 알아. 하지만 그로 인해 넌 네가 가진 걸 다 잃을 수도…….”
“상관없어.”
이래서 선오는 늘 준오가 불안했다. 저와 달리 욕심도 없고, 미련도 없는 놈이라. 언제든 이 집안을 떠나도 이상하지 않은 놈이라.
“난 애초에 그 많은 돈과 힘을 바란 적이 없어. 난 그저 내 존재의 이유가 궁금했고, 누군가의 자식이고 싶었을 뿐이야.”
“…….”
“아버지가 이런 날 언짢게 생각하셔서 내쫓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 받아들여야지. 단, 이대로 엄마 놓치면 그게 더 후회될 것 같아. 영영 마음에 남을 것 같아.”
“그럼 나는?”
막힘 없이 말하던 준오가 그 낮은 되물음에 입을 꾹 닫았다.
“너 가 버리고 나면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너밖에 없던 나는?”
“형.”
“나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진 여사보다, 스물일곱 먹어 처음 본 노지수 그 여자보다도 소중하지 않구나, 네게.”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나는 당연히 형과 함께 엄마를 뵙고 싶어.”
선오가 한숨을 쉬듯 짧은 웃음을 내뱉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그날 아무것도 못 봤으니까.”
선오의 상처받은 듯한 시선이 준오를 따갑게 찔렀다.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엄마, 혼자서 많이 보세요. 눈물의 재회 장면에서 훼방꾼은 빠져 줄 테니까.”
거칠게 외투와 휴대폰을 챙긴 선오는 어깨로 준오를 치고 지나쳤다.
선오는 지금 무척 후회 중이었다. 왜 이 집에서 잠이 들어서는. 아니, 애초에 왜 강화 호텔에서 술을 마셔서는.
곧바로 현관을 향해 직진하는데 눈을 반짝이는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평소였으면 그냥 무시하고 말았을 텐데 선오의 걸음이 멈췄다.
준오에게 무슨 병이라도 옮은 모양이다. 이젠 저까지 소유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을 보니.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예요.”
선오가 대충 고개를 주억이고 그 자리를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소유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식사 안 하시고 가려고요? 해장국 끓였는데.”
“괜찮습니다. 가 볼게요.”
“능숙하진 않지만 다른 요리도 했어요. 한 숟갈이라도…….”
“형수님.”
선오가 낯선 ‘형수님’이란 호칭으로 소유를 불렀다. 비꼬거나 기 싸움할 의도 없이. 순수하게. 소유는 입술을 꾹 닫았다.
“알겠어요. 강태오야 어떻든, 형수님은 정말 좋은 사람이란 거. 난생처음으로 나랑 준오에게 최선을 다해 준 사람이란 것도. 알겠다고요. 그런데 그만 하세요.”
“…….”
“형수님이 노력하셔도 어차피 우린 섞일 수 없어요. 물과 기름처럼 잠시는 어우러진 것처럼 보여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다시 분리되고 말 거예요.”
그때, 주방에 있던 태오가 나오면서 차갑게 말했다.
“별 염병을 다 떠네. 누가 같이 어우러져 살자고 했냐? 밥 한 끼 먹는 거 뭐 그렇게 어려워? 길바닥에 버리려다가 인심 써서 데려와 줬더니.”
“너까지 왜 이래? 단체로 가족애라도 도지셨나.”
“소유, 네 형수, 아직 입덧해.”
“…….”
“힘들게 참고 네 해장국 만들었다고.”
선오가 소유를 쳐다보았다. 소유는 시무룩한 작은 동물처럼 몸을 웅크렸다. 그 옆에서 가장 큰 호랑이가 으르렁댔다.
“네 마음 같은 거, 나한텐 하나도 안 중요해. 관심도 없고. 그런데 네가 소유한테 상처 주는 건 못 참겠거든.”
“그래서 어쩌라고?”
“너 이대로 나가 버리면 내 손에 죽는다고.”
그저 겁주려고 하는 빈말은 아닌 것 같았다. 강태오 사전에 실없는 소리란 없을 테니. 슬그머니 계단에서 내려온 준오가 눈동자를 굴려 상황을 파악했다.
“하, 너네는 미쳤어. 전부 돌았어.”
소유를 뺀 자신의 형제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늦었잖아. 너무 늦었잖아. 이제 와서 뭘 하겠다는 건데.”
그런데 그 말에 대답을 해 주는 건 소유였다. 소유는 선오에게 작고 빳빳한 종이를 내밀었다.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초음파 사진이었다.
“태랑이랑은 아직 만난 적 없잖아요.”
다소 늦은 깨달음이지만, 선오는 그제야 왜 태오가 나약해 보이는 소유에게 꼼짝 못 하고 잡혀 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럼 늦은 거 아니잖아요. 우리 태랑이한테 좋은 삼촌이 되어 주시면 되잖아요.”
선오가 저도 모르게 사진으로 팔을 뻗었다. 아직은 제대로 된 형체도 없는 이 작은 존재가 불안하고 미성숙한 어른들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전 태랑이가 어른들 사랑 듬뿍 받고, 바르게 자랐으면 좋겠어요.”
선오가 픽 웃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여전히 웃고 있지 않았다.
“좋은 엄마네요.”
선오의 시선이 준오에게로 옮겨갔다.
“왜 그 여자는 이렇게 좋은 엄마가 될 생각을 못 했는지.”
태어나지도 않은 조카를 부러워하는 자신은 얼마나 못난 어른이던가. 준오가 선오의 생각을 읽었는지 형의 어깨를 토닥였다.
소유가 따뜻하게 웃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다 된 훈훈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은 오늘도 어김없이 태오였다.
“내 손에 죽을 거야, 아니면 밥 먹을 거야.”
정말이지, ‘밥 먹고 가.’를 아주 살벌하게 말하는 재주가 있다. 선오는 조심스럽게 태랑이의 사진을 돌려주고 태오에게로 걸어갔다.
“네가 죽을지, 내가 죽을지는 아직 모르잖아? 속단하지 마. 난 이제 기도 못 펴던 객식구 신세가 아니거든.”
“이 X끼, 많이 컸네.”
“키는 원래 컸지. 정 원한다면 밥은 먹고 갈게. 그래야 할 이유가 세 가지가 생겼거든.”
소유가 입을 틀어막고 소리 없는 환호를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오와 선오 사이에선 냉소가 오갔다.
“첫째. 우리 강 부사장님이랑 생산 공장 이전 건에 대해서 할 말이 아주 많거든. 참고로 아버지는 내 뜻에 따른다고 하시네? 이제 강태오 주주님만 그 엿 같은 고집을 꺾어 주시면 돼요.”
“얼씨구.”
“둘째. 형수님한테 죄송하고 고마워서.”
“소유랑 친한 척은 하지 말고. 거북하니까.”
“셋째. 저 사진 속 꼬맹이랑 잘 지낼 수 있을까, 궁금해져서.”
“누구 마음대로? 내가 우리 태랑이를 너한테 보여 줄 거 같냐?”
태오와 선오는 마지막까지 서로에게 독설을 내뱉으며 다이닝 룸으로 사라졌다.
덩그러니 1층 로비에 남은 준오와 소유가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잘한 거겠죠?”
“글쎄요. 우리 둘 중 하나는 체할 것 같은데, 제가 형수님 드실 소화제라도 사 올까요?”
그래도 말 한마디 없는 형제보다는 살벌하게 싸워 대는 형제가 더 낫겠지.
“그리고 고마워요, 형수님.”
“뭐가요?”
“이런 자리 만들어 줘서. 아마 형수님 없었으면 우리 셋, 둘러앉아 밥 먹는 일 절대 없었을 거예요.”
알고 보면 상처가 많아서 더 가시를 세울 수밖에 없었던 호랑이 삼 형제는 사랑스러운 토끼를 만나 신기한 일들을 많이 경험했다.
그래서 소유에게 고맙다는 말은 해도 해도 모자랐다.
“별말씀을. 아, 그리고 전 도련님이 어떤 선택을 하시든 응원해요.”
“든든하네요.”
“혹시 갈 곳이 없으시면 우리 집에서 지내셔도 좋아요.”
“태오 형이 너무 싫어할 것 같은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소유와 준오도 다이닝 룸으로 걸어갔다.
“어찌 되었든 도련님이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을 해야 하니까. 그건 누구도 강요할 수 없어요. 아버님도, 첫째 도련님도.”
설령 그것이 지금껏 쌓아 온 모든 걸 잃게 되는 불운을 몰고 오더라도.
“저도 엄마를 향한 그리움을 누구보다 잘 알아서 도련님이 이해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