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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태랑이의 성별은 (73/95)


73. 태랑이의 성별은
2022.12.09.



 
강 회장은 고요한 집무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마치 그대로 굳어 버린 돌처럼.


“네 형은 안 왔냐?”

그러다 준오가 등장하자 불현듯 그렇게 말했다. 강 회장은 여전히 정면을 보고 있었지만, 준오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호적상으로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로 엮여 있었지만 준오에게 강 회장이 아버지로 느껴졌던 적은 없었다.

다른 강화 그룹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한없이 어렵고 먼 존재였다.


“태오 형 말입니까?”

“아니. 선오 말이다.”

그제야 강 회장이 고개를 돌려 준오를 쳐다보았다. 준오는 자신과 닮은 아버지의 눈을 빤히 쳐다볼 수 없었다.


“오늘 네가 하려는 그 이야기, 선오 놈도 같이 들어야 하는 거 아니냐?”

아직 오늘 방문 목적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역시나 강 회장은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여러 형제를 제치고 왕좌의 자리에 오른 그다운 영민함과 예민함이었다. 어릴 적부터 강 회장을 뛰어넘는 형제는 없었고, 일찌감치 강화 가(家)의 수장으로 낙점되었다.

새삼스럽게 경이로운 아버지에게 말려들지 않기 위해 준오는 무척 애썼다.


“선오 형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아, 네 독단적인 행동이니 모든 걸 내려놓는 것도 너 하나일 것이라고?”

“아버지.”

“그놈의 피가 뭐라고, 그렇게 그리웠더냐? 못난 놈.”

강 회장이 오래전에 끊었던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윽고 담배 끝이 빨갛게 타들어 가더니 그의 입에선 하얀 연기가 새어 나왔다.

준오는 흩어지는 연기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구태여 거짓말을 하진 않겠다. 난 나의 후계자로 태오를 낙점했다.”

강 회장의 한숨인지 담배 연기인지 모를 것이 곧 집무실을 자욱하게 채웠다.


“하지만 그 이유가 너희의 출생과 연관된 것은 아니야. 다만 태오가 후계자로서의 자질을 조금 더 많이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야.”

“알고 있습니다.”

“선오는 가끔 감정적이라 일을 그르치고, 너는 논쟁을 싫어해 손해를 볼 때가 많다. 무릇 경영자란 어떤 상황에서도 이성적이어야 하고, 기업의 이익을 우선시해야 하지.”

그래서 태오가 적격이었다. 냉혹하고 과감한 그는 강 회장과 제일 비슷한 아들이었다. 때론 그것이 인격적 결함으로 드러날 때도 있었지만 회사 입장에선 흠이 될 것이 없었다.


“만약 너희 둘 중 태오보다 더 유능한 놈이 있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후계자 자리를 물려줬을 거다.”

집안 어른이나 진 여사가 들었다면 기함을 토하고도 남을 이야기를 하면서도 강 회장은 태연했다.

오히려 준오의 눈동자만이 흔들렸다.


“그만큼 너희 셋은 내게 똑같은 아들이었다는 말이야. 물론 나는 죄인이고, 너희 셋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사람이지. 무책임했고, 무엇이 우선이 되어야 하는지 모르는 매정한 아비였지.”

그렇게 사랑했다면 단 한 번이라도 티를 내 주시지. 왜 아버지는 그들의 사이가 파멸을 향할 때까지 방치했을까.

원망 섞인 말이 목구멍에 걸렸다.


“그래도 선오와 네가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는 필연적으로 부자지간이 되었고, 그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아버지.”

“그런데 넌 노지수 그 여자를 보자마자 이 아비를 버리고 떠나려고 하는구나.”

참 이상하지.

그런 당신의 목소리에 묘한 서운함이 실려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닌데.

누군가에게 아쉬움을 느낄 만한 사람이 아닌데.


“넌 언제나 선오와 달리 네가 운영하는 계열사에 애정조차 주지 않고, 그저 맡은 바 임무를 다할 뿐이었지. 마치 이런 날이 오리라는 걸 아는 사람처럼.”

강 회장의 눈에 준오는 차곡차곡 이별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가장 불안한 아들 중 하나였다.


“고얀 놈. 가끔은 네가 태오 놈보다 더 매정하게 느껴지는구나.”

“죄송합니다.”

준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비웃을지 모르겠지만, 내 딴엔 너희에게 무관심한 게 오히려 너희를 편하게 해 주는 방법이라 여겼다. 눈길 한 번, 말 한마디 걸지 않아야 덜 구박받고, 빨리 어우러질 수 있을 줄 알았다.”

강 회장이라고 왜 어린 아들들에게 관심이 없었겠는가. 힘든 일이 있는지 서러운 일이 있는지 궁금하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강 회장은 필사적으로 선오와 준오를 외면했다. 선오와 준오에게 한 톨의 관심이라도 주는 날엔 서령은 예민해졌고, 집안 분위기는 차갑게 식었다.

피할 수 없는 경쟁과 질투가 부자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일부러 더 냉정하게 굴었다.

기다리다 보면 언젠간 마음 편히 아들들을 대할 일이 오리라 믿었다.

결국 그의 바람은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내가 이렇게까지 말해도 너의 마음은 변하지 않겠지?”

“단 하루라도 좋으니 오롯이 ‘강준오’라는 이름으로 살고 싶습니다. 강화 백화점의 이사, 아버지의 셋째 아들이 아니라.”

준오의 소년 같은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버지는 아들의 눈물을 처음으로 마음 놓고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나란 존재의 이유를 아는 사람 옆에서. 마음 졸이는 일 없이 편하게.”

아마 준오에겐 돈이나 권력보다는 그게 더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모두가 선망하는 자리에서 미련 없이 내려와 제 갈 길을 가려는 것이겠지.


“그리고 엄마가 정말 보고 싶었어요. 죄송합니다, 아버지.”

처음부터 어긋났던 결정들은 복선이 되어 오늘의 비극을 몰고 왔다.

강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저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죄의식 가득한 막내아들에게 다가갔다.


“준오야.”

“모두 다 내려놓고 갈게요. 원하시면 다시는 아버지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제발 허락해 주세요.”

강 회장이 손을 들어 올렸다. 눈을 질끈 감았던 준오는 이어진 익숙하지 않은 온기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놀랍게도 강 회장은 팔을 뻗어 준오의 물기 있는 얼굴을 어루만졌다.

이제 막 생겨난 눈물방울이 강 회장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이것 하난 확실하구나. 세 놈 중 가장 막돼먹은 불효자는 너다.”

꾸지람하는 목소리완 달리 그의 엄지는 준오는 눈가를 어설프게 닦아 냈다. 우습게도 준오는 자신의 아버지가 저와 같은 체온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하지만 어쩌겠냐. 천륜을 막을 수는 없겠지. 노지수 그 여자가 아직도 포기 못 한 것처럼.”

아무리 힘으로 내리눌러도 천륜만큼은 막아지지 않는다. 이번 기회를 통해 강 회장은 깨달았다.


“또 올해 스물일곱 먹은 아들이 엄마를 만나겠다는데 아비가 반대할 권리도 없겠지.”

“아버지.”

“만나라. 네가 그러고 싶다면.”

준오가 강 회장 눈동자 속에 담긴 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속엔 스물일곱 살의 자신이 아니라 매일 밤 이불 아래서 숨죽여 울던 일곱 살의 자신이 있었다.


“대신 일을 그만두는 것은 안 된다. 강화 백화점이 동네 구멍가게도 아니고, 네 사임 소식이 들리면 주가는 하락할 거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안다면 집안 어른들은 준오를 끌어내리려 악을 쓸 테다.


“넌 그냥 아버지한테 배운 대로 하면 돼. 네 아래 직원을 생각하고, 그 막중한 책임감을 새긴 채 일을 하면 돼.”

강 회장은 강한 훈육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의 방식대로 아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이 나이가 되어서야 힘을 어떻게 써야 아비 노릇을 할 수 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네 형들 과로사하는 꼴 보기 싫으면 내 말대로 해.”

“…….”

“그리고 선오에게도 말해라. 원하면 언제든 노지수 그 여자를 찾아가도 된다고.”

강 회장이 들썩이는 아들의 어깨를 어색하게 안았다.


“나머지는 아버지가 책임져 줄 테니.”

방패가 되어 주는 것이다. 날아오는 모든 총탄을 막아 아들들이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게 가진 건 힘뿐이었던 강 회장이 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아버지 노릇이었다.


“그리고 네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난 이혼 당한다.”

강 회장은 제 아들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한 축이었던 인물들과 등을 지기로 마음먹었다.


“다 늙은 아비를 홀아비로 만들고 싶지 않으면 말 들어.”

 

* * *



“흠…… 아빠와 많이 닮아서 씩씩하겠네요.”

소유의 담당의 명 교수의 말에 부부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직 32주가 되지 않았기에 명 교수는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다.

다만 명 교수의 말에서 부부는 대략적인 성별을 유추할 수 있었다.


“요놈 아주 잘생겼어요.”

잠시 후 초음파실의 불이 켜지고 소유가 살짝 긴장한 얼굴로 몸을 바로 세웠다. 이젠 제법 배가 나와 임산부라는 것이 티가 났다.

태오는 소유가 조심해서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게 극진하게 부축했다.

참 각별한 사이네. 처음 임신을 확인한 후부터 지금까지 태오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눈으로는 애정을 마구 내뿜으며, 몸으로는 우직하게 소유의 곁을 지켰다.

미디어에서 보던 엄숙한 재벌가의 부부들 같지 않았다. 이 둘도 정략결혼으로 만났다고 들었는데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지난번에 함께 병원을 방문한 진서령 여사는 어땠던가. 며느리의 작은 숨소리에도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었다.

재벌가의 시집살이도 다 옛말인 모양이지.


“아이는 건강하고요. 엄마도 아주 잘 버텨 주고 계세요.”

명 교수는 흐뭇한 마음을 감추고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로만 하신다면, 큰 이벤트가 없다는 가정하에 건강한 아이를 출산할 수 있을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 예약 일정 잡으시죠.”

태오가 외래 간호사와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소유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앞만 바라보았다. 주위의 소음이 아득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왜 그래? 괜찮아?”

“응. 괜찮아.”

전혀 괜찮지 않은 얼굴로 괜찮다고 했다.


“잠깐만 앉았다 가자.”

안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태오가 대기자를 위해 마련된 의자에 조심스럽게 소유를 앉혔다.


“어디가 불편한 거야? 다시 교수님한테 갈까?”

“아니. 진짜 그런 거 아니야.”

당장이라도 명 교수에게 달려가기 직전인 태오를 소유가 다급하게 잡았다.


“교수님 말 들었어? 우리 태랑이, 아들 아니야? 그러고 보니까 저번에 도진 오빠도 초음파 사진 보더니 그랬어. 남자아이 같다고. 그래. 도진 오빠는 아들만 둘이니까 잘 알겠지.”

태오는 소유의 상태가 걱정돼 죽겠건만 소유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들었지. 같이 있었잖아.”

그게 왜. 혹시 딸이길 바랐던 건가.


“아들인가 봐!”

“들었다니까?”

곧이어 소유의 동그란 눈에 눈물이 차오르더니 코가 빨갛게 변했다. 그러다 남편을 세게 끌어안았다.

난데없이 울음을 터뜨린 소유를 보며 태오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들 싫어?”

조심스럽게 묻자 우렁찬 대답이 들려왔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딸이든 아들이든 상관없다고 했잖아.”

생각보다 큰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태오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선 소유의 등을 토닥였다.


“그럼 왜 그래?”

어쨌든 실망한 것은 아니라니 다행이지.


“너무 기대돼서.”

“뭐가?”

“곧 태랑이를 만날 수 있다는 게.”

태랑이의 성별을 듣고 나니, 진짜 태랑이가 자신들과 똑같이 숨을 쉬고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는 게 실감 되었다.

아득했던 날짜가 슬슬 눈으로 세어지기 시작했다.


“뭐야. 그런 거였어? 놀랐잖아.”

첫 아이는 뭐든지 다 신기한 법이지. 심박동 소리부터 성별까지. 이미 여러 차례 출산 경험이 있는 맞은편 아주머니가 흐뭇하게 부부를 바라보았다.


“넌 왜 감격 안 해?”

“난 지금 다른 것보다 네가 제일 우선이야.”

태랑이에겐 미안하지만, 태오에겐 여전히 1순위가 소유였다.


“흥. 아무튼 아들이면 널 많이 닮았겠다.”

“그렇겠지? 그런데 그 아쉽다는 표정은 뭐야?”

“얼굴만 닮았으면 좋겠어, 얼굴만.”

“……무슨 의미야?”

부부는 누군가의 부모가 되어서도 변함없이 유치하게 티격태격했지만 그들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우리의 첫아들 태랑아.

얼른 와라.

힘들지 않을 만큼만 열심히 달려서 빨리 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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