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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가족의 의미 (74/95)


74. 가족의 의미
2022.12.12.



 
소유가 준오에게 뜻밖의 제안을 한 것은 태랑이의 상태를 알려 주기 위해 만난 날이었다.


“괜찮다면, 제가 같이 가 드릴까요?”

아버지에게 허락까지 받았으면서 막상 어떤 얼굴로 어머니를 찾아봬야 할지 막막하던 준오가 떨리는 눈동자로 소유를 바라보았다.

함께 가 주는 사람이 있다면 시작도 쉽겠지만, 섣불리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현재 사이가 좋은 서령과 소유의 사이가 자칫하면 어색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소유에게 그런 부담은 주기 싫었다.


“아니요. 감히 어떻게 그런 부탁을 하겠어요. 저 혼자서…….”

“어머니가 먼저 부탁하셨어요.”

준오의 머릿속을 읽었는지 소유가 말했다.


“혹시나 아직도 망설이고 있다면 함께 가 주라고.”

소유의 제안만큼이나 서령의 호의가 놀라워 준오는 잠시 말을 잃었다.


“아무리 그리워했더라도 27년 만에 처음 본 어머니를 덜컥 찾아가는 게 쉽지는 않겠죠.”


‘그 미련한 놈은 얼마나 더 뭉그적댈지 모르니 네가 좀 도와주면 좋겠다.’

일부러 모질게 말한 뒷부분은 굳이 전하지 않았다. 소유는 애틋한 시선으로 준오를 바라보았다.


“이번 일, 어머니께서 정말 애써 주셨어요. 어쩌면 아버님이 그런 결정을 하신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했는지도 몰라요.”

“…….”

“언젠가,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어머니에게 감사하다는 한마디 정도는 해 주셨으면 해서요.”

준오는 고개를 푹 숙였다.


“늘 형수님한텐 도움만 받네요. 다 갚을 수나 있을지…….”

“아니요. 저도 도련님한테 받은 게 많아요. 처음 강화 가(家)에 입성했을 때, 날 따뜻하게 대해 준 사람은 태오를 제외하곤 도련님밖에 없었어요.”

소유는 햇살만큼이나 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생각했어요. 아, 이제부터 우린 쭉 한 편이겠구나.”

“…….”

“그리고 가족이잖아요, 우리.”

준오의 커다란 손이 그의 얼굴을 덮었다.


“진짜 가족.”

 

* * *

경호원은 준오의 얼굴을 보자마자 자리를 비켰다.

준오는 코앞까지 와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소유가 눈짓으로 초인종을 가리켰다. 재킷의 단추를 단정하게 잠근 준오가 떨리는 손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자 문 너머로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상기된 중년 여성이 문을 열었다. 그녀 또한 준오만큼이나 긴장한 듯 맨발로 뛰쳐나왔다.

하지만 오래간만에 바른 립스틱과 차려입은 옷이 그녀가 얼마나 아들과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었는지 보여 주고 있었다.


“……어, 어서 오렴.”

모자간의 첫 마디였다. 일반적이지 않은 다소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에 소유는 가슴이 아팠다.


“어제부터 청소했단다. 더, 더럽진 않을 거야.”

엄마는 아들을 대하는 법을, 아들은 엄마를 대하는 법을 몰랐다.

그러다 지수의 시선이 준오의 뒤에 선 소유에게 닿았다.


“이분은…….”

“아, 형수님이세요.”

소유가 공손하게 지수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요. 들어와요.”

지수는 아들보단 차라리 소유를 대하는 게 더 편해 보였다.


“실례하겠습니다.”

소유가 먼저 집 안으로 들어서자 그제야 준오도 따라 들어섰다. 어제부터 청소를 했다더니 내부는 몹시 깨끗하고 향기가 났다.

힘들었겠지만, 행복했겠지. 곧 아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임신을 했군요.”

“네. 아들이에요.”

지수가 단박에 소유의 임신한 배를 알아보았다. 소유는 준오와 비슷한 이미지를 풍기는 지수에게 웃어 보였다.


“그러지 말고 앉으세요. 차 가져올게요.”

준오는 소유를 소파에 앉히고 재킷을 벗었다. 그러곤 지수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준오는 이 집에 처음 온 사람답지 않게 자연스럽게 어머니를 도왔다.


“앉아 있어. 내가 할게.”

“도와드릴게요.”

“괜찮은데…….”

만류해도 준오는 고집스럽게 찬장에 든 세 개의 찻잔을 쟁반에 담았다.

갓난아기 때 헤어져 이제는 자신의 키를 훌쩍 넘은 아들을 보던 지수가 별안간 울음을 터뜨렸다.

놀란 준오가 저를 쳐다보자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사과했다.


“미안하구나. 참으려고 했는데 불쑥 터져 나와서.”

하지만 울음은 청개구리처럼 더욱 커져만 갔다. 애써 한 화장이 모두 지워질 정도로.


“선오는…….”

“형은 안 와요.”

“그래. 만나고 싶지 않겠지. 그래도 난 서운해하지 않는다고 전해 주겠니?”

준오가 오늘 지수를 만나러 오는 것을 알면서도 끝내 선오는 침묵을 지켰다. 그것 또한 선오의 결정이라, 준오는 제 형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원망스러웠겠니. 형이나, 너나. 나도 알아. 용서받을 생각도 없단다. 감히 엄마 노릇을 할 생각도 없어. 그냥, 그냥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 이렇게 아들이랑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소박하고 허무한 소원이었지만, 지수에게는 끝이 보이지 않는 산을 넘는 것과도 같은 고행이었다.


“고마워, 준오야. 나를 만나러 와 줘서.”

지수가 조심스럽게 장성한 아들을 어루만졌다. 준오는 목석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이제 됐다, 됐어. 엄마가 불편하면 네가 안 보이는 곳으로 떠날게. 그러니 오늘 딱 차 한 잔만 마시고 가렴.”

소유는 차마 그 가슴 아픈 광경을 계속 바라볼 수 없었다. 소유가 눈을 질끈 감자 굵은 눈물방울이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아, 그리고 이거.”

지수는 품속에 소중히 품고 있던 낡은 통장과 도장을 내밀었다. 그 안엔 강화 그룹과 계약을 하며 받았던 돈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강 회장에게 전해 줄래?”

그러나 준오는 그것을 받아 들지 않았다.

대신 평소보다 식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건 정당한 대가로 받은 돈이잖아요.”

“아니. 정당하지 않았어. 난 내 두 아들을 고작 이런 돈에 팔고 싶지 않아.”

“이제 와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어리석었어.”

“가져가요. 이것마저 없으면 지난 세월은 보상받을 수도 없어요.”

선오와 준오를 낳은 후부터 지금까지. 지수의 인생은 사라졌다. 청춘도 누리지도 못하고, 지금과 같은 중년이 되었다.

불이 꺼진 까만 방에 앉아 허송세월을 보내 왔다.


“보상받을 마음 없어. 난 죗값을 치른 거니까.”

준오는 머리를 흩트리며 한숨을 쉬었다. 지수가 억지로 통장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려고 하자,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나는 ‘엄마’ 같은 거, 동화 속에나 등장하는 건 줄 알았어요. 나한텐 평생 없었으니까.”

“…….”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 길이 없으니까.”

지수가 서러운 호흡을 토해 냈다.


“태오 형이 아프면 어머니는 온종일 걱정했어요. 태오 형의 졸업식마다 어머니는 항상 옆에 서서 사진을 찍었어요. 태오 형의 생일이면 어머니는 직접 미역국을 끓여 줬어요.”

어느새 준오의 얼굴도 흠뻑 젖었다.


“대단한 거 아니잖아. 특별한 거 아니잖아. 그런데 나랑 선오 형한텐 태어날 때부터 없었어요. 형이랑 난 아플 때도, 졸업식에도, 생일 때도 엄마가 없었어요.”

“준오야. 미안해. 미안해.”

“가끔은 정말 원망스러운데, 정말 미웠는데…….”

준오가 지수를 꼭 안았다. 그 공간에 존재하는 것 중 가장 보잘것없는 통장이 바닥으로 떨어져 처참하게 뒹굴었다.


“이렇게 만나니까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해요.”

분명 준오는 지수보다 한참 키가 큰 장신이었는데, 그 순간만큼은 어린 소년으로 보였다. 소년은 그토록 그리워하던 따뜻한 엄마의 품에 안겨 서럽게 울었다.

그건 소유로서는 처음 들어 보는 처절한 울음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제발 떠나지 마세요.”

“울지 마, 준오야. 울지 마.”

지수가 준오의 등을 토닥이며 함께 울었다. 엄마가 필요했던 무수히 많은 순간들을 위로받는 것 같았다.


“이젠 아플 때, 슬플 때, 기쁠 때 계속 같이 있어요.”

“…….”

“두 번 다시 떠난다는 말 하지 마세요.”

놀랍게도 준오는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른스럽기만 했던 준오가 비로소 제 나이로 보이기 시작했다.


“내 옆에 있어, 엄마.”

애처로울 정도로 모든 걸 홀로 감당하고 견디던 준오보다는 지금의 준오가 훨씬 보기 좋노라고, 소유는 생각했다.

소유는 이 광경을 보고 있을 태랑이가 있는 배를 어루만졌다.

아이야. 우리도 저렇게 서로를 사랑하다 못해 애절한 사이가 될 수 있을까. 속마음을 다 터놓을 수 있는 사이가 될 수 있을까.


“엄마…….”

“준오야.”

소유는 서로를 끌어안고 재회의 기쁨을 만끽하는 모자를 두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문득 참을 수 없이 태오가 보고 싶어졌다.

그에게 전화를 걸려고 휴대폰을 꺼내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놀란 소유가 바라본 곳엔 태오가 서 있었다. 그가 반가우면서 울컥해서 목이 멨다.


“한참 기다렸잖아.”

“여긴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너 데리고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지. 하여튼 강준오, 그놈. 남의 와이프 더럽게 귀찮게 한다니까.”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태오는 소유의 손을 다정하게 잡았다.


“그런데 눈 부었네.”

태오의 말에 소유가 어색하게 웃었다.


“응. 나도 덩달아 울어버렸어. 주책맞게.”

“어땠어, 두 사람?”

그래도 동생이라 내심 궁금했던지 태오가 슬그머니 물었다.


“애틋하고 슬펐어. 그리고 도련님의 진짜 모습을 본 것 같아. 보기 좋았어.”

“그렇겠지. 그렇게 엄마, 엄마 하던 놈인데.”

“태오야.”

소유가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태오도 덩달아 걸음을 멈췄다.


“왜?”

“난 정말 못난 사람 같아.”

“갑자기 왜?”

“도련님이 여태 얼마나 서러웠는지 알면서도, 도련님이 부러웠어.”

태오에게만 고백할 수 있는 아주 은밀한 진심이었다. 소유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태오가 어두운 눈동자로 소유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그래도 그리워하는 엄마가 살아 계셔서, 정말 좋겠다. 부럽다.”

“…….”

“나 이런 생각 했어.”

절대 준오는 ‘운이 좋다’라는 말을 꺼낼 수 없는 불행한 삶을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끝내는 이렇게 엄마와 마주 보고 끌어안을 수 있어서 참 부러웠다.


“난 왜 태랑이의 엄마가 되어서도 철이 안 들까?”

“난 네가 못났거나 철이 안 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태오의 손가락이 소유의 눈가를 쓰다듬었다. 달래 주려고 한 행동 같은데, 태오의 목소리를 듣자 호흡이 점점 먹먹해져만 갔다.


“강준오가 너보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 그리고 나보다도.”

소유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만큼, 태오도 장모님을 그리워했다.


“그러니 당연히 그런 생각 할 수 있어.”

소유는 태오의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 억지로 슬픔을 가둬 두지 않았다. 태오에게 모든 감정을 쏟아 냈다.

태오는 그런 소유의 등을 쓰다듬었다.


“다만 내가 이렇게 네 앞에 있으니, 너를 사랑하고 있으니, 내가 그 빈 곳을 채울 수 있으면 좋겠어.”

이미 그러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눈물에 막혀 나오지 않았다.


“더더욱 몸집을 불려 나 하나로 충분한 너를 만들어 주고 싶어.”

“…….”

“그게 내 유일한 소원이야, 소유야.”

꼭 말해 줘야지.

눈물이 멎고 나면.

목소리가 나오면.

또, 둘만 있게 되면.


“사랑해. 너를 정말 많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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