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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속도위반 (75/95)


75. 속도위반
2022.12.16.



 
어른들의 사랑을 받은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났다.

누구에겐 첫아들, 누구에겐 첫 손자, 누구에겐 첫 조카인 아이는 조마조마한 어른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기라도 하듯 매우 건강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소유의 몸은 점점 더 무거워져만 갔다.

손발이 퉁퉁 붓고, 체질이 변했고, 인생 최고의 몸무게를 찍게 되었다. 태오 없이는 외출하기도 버거울 정도였다.

도진의 배려 덕분에 모든 업무를 재택근무로 전환했지만, 그마저도 평소보다 효율이 떨어졌다.


“번역 내가 대신해 줄까?”

시무룩하게 거실에 앉아 있는 소유에게 슬그머니 다가온 태오가 노트북을 바라보며 말했다.

태오의 영어 실력이라면 원어민 수준이었고, 소유 못지않게 무역 용어에 빠삭했다. 그러니 카탈로그 번역 업무라면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었다.


“내가 한 번 번역하고, 네가 마지막으로 검토만 하면 되잖아.”

저도 이제 막 퇴근한 주제에, 태오는 열의 넘치는 표정으로 노트북을 제게로 가져왔다. 그러자 도통 진도가 나가지 않던 업무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손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태오를, 소유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 시간 컷. 한 시간 내에 끝내 줄게.”

“태오야.”

“그러니까 너무 침울해하지 마.”

“그거 다음 주까지 해도 돼.”

“…….”

소유의 말에 분주하던 태오의 손이 일순간 멈췄다.

……뭐야. 그럼 왜 이렇게 시무룩했던 건데?


“줘, 이리.”

소유가 손을 뻗었다.


“일단 배고플 텐데 밥부터 먹어.”

“같이 먹을래?”

어쩐지 소유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태오도 입맛이 뚝 떨어졌다. 근래 들어 입덧이 나아져서, 아니, 오히려 이전보다 더 식욕이 왕성해져서 얼마나 좋았는데. 왜 또 밥을 안 먹는대.


“속 안 좋아?”

소유가 고개를 저었다.


“밥 먼저 먹었어?”

또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왜 안 먹어?”

“배가 안 고파.”

태오는 벌써 아빠가 된 기분이었다. 예쁜 딸내미가 이유 없이 밥을 거른다고 하면 이런 기분일까.

태오는 소유의 어깨를 잡고 마주 보았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먹어야지. 요즘 잘 먹더니 왜 그래. 나 걱정돼.”

“태오야.”

“응. 왜? 뭐 먹고 싶은 거 생겼어?”

“나 살쪘지?”

“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태오가 잠시 얼어붙었다. 이 돌발 상황에서 남편이 해야 할 적절한 대답을 찾으시오.

고민하느라 태오가 잠시 말이 없자 소유의 입이 삐죽댔다.

이럴 줄 알았어!


“나 돼지야?”

“무슨 말이야, 갑자기. 이렇게 예쁜 돼지가 어디 있어.”

“나 오늘 몸무게 쟀는데 충격받았어.”

“전부 태랑이 무게야.”

“거짓말하지 마! 내가 찐 살도 반쯤은 될 거야.”

그럼 임산부가 잘 먹고 살쪄야지. 여기서 더 마르면 오히려 큰일이지. 태오가 이전과 달리 말랑말랑해진 소유의 볼살을 양손으로 잡았다.


“그래서 밥을 안 드시겠다?”

“넌 처음이랑 똑같이 멋있는데, 난 지금 별로 안 예쁜 거 같아. 처음과 달라졌어.”

“너 설마 그래서 그렇게 죽상이었던 거야?”

태오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나 소유에겐 꽤 심각한 문제였다. 오늘 직장동료이자 출산 선배인 송승아 대리와 통화를 하던 도중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남편과의 관계라든가.

가뜩이나 달라진 모습이 걱정스럽던 찰나, 현실적인 말을 들으니 정신이 확 들었다.


“출산해도 살 안 빠지면 어떡하지? 임신 전으로 못 돌아가는 사람도 많대.”

“뭘 어떡해. 살 안 빠진 채로 살면 되지.”

태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미리 만들어져 있던 소담한 저녁 식사를 트레이에 담아 돌아왔다.


“먹어.”

“안 먹어.”

소유가 손으로 입을 막고서 고개를 저었다. 태오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소유 보란 듯이 밥을 한가득 넣고 우물거렸다. 자연스럽게 소유의 침이 꼴깍 넘어갔다.

평소엔 깨작깨작 먹던 양반이 왜 오늘따라 약 올리듯 요란하게 먹을까나.


“식탁 가서 먹어.”

“여기서 먹을래. 아, 오늘 여사님 신경 좀 쓰셨네. 살면서 먹어 본 갈비찜 중에 최고야.”

필사적으로 외면해 보지만, 소유의 눈은 자꾸만 음식으로 향했다. 그런 소유가 귀여워서 마음이 약해질 뻔했지만, 태오는 참아 냈다.


“진짜 안 먹어? 그럼 내가 다 먹는다.”

가득 담겨 있는 밥과 갈비찜과 밑반찬들이 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이고, 우리 태랑이도 오늘 엄청 배고프겠네. 엄마가 밥을 안 먹어서.”

태랑이 이야기가 나오자 소유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가 자신의 불러온 배를 내려다보았다. 이 배고픔이 내 배고픔이 아니라 태랑이의 배고픔인가?


“태랑이 불쌍해라.”

쐐기를 박자 소유는 태오가 들고 있던 밥그릇과 수저를 빼앗고서 허겁지겁 밥을 먹기 시작했다. 목표를 이루자 태오는 다시 평소의 짧은 입으로 돌아왔다.


“천천히 먹어. 체할라.”

“태랑이, 미안.”

너무 착한 엄마는 우물거리며 아들에게 사과했다. 태오는 뿌듯하게 웃으며 소유의 밥 위로 갈비찜과 김, 반찬 등을 부지런히 놓아주었다.

덕분에 소유는 편히 숟가락만 움직여 배를 채울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그런 생각을 했어?”

소유의 통통한 볼에 하얀 밥풀이 붙어 달랑거렸다.


“왜 별로 안 예쁘다고 해?”

“그야 별로 안 예쁘니까.”

“누가 그래.”

태오가 인상을 팍 썼다. 소유는 부정확한 발음으로 대꾸했다.


“솔직히 말해도 돼. 살찐 것보다는…….”

“아니. 난 네가 어떤 모습이든 똑같거든? 오히려 살찐 게 좋아. 안을 수 있는 부위가 늘어나잖아.”

빈말이라 생각했지만, 태오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리고 쓸데없는 말을 한 사람을 알아내기라도 하면 가만 안 둘 거라는 살벌한 포부가 눈동자에 가득했다.


“하지만 너도 그랬잖아. 처음에 나 예뻐서 좋아했다고.”

그 와중에 또 자기가 예쁜 건 알아요.


“그래. 예뻐서 좋아했지.”

“그러니까…….”

“그리고 예뻐서 사랑했지. 그냥 네 자체가.”

마음이 시작된 계기에 겉모습도 일정 부분 지분이 있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은 특정한 모습의 소유가 아니라 그저 소유 그 자체가 예뻐서 사랑하게 됐다.

적어도 사랑이란 감정에서 외면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열아홉 살 때의 모습과 더욱 멀어진다고 하더라도 태오의 사랑은 변함이 없을 테다.


“내가 설마 네가 살쪘다고 덜 좋아하겠어? 너 내 사랑을 너무 과소평가한다.”

“…….”

“왜, 그냥 하는 소리 같아?”

“아니.”

소유의 반짝이는 눈망울이 태오의 마음속을 깊이 울렸다. 늘 그래왔듯이. 눈동자마저 찬란한 내 여자.


“새삼 내 남편이 참 특별한 사람인 것 같아서. 내가 보는 눈이 있다, 싶어서.”

갈대처럼 움직이던 소유의 마음은 태오의 말에 또 급하게 진정이 되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우스운 꼴에 소유가 픽 웃었다.

엄마가 되어도, 사랑하는 소년 앞에선 바보 같아지는 건 똑같구나.


“당연하지. 다른 얼간이들과 날 비교하지도 마. 그리고, 괜한 생각한 대가로 디저트도 든든하게 먹어. 네가 좋아하는 케이크 사 왔어.”

“응. 좋아.”

그제야 안심한 태오는 소유의 볼에 붙은 밥풀을 떼 아무렇지 않게 제 입 안으로 쏙 집어넣었다. 소유는 익숙한 듯 남은 밥을 싹싹 긁어 해치웠다.


“짠.”

소유가 자랑하듯 깔끔한 밥그릇 내부를 보여 줬다.


“아이고, 잘했네. 내 새끼.”

태오가 소유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잔뜩 칭찬했다. 큰일이다. 진짜 얘 닮은 딸 낳고 싶다.

잠시 후 태오는 새끼손가락을 소유에게 내밀었다.


“약속해. 다시는 끼니 안 거르겠다고.”

“응.”

소유가 고분고분하게 태오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끼웠다.


“상 줘야겠네.”

태오는 식기를 모두 거둬가더니 냉장고에 넣어 둔 홀 케이크를 들고 나타났다. 손엔 수저 두 개만 있었다.


“이대로 퍼먹을까?”

“너무 좋아!”

소유가 작은 토끼처럼 꼼지락댔다. 태오의 눈에 그것보다 사랑스러운 생명체는 없을 것이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태오와 소유는 거실의 낮은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사이좋게 케이크를 퍼먹었다.


“어머니가 이 모습 보면 질색하실걸.”

“우리가 너무 교양 없어서?”

소유가 까르르 웃었다. 그래도 이따금 이렇게 교양 없이 마구마구 먹고 싶은 날도 있는 법이다. 시어머니에겐 절대 보여드리지 않을 털털한 얼굴로 소유는 남편에게 기댔다.

태오는 밀쳐 뒀던 노트북을 다시 가져와서 하던 번역을 이어 나갔다.


“그거 다음 주까지라니까. 나랑 놀자아.”

그러자 소유가 졸랐다.


“이왕 시작한 거 끝은 봐야지. 그리고 미리 끝내 놓으면 너도 편할 거 아니야.”

“안 피곤해?”

“하나도 안 피곤해.”

고집을 부리니 소유도 별수 없었다. 태오가 번역을 하고 나면, 소유가 곧바로 검토를 했다. 지루한 일이라도 둘이서 함께하니 좋았다.


“우리 꼭 조별 과제 하는 거 같다, 그렇지?”

“너 조별 과제 할 때 그 조에 남자도 있었어?”

“아, 진짜 이 와중에 또 그런 걸 왜 물어봐.”

“난 진지해. 이렇게 가까이 앉아서 과제했을 생각하니까 피가 거꾸로 솟는다고. 그놈이 너한테 흑심 품고 있었으면 어떡해.”

못 살아, 강태오.

소유는 태오의 귀를 아프지 않게 잡아당기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


“거기 틀렸다. Noah, 영어 다 까먹었어?”

“은근슬쩍 회피한다?”

 

* * *


 
몽롱한 정신이었지만 기분이 좋았다. 밤바람은 선선했고, 코끝엔 사랑하는 태오의 향기가 맴돌았다.

소유가 천천히 눈을 떴다. 나란히 앉아 일을 하던 중 까무룩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가장 먼저 보이는 광경은 단정하게 움직이는 연필이었다. 쓱쓱. 기분 좋은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애써 졸음을 이겨 낸 소유는 몸을 바로 세우고 태오가 쓴 메모를 내려다보았다.

이호.

그렇게 쓰여 있었다. 어떤 설명도 없이. 그런데 어쩐지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게 뭐야?”

“우리 태랑이 이름.”

태명을 제가 지었으니 이름은 태오더러 지으라고 특명을 내려 준 소유였다. 몇 달 동안 태오는 고심을 거듭하며 괴로워했다.

마침내 그 결과가 나왔다.


“마음에 안 들면 말해. 후보가 한 612개 정도는 되니까.”

소유는 태오의 목을 끌어안았다.


“바보야. 왜 마음에 안 들어. 네가 직접 지은 이름인데. 정말 마음에 들어.”

강이호. 강이호. 강이호.

평생 이 세 글자로 불리게 될 우리의 아기 호랑이. 생각만 해도 벅찼다.


“내가 아는 이름 중에서 두 번째로 멋있어.”

“첫 번째는 뭔데. 그 조별 과제 같이 했던 놈 이름이야?”

“아닌데. 강태온데.”

“아, 그래?”

너그러워진 태오가 소유의 이리저리 뻗친 잔머리들을 정리해 줬다.


“우리 이호야. 호야. 입에 딱 붙는다.”

“그렇게 마음에 들면 잘 들어 봐. 겸사겸사 딸 이름도 생각해 봤는데.”

“잠깐. 잠깐만. 갑자기 왜 이야기가 그리로 튀어?”

소유가 재빨리 태오를 밀어냈다. 아직 태랑이의 출산도 까마득한데 벌써 둘째 이름이라니. 이 양반이 속도위반을 해도 제대로 하고 있다.


“내 탓 하지 마.”

“뭐야, 그 무책임한 대답은?”

“네가 너무 예뻐서니까.”

태오가 불쑥 다가와 소유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꾹 가져다 댔다. 마치 첫 키스를 하는 소녀처럼 소유가 움찔했다.

입술을 맞댄 채로 태오가 푸스스 웃었다.


“널 닮은 딸을 꼭 봐야겠어, 난.”

첫사랑을 닮은 딸, 모두의 로망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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