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집착의 총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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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집착의 총량
2022.12.23.
지수는 매일 아침, 하루도 빼먹지 않고 출근하는 준오를 배웅했다. 이른 시간인데도 그녀는 피곤한 기색 없이 언제나 밝은 표정이었다.
“차 조심하고. 신호등 잘 보고 다니고.”
다 큰 아들이어도 엄마 눈엔 아직도 작은 아이였다. 그녀에게 남은 준오의 마지막 기억은 갓난아이였기에 그럴 만도.
“엄마. 매일 이렇게 나오지 않으셔도 돼요. 더 주무세요.”
“잘생긴 아들 더 보고 싶어서 그러는데, 왜 못 하게 해?”
준오가 출근한 후 그녀의 일상은 단조로웠다. 고단한 아들이 쉴 공간을 깨끗이 치우고, 배고픈 아들이 먹을 음식을 준비하고, 또 하염없이 앉아 돌아올 아들을 기다렸다.
준오는 제게로만 향해 있는 엄마의 신경이 내심 미안했지만, 엄마에겐 그 무엇과도 못 바꿀 큰 행복이었다.
“오늘도 일 열심히 하고 빨리 와. 제육볶음 해 둘게.”
“힘들면 외식해도 돼요, 엄마.”
“아직 안 힘들어. 힘들면 말할게. 얼른 가. 늦겠다.”
준오는 엄마를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따뜻했다. 엄마의 잔소리, 엄마가 해 준 밥 등이 마침내 제게도 당연한 것이 되었으니까. 남들 다 있는 엄마가, 제게도 생겼으니까.
“이따 봐요. 사랑해요.”
다만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자신의 형인 선오는 이 따뜻함을 함께 만끽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준오는 엄마에게 포옹을 하면서도 이 순간에 홀로일 선오를 떠올렸다.
잠시 후 준오의 차가 매끄럽게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갔다. 차의 꽁무니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지수는 등을 돌렸다. 그러곤 준오의 오늘 하루가 평온하길 바랐다.
탁. 그때, 아까 전부터 서 있던 한 고급 차에서 누가 내렸다. 평소 같았으면 딱히 신경 쓰지 않았을 주변 음이었겠지만 그날은 달랐다. 이상하리만큼 강한 무언가가 그녀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아주 알콩달콩해 보이시네, 아들이랑.”
어디서 왔는지 모를 바람이 지수의 옆을 통과했다. 준오와 닮은 음성처럼.
지수가 가쁜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도저히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누가 보면 평생을 같이 산 모자인 줄 알겠어요.”
준오로 인해 일어섰던 마음이 다시 반쯤 내려앉았다. 그건 선오 몫으로 남겨 둔 선오의 자리였다.
“염치도 없으시지.”
선오는 혀를 찼다. 그러나 독한 말을 내뱉고 있는 그의 얼굴은 도리어 공격을 당한 것처럼 수척했다. 길게 자라난 앞머리가 그의 눈을 성가시게 찔렀다.
“아들들 돈 주고 판 주제에. 이제 와 용서를 빈다고 그 죄가 없어질 거라 생각해요?”
“…….”
“강준오는 참 속도 없지. 이런 엄마 뭐가 좋다고. 그저 엄마라고, 그저 저 낳아 준 사람이라고, 자기가 당한 건 다 잊고.”
마침내 지수가 심호흡을 하고서 선오를 바라보았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지수처럼 선오의 눈도 왠지 모르게 붉게 물들어 있었다.
밤에 짧게 본 선오와, 낮에 느긋이 본 선오는 느낌이 달랐다. 준오보다 키가 컸으며, 준오보다 날카로운 턱선을 지닌 그는 그들이 떨어져 산 세월만큼 낯설게 느껴졌다.
“걔, 그거 애정결핍이거든. 그러니까 너무 좋아하지 마요. 우쭐하지도 말고.”
강화 가(家)에서 원하는 모습 그대로 컸구나. 첫째 아들에 대한 지수의 감상은 딱 이 한 문장이었다.
“오히려 미안해해요. 걔가 당신한테 들러붙고, 사랑을 갈구할수록 죄책감 가지라고요. 그 비정상적인 집착, 당신이 만든 거니까.”
지수가 싫어하는 강화 가(家) 사람과 몹시 닮은 선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란했다. 청춘이라 싱그러웠고, 연약한 솜털이 사랑스러웠다.
선오를 강화 가(家)에 보내기 전, 지수는 딱 한 번 그를 안아보았다. 말간 까만 눈동자와 그 아래 통통한 손가락으로 엄마를 툭툭 치던 선오를 보며 지수는 난생처음 겪어 보는 감정을 느꼈다.
준오를 보내는 똑같은 실수를 하고 나서야 지수는 깨달았다. 사랑이었다. 엄마라면 으레 가지고 있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었다.
지수는 제 아들들이 어떤 모습으로 자라나든 변함없이 사랑하리라는 걸 그때 알았다.
“오늘 그 이야기 하러 왔어요.”
그래서 모진 말만 일부러 골라 내뱉는 선오가 밉지 않았다. 꼴 보기 싫은 강화 가(家) 사람과 같은 행동을 해도 거북하지 않았다.
“만약 강준오한테 똑같은 상처 또 주면, 그땐 아버지의 뜻이고, 진 여사의 배려고, 다 집어치우고 내가 당신 끝장낼 거니까.”
거기까지 말한 선오가 뒤로 돌았다. 그러곤 당장이라도 떠나려는 듯 차 문을 열었다. 조바심이 났다. 지수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며 아들을 크게 불렀다.
“선오야.”
조금이라도 좋으니 선오를 더 보고 싶었다. 언제 또다시 저를 찾아올지 모르니. 어쩌면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밥은 먹었어?”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곤 겨우 그거였다. 사람들이 의미 없이 주고받는 안부 같은 말. 그러면서도 부모가 자식에게 가장 묻고 싶은 그 말.
선오는 지수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뭐라고요?”
“바쁘더라도 밥은 꼭 챙겨 먹고 다녀. 많이 말랐다.”
“이보세요, 노지수 씨.”
“아픈 덴 없고? 건강한 거지?”
“…….”
선오는 대답 대신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의 머릿속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동시에 이 상황을 만든 지수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내가 강준오처럼 당신을 쉽게 용서할 거라는 헛된 기대를 품고 있다면…….”
“그러면 됐어. 밥 잘 먹고, 건강하면 됐어.”
“…….”
선오는 아랫입술이 하얗게 질리도록 세게 깨물었다.
“좋은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오늘 찾아와 줘서 고마워. 다시 보니 좋구나.”
지수의 눈은 울고 있었지만 입은 애써 웃고 있었다.
“네가 걱정하는 일 없게 할게. 혹시라도 내가 준오를 아프게 한다고 생각이 들거든 언제든 내게 말하렴. 준오랑 멀어질게.”
이 이야기를 들으면 준오가 무척 서운해할 것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수에게는 선오나 준오나 똑같은 자식이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누구의 편을 들 수도, 따를 수도 없었다.
그저 원래 그랬던 것처럼 아들들의 인생에서 사라져 주는 수밖에.
“차 조심해. 신호등 잘 보고 다니고.”
준오에게 했던 말과 같은 말을 내뱉고서 지수는 아파트 안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떠나간 자리를 물끄러미 보던 선오는 차에 올라탔다.
시동도 걸지 않은 채로 선오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 범람하는 감정을 이겨 내지 못하고 거칠게 핸들을 내려쳤다. 손등이 시뻘겋게 물들 정도로 세게 내려쳤다.
이윽고 그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선오는 타인에겐 절대 보여 줄 수 없는 무방비한 얼굴로 울음을 토해 냈다.
준오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로 돌아간 모습이었다.
한참을 흐느끼다 선오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너, 오늘 이곳에 찾아온 진짜 이유가 뭐야.
* * *
“태오야. 태오야!”
식사 후 휴식을 취하고 있던 소유가 별안간 태오를 요란하게 불렀다. 설거지를 하던 태오는 고무장갑도 벗지 못하고 단숨에 달려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어디 아파?”
아내에게 큰일이라도 생겼을까 봐 놀랐기 때문이다.
“태랑이 움직였어.”
“……뭐?”
“태랑이가 방금 발로 내 배를 찼어!”
소유가 상기된 얼굴로 동그란 제 배를 감싸 쥐었다. 순간 진이 빠진 태오가 몸을 수그렸다. 고무장갑에서 흐른 하얀 거품들이 카펫 위로 떨어지는 것도 모른 채.
“애 떨어지겠네. 사람 그만 좀 놀라게 해, 정소유.”
“애는 내가 가졌는데, 왜 네가 그래?”
태오의 반응에 소유가 얄밉게 킥킥 웃었다. 태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휴, 예뻐서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난 너랑 모든 순간을 공유하고 싶단 말이야.”
“그럼 좀 작은 소리로 불러 줄래? 너무 크게 부르면 덜컥 심장 내려앉으니까.”
세상 무서울 것 없는 태오도 소유와 관련된 일이라면 새가슴이 된다. 누군가는 이 모습을 보며 기겁하거나 비웃겠지만, 애처가의 삶이란 어쩔 수 없다.
“어, 방금 또 찼다. 이리 와 봐.”
소유가 달래듯 태오에게 손짓했다. 하여튼 여우인지 곰인지 모를 요물이 자꾸 사람을 홀린다니까.
금세 마음이 사르르 녹은 태오는 고무장갑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소유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소유의 배에 귀를 가져다 댔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이 약하게 뛰었다.
“태랑아. 네 아빠야. 잘생겼지?”
소유의 그 말과 동시에 소유의 배가 심하게 요동쳤다. 모든 게 처음인 초보 부모인 두 사람은 반짝이는 눈으로 마주 보았다.
“거봐. 신기하지?”
소유가 뿌듯하게 물었다.
“이렇게 세게 움직인다고? 이 조그마한 게?”
“안에서 막 혼자 놀기도 한대. 너무 귀엽지.”
귀엽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하고.
태오가 다시 소유의 배에 귀를 가져다 대자, 기다렸다는 듯 태랑이가 조금 더 세게 엄마 배를 팡팡 찼다.
“여보 닮아서 벌써부터 호랑이 기운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차면, 넌 안 아파?”
“아니? 조금 움찔하긴 하는데 아프진 않아. 오히려 기분 좋아. 건강하단 의미잖아!”
진짜로 기쁜지 소유가 태오를 끌어안고 볼을 부비부비했다. 태오가 그녀의 보드라운 볼을 붙잡고 여기저기 입을 맞췄다.
다이어트 소동 이후 볼이 더 통통해져서, 더욱 귀여운 얼굴이 되었다.
“그래도 걱정돼. 요즘 움직이는 게 더 힘들어 보여서.”
“아이고, 이호 아부지. 저는 괜찮아요. 이래서 딸 낳겠어? 가끔 임신한 나보다 네가 더 불안해 보여.”
“그거랑 그거랑은 다른 문제지.”
딸 이야기가 나오면 또 단호해지는 태오다.
어쩌라고. 하나만 하란 말이야. 어이가 없어진 소유는 태오의 코를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그래도 딸은 낳아야지.”
“나중에 딸 남자친구 생기면 울 것 같아, 너.”
“울긴 왜 울어. 토끼 같은 내 딸 뺏어가려는 놈들은 다 잡아다가 혼을 내 줘야지.”
저놈의 소유욕은 아내를 넘어 딸에게까지 내려갈 모양인가 보다.
“다 도둑놈이야, 도둑놈.”
“……우리 아빠도 널 보며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셨을까?”
“…….”
태오가 머쓱하게 웃었다. 역시 사람은 역지사지가 되어야 해. 왜 장인어른이 저를 허락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는지 비로소 완벽하게 이해가 되는 태오다.
맞아. 난 도둑놈이야. 이렇게 예쁜 딸을 훔쳤으니.
“내일 장인어른이랑 맛있는 거 먹으러 가야겠다. 효도해야지. 난 죄인이니까.”
사뭇 진지하게 말하는 태오를 보며 소유는 웃음이 터졌다. 그러다 태오의 까만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툭 말했다.
“그런데 어쩐지 서운하네.”
“뭐가?”
“딸 낳으면 나에 대한 집착이 좀 줄어들 거 아냐. 딸의 몫만큼.”
이런 이야기를 하는 자신도 태오 못지않게 철없고 유치하다는 생각을 하는 소유였다.
하지만 사실인걸. 지금처럼 태오가 오롯이 나만 보는 게 좋은걸. 그 기괴한 소유욕도 모조리 독차지하고 싶은걸.
“질투하냐?”
“그래. 질투한다.”
소유가 입을 비죽 내밀었다. 그러자 태오가 그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주욱 잡아당겼다.
“아파!”
“바보야. 사랑하는 여자를 향한 집착과 딸을 향한 집착은 그 분야가 다르거든. 애초에 근원지가 다르다고.”
태오는 소유가 귀여워 미칠 것만 같았다. 이게 콩깍지라면, 아마 죽을 때까지 안 벗겨질 테다.
“그러니까 즉, 집착의 총량은 변함이 없을 거란 말이야. 딸에게 아무리 집착해도, 너를 향한 집착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을 예정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호 어머니.”
남들이 들으면 다소 오싹할 대화를 주고받으며 부부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다.
“난 말이야. 우리가 아흔 살이 돼서 흰 머리가 잔뜩 나고, 주름이 셀 수 없이 많아져도 널 쳐다보는 놈이 있으면 팔다리를 다 분질러 놓을 거야.”
“오, 왠지 아흔 살의 강태오는 기력이 좋아서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내 말이 농담 같지?”
“…….”
또 진심이네, 얘.
“넌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내 거야, 정소유.”
괜한 걱정을 했네,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