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거룩한 탄생
(78/95)
78. 거룩한 탄생
(78/95)
78. 거룩한 탄생
2022.12.26.
뜨겁던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가을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하늘은 높고 푸르렀고, 벼는 노란 고개를 숙였다. 푸른 잎이 알록달록한 색으로 염색했고, 과일은 탐스럽게 익어갔다.
천고마비의 계절, 부부는 첫째 아들을 맞이하기 위한 여정의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빛나는 햇볕이 내리쬐는 창문 앞 흔들의자 위에서 소유는 세상모르고 잠이 들어 있었다.
태오는 그녀를 깨우지 않기 위해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러곤 소유의 손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책을 조심스럽게 덮었다. 오후만 되면 까무룩 잠이 드는 탓에 소유는 몇 주째 같은 책을 읽는 중이다.
태오는 그녀와 가까운 의자에 털썩 앉았다. 제 눈엔 아직 열아홉 같은 아내의 배는 소중한 존재를 품고 있었다.
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부쩍 버거워하고, 침대에 편히 눕지도 못하는 소유였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그런 소유가 안쓰러운 태오도 덩달아 핼쑥해졌다.
왜 임신은 대신해 줄 수 없는 건지. 돈이 이렇게 많아도 결국 소용없구나.
그답지 않은 실없는 생각을 하던 태오는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아름다운 소유를 눈에 담았다.
연한 솜털부터 제멋대로 고불대는 잔머리까지 태오에겐 그저 사랑스러웠다.
애초부터 자신을 위해 태어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소유의 모든 게 태오의 취향이었다. 아니면 내가 네가 어떤 모습이든 사랑할 수밖에 없게 태어났든지.
결론은 제가 소유를 사랑하지 않는 방법은 끝내 찾을 수 없을 거란 것이었다. 아마도 나는 죽는 그 순간까지 너로 인한 열병으로 뜨겁겠지.
툭.
의식 없이 흐르는 생각을 따라가던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건 타인에게도 생소한 광경이었겠지만, 제일 생소한 것은 태오 자신이었다.
눈에 뭐가 들어가지 않는 이상 웬만하면 울지 않기로 유명한 태오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굴러떨어진 것이다.
태오가 제 손바닥 위로 떨어진 눈물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이유를 찾지 못했다. 왜 눈물을 흘렸는지.
슬프거나 아프지도 않았는데. 오히려 가을 햇살처럼 쏟아지는 행복함을 만끽하고 있었는데.
잠시 후 소유가 잠에서 깨어나려는 듯 손끝을 움찔했다.
그제야, 그제야 태오는 알았다.
눈물이 꼭 부정적인 감정에서 파생되어 흐르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아이를 잉태한 채로 잠이 든 소유의 모습이 너무 경이로워 눈물이 났다는 것을.
감히 함부로 손을 댈 수도 없을 정도로 성스러운 그 모습에 감동했다는 것을.
흑백이던 태오의 세상이 소유를 만나 싱그러운 컬러로 물이 들더니 이젠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과정 속에 있는 모양이다.
갈라진 감정은 태오로 하여금 더욱 섬세한 마음을 가지게 만들었다.
이 세상은 다양한 입장, 감각, 각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타인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공감하는 힘을 길러 주었다.
그건 태오를 조금 더 인간적으로 바꾸어 줄 아주 중요한 계기였다.
“나 또 잠들었지.”
큰 깨달음을 얻은 태오는, 소유가 완전히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멍하게 생각에 잠겨 있었다.
기지개를 쭉 켜던 소유가 요동도 없는 남편의 얼굴을 보고서 갸우뚱했다.
“태오야?”
“…….”
“태오야!”
“어? 깼어?”
조금 더 힘차게 부르고 나서야 태오가 자신만의 세상에서 빠져나왔다.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해?”
“그냥 가을 햇살이 참 청량하다는 생각.”
“뭐?”
어울리지 않게 웬 낭만적인 소리람?
“다른 사람들도 나랑 똑같은 계절을 느끼고 행복해하겠지?”
“……태오야. 너 가을 타? 왜 그래, 갑자기.”
끙차. 힘들게 자리에서 일어난 소유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태오에게 다가왔다. 태오는 소유의 배에 입을 맞추며 강아지처럼 올려다보았다.
“나 앞으로는 진짜 착한 사람 되어야겠다. 이호한테 부끄럽지 않은 아빠 되려면.”
“그러고 보니, 너 울었어? 눈이 빨개.”
“넌 정말 등장 순간부터 내 세계를 완벽하게 뒤흔들어 놨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소유는 태오의 세계를 새롭게 재창조해 낸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소유에게 감사하고, 그런 소유가 소중했다.
“사랑해.”
태오의 격정적인 마음을 알 리 없는 소유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우리 집 양반이 이상해졌어요.
“넌 사랑한다고 안 하니?”
“사랑해, 사랑하지.”
얼떨떨하지만 소유는 태오의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그럼 됐어.”
* * *
태랑이는 아무래도 엄마, 아빠를 조금 더 빨리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예정일보다 하루 먼저 분만실이 열렸다.
소유는 처음 겪어 보는 고통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때 태오는 뭘 하고 있었냐고?
옆에서 열심히 머리카락을 쥐어뜯기는 중이었다. 머리숱이 반으로 준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소유가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면.
“엄마, 조금 더 크게 호흡하세요!”
명 교수가 숨을 헐떡이는 소유에게 크게 소리쳤다. 분만실은 그야말로 전시상황처럼 긴박했다.
그 난리 통에 태오는 소유의 손을 꽉 잡으며 그녀에게 힘을 주려고 노력했다.
“미안해. 사랑해.”
고작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스스로가 무능력하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기 머리 보여요, 엄마.”
막막한 과정이었지만 베테랑인 명 교수의 지도에 따라 소유는 천천히 나아갔다.
밝은 분만실 조명에 눈앞이 아득해지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를 낳을 때도, 우리 엄마도 이렇게 아팠을까. 이렇게 힘들었을까.
누군가의 엄마가 된다는 건 그 시작부터 천국과 지옥 사이를 오갔다. 그래서 더 거룩한 과정일지도.
“엄마, 조금만 더! 다 왔어요.”
다시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오고 가장 먼저 보인 건 태오의 얼굴이었다. 얼굴을 맞대고 저만큼 힘들어하는 얼굴을 보고 있으니 벅찬 마음이 몰려왔다.
소유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고생하셨어요. 건강한 왕자님입니다.”
마침내 분만실에 우렁찬 남자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공간에 있던 모두가 생명의 탄생을 기뻐했다.
분만실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진 여사는, 훌쩍이는 사돈을 토닥였다. 하지만 그런 진 여사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다.
“아빠를 많이 닮았네요.”
명 교수가 조심스럽게 소유의 옆에 태랑이, 아니 이젠 이호로 불릴 어여쁜 아이를 내려놓았다.
아직 보라색의 얼굴빛을 가진 아이였지만, 태오를 닮아 우뚝 솟은 콧대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소유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조심스럽게 아이를 어루만졌다.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아 체중도 정상, 호흡도 정상인 아이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유의 보물이 되었다.
“아빠도 한번 안아 보세요.”
그 말에 망설이던 태오가 팔을 뻗었다. 작지만 나름의 무게를 가진 아이가 울음을 멈추고 아빠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너무나 소중한 나머지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가 몸이 뻣뻣해질 정도였다.
그래도 태오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정말 저를 많이 닮았다.
“소유야, 네 말 이제 이해했어. 얜 얼굴만 나를 닮았으면 좋겠다.”
태오의 말에 지친 소유도 겨우 웃음을 지었다.
“성격은 널 닮았으면 좋겠다. 착하고 따뜻한 애였으면 좋겠다.”
“그래. 그렇게 키우자.”
“그런데 왜 이렇게 예쁘냐. 원래 이렇게 다 예뻐요?”
태오가 명 교수에게 물었다. 명 교수가 익숙한 상황인 듯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첫 아이의 첫 얼굴. 이 세상에서 마주 볼 수 있는 가장 예쁜 생명체 아닐까요?”
“그렇네요.”
태오가 아이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앞으로 소유와 함께 귀하게 키워 내고, 온갖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존재다.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천문학적인 재산도 아이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내려놓겠다.
“사랑 많이 받으며 자라겠네, 우리 왕자님.”
잠시 후 소유는 처치실로, 아이는 신생아실로 옮겨졌다.
터덜터덜 걷다 보니 자리에도 앉지 못한 어머니와 장인어른이 보였다.
“머리를 꽤 뜯겼나 보네.”
진 여사가 평소보다 두 배로 부풀어 부스스한 태오의 머리를 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분명 진 여사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흐트러진 모습’이었는데,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아들이 더 멋져 보였다.
“나도 너 낳을 때 그 양반 머리나 좀 뜯을걸. 그럼 속은 시원했을 텐데.”
옛일을 이젠 농담 식으로 말할 수 있게 된 진 여사의 뒤에서 희훈이 팔을 뻗었다. 그러곤 사위의 머리를 정리하고선 그를 꼭 안아 주었다.
태오가 지친 몸을 장인에게 기댔다.
“강 서방도 수고 많았네.”
그 말에 피로가 전부는 아니지만 일정 부분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손주를 안아 보는 날이 오다니.”
그렇게 강화 가(家)의 새로운 아이, 강태오와 정소유의 첫째 아들 강이호는 양가 부모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났다.
* * *
“으아앙!”
“도대체 왜 우는 거야.”
애석하게도 진정한 고생은 출산이 아닌 그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밥도 잘 먹고, 어디 아픈 곳도 없는 이호였지만…… 딱 하나, 문제가 있었다.
“태오야. 내가 안고 있을게.”
“아냐. 너 얼른 밥 먹어.”
바로 시도 때도 없이 울어 댄다는 것이었다.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을 땐 얌전한데 내려놓기만 하면 세상이 떠나가라 울기 시작했다.
패기 넘치던 초보 부모의 얼굴도 점점 퀭해지기 시작했다. 서로가 없으면 밥 한 끼 먹기 힘들 정도였다.
소유는 넘어가지도 않는 밥을 꾸역꾸역 먹었다. 그래야 쫄쫄 굶은 태오도 이어서 식사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찬은 사치, 스피드가 생명.
정말 생존하기 위해 밥을 먹던 소유가 체하기 직전, 다행히도 구세주가 나타났다.
“제가 안고 있을게요. 두 분은 식사하세요.”
이제 막 출근한 가사도우미였다. 그녀는 자녀를 셋이나 키워 낸 전문가였다.
“여사님.”
소유는 울먹이며 감사함을 표했다. 가사도우미는 싱긋 웃으며 태오에게서 이호를 데려왔다. 아무래도 더 능숙한 품에 안겨서인지 아이는 안정을 되찾았다.
거의 좀비가 된 태오는 소유 옆에 털썩 앉았다. 육아는 천하의 강태오도 좀비로 만든다.
“참, 베이비시터는 고용하셨죠? 이러다 두 분 다 쓰러지시겠어요.”
심지어 태오는 평범한 직원이 아니라 최고 경영자라 일을 완전히 놓을 수도 없었다. 덕분에 태오는 일과 육아를 병행해야 했고, 태오가 출근한 사이 육아는 오롯이 소유의 몫이 되었다.
두 사람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었던 터라 아직 쓰러지지 않은 게 용했다.
“네. 내일부터 오시기로 했어요.”
소유가 겨우 대답하는 사이 태오는 그녀가 먹던 밥을 자연스럽게 가지고 가 입에 욱여넣었다.
“야. 그거 내 밥이야.”
“같이 먹어, 좀. 새로 가지러 갈 힘 없어.”
태오는 소유의 입에 달걀말이를 넣어 주며 달랬다. 이 얼마 만에 먹어 보는 정상적이고 따뜻한 밥이던가.
부부는 밥 한 공기를 알콩달콩 나눠 먹으며 소박한 행복을 만끽했다.
가사도우미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강화 그룹 장남 부부의 일상이 저토록 현실적인 모습일 줄 누가 상상이나 할까.
“그나저나 우리 도련님은 누굴 닮아서 이렇게 예민할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가사도우미의 말에 태오와 소유가 짜기라도 한 듯 서로를 가리켰다.
“널 닮았어.”
“아니야. 너지. 난 하나도 안 예민했어.”
“난 울지도 않았어.”
“치, 웃기네. 어머니한테 물어봐, 내가?”
“나도 장인어른한테 전화 걸어?”
부부는 꽤 심각하게 식사가 끝날 때까지 토론했다. 가사도우미는 생각했다. 아마 평생 답이 안 날걸.
“너도 웃기지?”
즐거운 광경을 보는 것처럼 아이가 방긋방긋 웃었다. 언제 울었냐는 듯. 가사도우미는 작고 포근한 향이 나는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니까 그만 울어. 엄마, 아빠 탈 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