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재벌의 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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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재벌의 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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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재벌의 육아
2022.12.30.
강화 호텔은 이른 아침부터 어딘가 모르게 어수선했다. 예상하지 못한 손님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안녕.”
“너 진짜 귀엽다.”
갓난아기 주제에 귀엽고, 잘생기고, 분위기 있고, 혼자 다 해 먹는 이호로 인해 직원들의 얼굴엔 환한 웃음꽃이 만개했다.
아침의 피곤을 한 번에 날려 줄 용안이었다.
하긴, 성격은 몰라도 얼굴로는 웬만한 연예인 뺨을 후려칠 강태오 부사장과 꼭 빼닮았으니 그럴 만도.
이호도 제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걸 아는지 평소보다 얌전했다.
“거기, 잠깐. 만지진 말지? 손 씻었어?”
무심결에 손을 뻗었던 프런트 직원이 차가운 목소리에 황급히 손을 거둬들였다. 잊고 있었다. 그 사랑스러운 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이가 자신의 호랑이 같은 상사라는 것을.
“죄, 죄송합니다.”
“일들 해. 오늘 예약 많던데.”
“네. 알겠습니다.”
태오는 매정하게 말하고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아들을 안고 있는 손은 한없이 조심스럽고 다정하기만 했다.
“그나저나 애를 데리고 출근을 할 줄이야. 웬일이래.”
“그러게. 안 어울리게.”
“나 아까 놀라서 턱 빠질 뻔했잖아.”
목을 쭉 뺀 직원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오는 이호에게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제발 울지만 마라. 응? 엄마도 없는데.”
사실 태오의 이 파격적인 행보는 여러 가지 우연이 겹쳐 만들어진 필연적인 사고였다.
오늘 장인인 희훈이 큰 검사를 받으러 병원에 갔고, 소유는 유일한 보호자로서 당연하게 동행해야 했다.
가사도우미는 휴가 중이었으며, 베이비시터는 하필 오늘 오전 맹장이 터져 응급실에 갔다는 연락을 전해 왔다.
당장 새로운 베이비시터를 구하느라 전전긍긍인 소유에게 태오는 말했다. 제가 데리고 출근하겠노라고.
물론 소유는 반대했지만, 가뜩이나 아버지 건강 문제로 걱정이 많을 아내를 신경 쓰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태오는 호기롭게 기저귀 가방을 들고서 집을 나섰다.
“잘한 걸까.”
태오가 중얼거렸다. 소유 앞에서 보였던 호기는 사라진 지 오래고, 태오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게다가 오늘은 중요한 회의까지 잡혀 있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 이호는 왜 데리고 왔어요?”
이런 사정을 모르는 손지욱 비서는 반짝이는 눈망울로 낯선 공간을 둘러보는 이호를 보고 얼어붙었다.
“이호를 볼 사람이 없어서.”
“……네?”
돈도 많은 양반이 무슨 소리야.
“아무한테나 맡길 순 없잖아.”
손 비서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태오가 당당하게 말했다.
그런 태오를 보고 있자니 웃기기도, 신기하기도 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던 이 양반도 아빠가 되니 이렇게 변하는구나.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는 생각과 동시에, 이런 변화를 일으켜 준 소유를 만난 것이 태오 인생 중 가장 큰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 깨끗하게 씻고 들어와.”
엄포를 놓은 태오는 문을 쾅 닫았다.
참나. 헛웃음을 지은 손 비서는 손을 씻으러 걸음을 옮겼다.
홀로 집무실에 들어온 태오는 소파 위를 열심히 닦고, 또 닦은 후에야 조심스럽게 이호를 내려놓았다. 태오가 조심스럽게 옆에 앉아 이호가 불편한 건 없는지 살폈다.
그 사이 손을 뽀득뽀득 씻고 돌아온 손 비서가 맞은편에 앉았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내 새끼가 이렇게 예쁠지 어떻게 알았겠어.”
“아빠 다 되셨네.”
“손 비서도 첫째 낳고 참 힘들었겠어.”
손 비서가 잠시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제 고충을 알아주시는 건 참 고맙습니다만.
“너무 늦은 위로 아닌가요?”
우리 애는 벌써 어린이집을 다니는데요.
태오가 픽 웃었다. 아빠의 웃음소리에 이호가 고사리 같은 손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래도 귀엽긴 하네. 태오의 어릴 적 모습이 딱 저랬으리라 생각하는 손 비서였다.
그때 태오가 일어나 커다란 가방을 이리저리 뒤지기 시작했다.
“뭐 하시려고요?”
“분유 타려고. 곧 분유 먹을 시간이라.”
“하실 줄은 아세요?”
“해 봤어.”
“주세요. 제가 할게요.”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태오가 미덥지 않았던지 손 비서가 분유통을 받아들었다. 차라리 제가 하는 게 마음은 더 편할 것 같았다.
게다가 이호는 태오의 장남이 아닌가. 즉, 저 통통한 볼로 천진난만하게 웃는 아이가 이 강화 제국의 황태자란 말씀. 분유를 타 준 오늘의 일화를 두고두고 써먹을 거라는 큰 그림을 그렸다.
야심 가득한 손 비서가 떠나고, 주머니에 넣어 둔 태오의 전화기가 울렸다. 태오는 이호의 심기를 거스르기 전에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 출근은 잘했어? 괜찮아?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지 전화를 걸어온 소유였다. 와이프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태오의 창백한 얼굴이 화사해졌다.
“응. 당연하지. 장인어른은?”
― 지금 초음파 보러 들어가셨어.
“건강하실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이호도 걱정하지 말고.”
― 그런데 직원들이 불편해하는 거 아니야? 이호 때문에.
“아니? 다들 귀여워하던데?”
태오는 보드라운 이호의 볼을 아프지 않게 잡았다.
“그리고 얘도 즐기는 거 같아. 울지도 않고, 아주 좋아해.”
태오의 말에 소유가 작게 웃었다.
― 오늘 일찍 끝나면 아빠 집에 모셔드리고, 내가 회사 앞으로 갈게.
“좋지. 설레네. 와이프가 데리러 와 준다니.”
― 오늘 우리 태오 좀 많이 예뻐해 줘야지. 고생하는데.
“와, 드디어 내가 1순위가 되는 거야?”
이호가 태어난 이후 내내 자신이 소유의 2순위가 되었다는 사실에 울적하던 태오였다.
― 유치하긴. 이따 봐.
“그래. 장인어른한테 안부 전해드리고.”
각자의 하루를 보내고 저녁에 다시 만나.
* * *
“강화 호텔 자체 앱을 통해 예약할 경우…….”
“꺄아.”
“협력 항공사와의 제휴로 인한 할인을…….”
“바바…….”
분명 군더더기 없는 프레젠테이션이었는데, 문제는 부사장의 품에 안겨 있는 조그마한 존재였다.
마케팅팀 팀장의 말을 아주 우렁차게 끊어 주시는 탓에 시원하게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저, 부사장님…….”
“왜. 듣고 있어요.”
“그, 아드님은 잠깐 밖으로…….”
“듣고 있다니까? 앱으로 예약하면 비행깃값을 할인해 주는 휴가 이벤트를 연다는 거 아닌가?”
요지는 잘 파악하고 있으니 할 말은 없다만.
어째 제가 발표를 하는 날에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건지 알 수 없는 김 팀장이었다. 왠지 데자뷔 같은데, 이거.
“애가 있으면 일도 하지 말라, 이건가?”
“네? 그런 건 아닙니다만.”
몰랐지. 부사장이 저토록 헌신적인 아버지였을 줄이야.
“일단 앱 서버가 불안정하니 기술팀에서 그걸 바로잡고, 모든 준비가 끝나면 진행하도록 합시다. 지난번처럼 쓸모없는 앱이라는 욕을 듣는 바에는 안 하는 게 나으니까.”
그러면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간파하는 업무능력은 그대로니. 그야말로 슈퍼 파파가 아닐 수 없다.
태오의 맞는 말에 김 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저 메모만 했다.
“제대로 준비해서, 제대로 해 봅시다.”
“예.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애 키우면서 회사 다니기가 참 힘들군. 우리 회사 육아 복지가 어떻게 되지?”
사람은 역시 그 입장이 되어 봐야 안다고, 이젠 회사의 복지마저 다 뜯어고치려는 모양이다. 뭐, 그 시작이 어떤 의도였든 회사로서는 좋은 방향임이 틀림없다.
“그럼 회의는 여기까지. 그리고 다들 쓸데없이 야근하지 말고 정시에 재깍재깍 퇴근해.”
확실한 건 태오가 결혼을 한 이후부터 긍정적인 변화가 많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강 부사장은 결혼을 참 잘했고, 강 부사장의 아드님께서는 참 귀엽다.
* * *
그래도 태오는 이호를 안고 다니면서 모든 스케줄을 다 소화했다. 맨몸으로도 힘든 살인적인 스케줄을 아이와 함께 실수 없이 해내는 걸 보니 대단한 사람이긴 했다.
이호가 잠시 까무룩 잠이 든 퇴근 시간 즈음. 밖은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고, 직원들은 부사장의 명대로 정시 퇴근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태오의 집무실 문이 스르르 열렸다. 분명 절대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태오의 지시가 있었지만 유일하게 그의 말을 어겨도 되는 사람이었기에 손 비서는 얌전히 문을 열어 줬다.
살금살금 다가간 방문자는 닮은 모습으로 눈을 감고 있는 부자를 보며 따뜻하게 웃었다.
“둘 다 고생했네, 오늘.”
소유는 그대로 잠든 태오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자 태오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익숙한 포근한 향기에 태오는 하루 동안의 피로가 싹 풀리는 듯했다.
“언제 왔어?”
“방금. 얼른 집에 가서 쉬자.”
“장인어른은 괜찮으셔?”
“응. 별문제 없으시대.”
“다행이다.”
아이가 깨지 않도록 소곤소곤 대화하는 것은 이제 부부의 일상이 되어 버렸다.
몇 시간 못 봤다고 그리워진 아들을 안으려는데, 불쑥 태오가 소유의 손을 잡았다. 소유가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태오가 대뜸 입을 맞췄다.
촉. 누군가의 부모가 되어서도 아직도 입을 맞추면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너는 내 아이의 엄마이자 영원한 나의 연인.
애틋한 태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유가 살짝 그를 밀어냈다.
“왜 이래, 여기서!”
“뭐 어때. 이호는 자는데.”
“그래도 일하는 곳이잖아. 밖에 손 비서님도 있고.”
“뽀뽀 정도로 웬 호들갑이야.”
지금 더한 것도 할 수 있지만 참고 있는데.
태오는 요리조리 피하는 소유를 막무가내로 잡아 이곳저곳에 입을 맞췄다. 그를 말리는 척하면서도 소유의 얼굴엔 은근한 미소와 홍조가 떠올랐다.
“너도 좋은데 괜히 그러지?”
“뭐래. 아니거든.”
“거짓말.”
태오의 시선이 오랜만에 나른하게 변했다. 그동안 그들은 생존을 위한 전우에 가까웠다.
다들 그렇게 부모가 되어가니 딱히 불만은 없지만, 뜨겁고 정열적이던 이런 순간이 이따금 그립기도 했다.
“눈빛이 불순하군요, 이호 아버지.”
“아직도 너만 보면 막 건들고 싶어.”
헙. 침실에서나 할 법한 낯부끄러운 말에 소유가 다급하게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소유도 태오 못지않게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와 처음 만나, 그의 야한 시선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태오는 여러모로 소유에게 곤란한 상대다.
“이호는 언제쯤 혼자 잘 수 있을까?”
소유의 손을 아래로 내린 태오가 그렇게 말했다.
“아직 멀었어.”
소유는 내외하듯 남편에게서 후다닥 멀어졌다. 그러자 애가 탄 태오가 손을 뻗었다.
“이리 와. 조금만 더 안고 있자.”
“아, 안 돼.”
“왜 안 돼?”
그야, 너를 따라 나도 덩달아 달아오르니까.
나라도 이성을 잡아야지.
“야, 정소유. 나 진짜 하루 종일 너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나도 그랬어.”
“그럼 이리 와 봐. 이호 깨기 전에 얼른.”
태오는 마치 순수한 소녀를 꾀어 내는 나쁜 호랑이 같았다. 잠시 망설이던 순수한 소녀는 홀린 듯 호랑이의 앞으로 끌려갔다.
태오는 소유를 끌어안은 채로 소파에 툭 쓰러졌다.
“오늘따라 유독 더 예쁘네.”
서로의 호흡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그렇다고 숨을 참자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숨 쉬어야지.”
태오는 매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곤 소유의 목을 잡고 제게로 끌어당겼다. 이윽고 부부의 입술이 맞물렸다. 방금 전의 가벼운 뽀뽀와는 농도가 다른 짙은 키스였다.
머리로는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소유의 팔은 본능적으로 태오를 꽉 끌어안았다. 태오는 만족스러운 듯 소유의 안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그 열기가 어찌나 대단했던지 집무실이 후끈해질 정도였다.
점점 농염해지는 태오의 움직임을 받아 내며 소유는 생각했다.
내 남편은 그저 눈으로만 보기엔 너무 야하다.
어쩌면 진짜 곤란한 건 네가 아니라 나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