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경미한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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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경미한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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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경미한 사고
2023.01.02.
소유가 씻고 나왔을 때, 사랑스러운 부자는 얼굴을 맞대고 잠들어 있었다.
무방비 상태로 곤히 잠든 태오의 손 위에 아주 작은 아이의 손이 겹쳐 있었다.
“잘 잔다.”
업무와 육아를 동시에 하느라 고단했을 태오도, 낯선 환경에서 열심히 두리번거렸을 이호도.
그래도 오늘은 이호의 잠투정이 덜할 것 같다. 그럼 태오도 오랜만에 푹 쉴 수 있겠지.
소유는 흐뭇한 미소를 짓다가 침대 아래로 떨어진 옷가지들을 주우며 혼자서 하루를 마무리할 준비를 했다.
어수선한 집 안이 정리되고, 마침내 환한 조명이 꺼지고서야 소유도 부자 옆에 누웠다. 태오와 소유 사이에 껴 있는 이호는 애초에 그곳에 존재했던 것인 마냥 자연스러웠다.
이호의 통통한 볼에 입을 맞추고, 마지막으로 남은 스탠드 조명을 끄려는데, 몹시 보드라운 체온이 소유의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놀라 옆을 바라보자 언제 깼는지 커다란 눈을 깜박이는 이호와 눈이 마주쳤다. 이호는 엄마와 아빠의 손을 공평하게 잡아 주려고 나름 애쓰고 있었다.
“깼어?”
이호의 손등을 살살 쓰다듬으며 소유가 속삭였다. 웬일로 울지도 않는 이호는 엄마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예쁘네, 우리 이호.”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꼭 아이가 제 말을 알아듣는 것만 같았다.
세월이 더 흘러 이호와 대화를 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얼마나 기쁠까. 더 나아가 이호에게 기댈 수 있는 날이 오면 얼마나 든든할까.
건강하게 성장한 아이는 생각만 해도 찬란했다.
“오늘 아빠랑 재미있었어?”
“……부우.”
물론 이 아이는 평범한 아이와는 다를 테다. 무수히 많은 것을 가지고 태어난 만큼 또 그만큼 무수히 많은 것을 책임져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때론 그게 아이의 어깨를 무겁게 억누를지도 모른다.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방황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엄마는 우리 이호 무지 보고 싶었어.”
그럴 때마다 이호를 잡아 주는 게 태오와 소유의 역할이었다.
태오처럼 혹독한 후계자로서의 삶만 살게 하진 않을 것이다.
이따금 초록빛으로 돋아난 새싹, 탐스럽게 영근 과일, 바닥에 켜켜이 포개진 알록달록한 낙엽, 소복소복 쌓인 하얀 눈 등 변하는 계절로 눈길을 돌릴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힘들 땐 포기해도 되고, 가끔 실패도 해도 된다는 것을 알려 줄 것이다.
같은 위치에서 태어났지만, 태오와는 다른 삶을 살게 하리라 부모는 다짐했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과 공간에서 하염없이 울고만 있는 건 아닐지 걱정했어.”
소유가 이호의 손에 입을 맞췄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포근했다. 과거의 트라우마로 망설이던 것이 후회될 정도였다.
놀라울 정도로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는 순조롭게 흘러가는 중이다.
공연옥이란 어두운 존재는 강이호란 밝은 존재 앞에서 날이 갈수록 희미해졌다.
“어떻게 내가 너처럼 사랑스러운 아들을 만났지.”
두려움에 떨던 자신의 손을 이끌며 용기를 주었던 남편에게 가장 고마웠다.
“내게 와 줘서 고마워, 태랑아.”
태오야. 우린 잘하고 있는 거겠지.
지난 염려가 우스우리만큼 썩 괜찮은 부모가 되어 가는 중이겠지.
“너도 처음이고, 우리도 처음이라 많이 서툴지만, 앞으로도 잘 부탁해.”
우린 이렇게 나아가는 거겠지.
앞으로, 앞으로.
점점 늘어 가는 가족들의 손을 꼭 잡으며 순항 중인 거겠지.
“사랑해, 이호.”
설익은 호감이 농염한 사랑이 되고, 그 사랑이 가족이 되고, 또 그 가족이 인생이 되는 이 순간, 우린 늘 그렇듯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겠지.
그래. 그러면 된 것 같아.
이 순간을 위해 우리의 무수한 필연이 하나로 이어진 것이라면, 힘들었던 지난 과거쯤은 웃어넘길 수 있을 것 같아.
“바뱌…….”
이호의 흔한 옹알이가 ‘나도 사랑해, 엄마.’로 들리던 그 밤, 소유는 또 한 번 더 성장했다. 그리고 어떤 부귀영화를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족의 체온을 만끽했다.
“그래. 고마워. 엄마한테 사랑한다고 해 줘서.”
* * *
신제품 출시를 앞두고, 선오는 집무실에서 밤을 새우는 일이 허다했다.
확실히 이전보다 더 큰 책임감을 가지게 된 것도 있었고, 심란한 마음을 잠재우기엔 격무만 한 것이 없었다.
넥타이까지 풀어 아무렇게나 던지고 서류를 들여다보던 선오의 휴대폰이 울린 건 새벽 3시 즈음이었다.
전화가 오기엔 너무 야심한 시간이었기에 선오는 무시할까, 하다가 이상하게 신경 쓰여 통화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야?”
―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아셔야 할 것 같아서. 강화 백화점 강준오 이사님께서 지금 병원에 계신다고 합니다.
“뭐?”
선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열심히 보고 있던 서류가 날리며 아래로 툭 떨어졌다.
― 회식하시고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가 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심각하게 다치시진 않으셨고 경미한…….
애석하게도 뒤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선오가 정신없이 밖으로 뛰어나갔기 때문이다.
선오의 차가 향한 곳은 지수의 집 근처 대형 병원의 응급실이었다. 응급실답게 그 공간은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 흐르는 피 등으로 혼잡했다.
그 사이에 준오가 있을까 봐 더욱 초조해진 선오가 지나가던 간호사를 붙잡고 물었다.
“강준오 어디 있어요?”
“네?”
“강준오! 나랑 닮은 놈, 지금 어디 있냐고요.”
그렇게 말하니 간호사는 단숨에 그가 누구를 찾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응급실에 이 남자를 닮은 미남은 딱 한 명이었으니까.
“저기 계세요.”
불안한 선오와 달리 간호사는 무척 차분하게 커튼이 쳐진 구석 자리를 가리켰다.
더 들어볼 것도 없이 선오는 준오를 향해 달려갔다. 저를 버리고 노지수에게 간 것 같아, 원망도 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다치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
만약 준오가 피 칠갑을 하고 있거나 생사가 오가는 상태라면 저는 반쯤 돌아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커튼을 홱 젖혔다.
“강준오!”
살면서 그토록 동생을 애타게 불러 본 적이 있었나 싶다.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형까지 왔어?”
“…….”
그런데 곧 선오 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가 상상했던 것과는 좀 달랐다. 준오는 피 칠갑은커녕 얼굴에 작은 밴드 하나 붙이고 있었다.
“별로 심각한 사고도 아닌데, 온 사람한테 전화 다 돌렸네.”
선오는 터벅터벅 동생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동생의 어깨를 잡고 이리저리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래도 제 눈으로 전부 확인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얼마나 다쳤어?”
“보다시피 그냥 타박상.”
“안에 있는 장기는 다 멀쩡하냐?”
“뭐야. 그 살벌한 물음은.”
그때 옆 커튼이 열리더니 준오의 운전기사가 머쓱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도 준오만큼이나 경미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냥 뒤에서 차가 살짝 박았어. 혹시나 모르니까 병원에서 좀 대기하다 가라고 해서 기다리는 중이고.”
준오의 설명을 듣자마자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선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뒤로 넘기다 침대에 털썩 앉았다.
그런 형을 보던 준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형 얼굴 보니까 좋다.”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냉정하게 굴었으면서 제가 다쳤다는 소식에 모든 걸 다 제쳐 두고 달려온 형이 고마우면서도 애틋했다.
살은 왜 이리 빠졌는지. 면도는 또 왜 안 해서 얼굴이 이토록 엉망인지.
준오도 선오만큼이나 형을 걱정하고 있었다.
“잘 지냈냐?”
“너는, X끼야. 평소엔 회식도 안 가던 게…….”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터져 나오는 말을 하던 도중, 선오의 눈에 한 인영이 들어왔다. 준오를 걱정하느라 신경 쓸 겨를도 없던 구석에 앉아 있던 지수였다.
등장부터 선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지수가 먼저 아들의 눈을 피했다.
“알겠지만, 엄마야. 형.”
선오와 지수가 따로 만났다는 것을 알 리가 없는 준오가 조심스럽게 지수를 소개했다. 지수는 준오의 사고 소식을 듣고 신발도 제대로 갖춰 신지 못하고 달려왔다.
선오의 눈이 아래로 내려가 생채기가 난 지수의 발을 바라보았다.
“내 보호자.”
“나는? 나는 너한테 뭔데?”
준오는 혹여라도 선오가 그대로 떠나 버릴까 무서웠다.
“형은 내 형. 그리고 내 반쪽.”
“…….”
하지만 다행히도 선오는 생각에 잠긴 듯 얌전히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의사가 와서 준오의 상태를 확인하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말을 해 줬다. 선오는 먼저 나서서 준오를 부축하며 응급실 밖으로 나왔다.
유달리 하늘의 별이 많이 보이던 밤이었다.
“또 다치면 죽여 버린다.”
선오는 뒷좌석에 준오를 태우며 걱정 어린 협박을 했다. 지수는 멀찍이서 우애 좋은 형제를 바라보았다. 둘 사이가 정말 좋아 보여서 엄마로서 안도했다.
주책맞게도 눈물이 났다. 저렇게 단단한 사이가 되기까지 서로에게 얼마나 의지했는지 알 것 같아서.
“뭐 해요?”
문득 선오가 뒤로 돌아 눈물을 훔치는 지수에게 퉁명스럽게 물었다.
“준오 잘 부탁해. 난 신경 쓰지 말고.”
그리고 저는 걸어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힘겹게 화해한 형제들의 시간에 제가 끼면 방해만 될 것이라는 걸 알았다. 또, 선오도 차에 저를 태워 줄 생각이 없을 테고.
“안 타요?”
그런데 들려온 선오의 말은 무척 뜻밖이었다.
“뭐?”
“빨리 타라고요. 얘도, 나도 피곤하니까.”
그에 준오도 놀란 듯 제 형을 응시했다.
“그래야 출발을 하죠.”
그러나 선오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운전석에 올라탔다. 지수는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했다.
“엄마.”
준오가 조심스럽게 엄마를 불렀다. 어떤 의도이든 선오가 조금이나마 마음을 열어 줬다.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얼른 와요.”
준오의 손짓에 방황하던 지수의 발걸음이 선오의 차를 향해 움직였다. 가까이 다가서자 준오가 손을 휙 잡아당겼다.
“……고맙다.”
인사를 건네지만 선오는 말없이 차를 출발시킬 뿐이었다. 지수는 눈물을 꾹 참은 채 운전을 하는 첫째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능숙하게 핸들을 돌리는 선오의 모습이 엄마에게 깊이 박혔다.
“형 운전 잘하죠? 처음부터 잘했어요. 사고 한 번 안 내고. 소질 있대요.”
선오에 대해 궁금할 엄마를 알기에 준오는 기특하게도 이런저런 말을 건넸다.
“나는 처음에 차선 바꾸는 것도 힘들었는데, 형은…….”
“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물론 곧바로 선오가 말을 끊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지수는 만족스러웠다. 아무것도 모르던 첫째 아들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으니까.
준오가 위로하듯 엄마의 손을 꼭 잡았다.
“형 일하다가 왔지? 요즘 바쁘다며. 그래도 밥은 좀 먹고, 잠도 좀 자고, 면도도 해라.”
“나 아직 너한테 화 풀린 거 아니니까 작작 해.”
사실 엄마 핑계를 대고 있으나 선오를 더 보고 싶었던 건 준오인지도 모른다.
“나 데려다주고 다시 집에 가면, 날 밝을걸.”
“알면 좀 닥쳐. 가뜩이나 피곤해 죽겠는데, 너 뭐 예쁘다고…….”
“그럼 그냥 자고 갈래, 형?”
“…….”
“나랑 엄마네 집에서. 그럼 한 시간이라도 더 잘 수 있을 거 아냐.”
준오도 나름 용기를 내서 한 말이었다. 놀라운 마음 반, 설레는 마음 반으로 지수는 선오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참 후에야 선오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내가 개소리 작작 하라고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