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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교복 데이트 (82/95)


82. 교복 데이트
2023.01.09.



 


“이호는 신경 쓰지 말고 오늘 하루 마음껏 놀고 와.”

이호와 함께 소유의 본가를 찾았던 날, 태오의 장인은 대뜸 그렇게 말했다.


“가끔은 이런 날도 있어야지.”

제가 아이를 봐 줄 테니 오붓하게 둘이서 데이트를 하고 오라고.

아이가 태어난 이후 오롯이 육아에만 전념해 온 부부를 위한 배려였다.


“왜, 내가 네 아들 불편하게 할까 봐? 이래 봬도 나도 육아 경험 있어. 네 기저귀도 직접 갈았었다고.”

걱정스러운 딸의 시선을 읽었는지 희훈이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게 아니라 아빠 몸도 안 좋으신데…….”

“언제까지 아빠를 환자 취급할 거야? 저번에 병원에서도 괜찮다고 했잖냐.”

희훈이 얌전하게 안겨 있는 이호의 등을 토닥였다. 이만했던 소유를 안았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참 빠르다.

흰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주름이 느는 동안 딸은 누군가의 엄마가 되었다.

하마터면 이 광경을 보지 못하고 죽을 뻔했던 희훈이었기에 모든 순간이 소중했다.


“이따가 준이랑 훈이도 온다고 했으니까, 마음 놓고 강 서방이랑 데이트해.”

“그래도…….”

무어라 덧붙이려는 소유의 손을 꽉 잡은 태오가 씩 웃으며 대신 감사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올게요.”

“그래. 우리 소유 바람 좀 쐬게 해 줘. 부탁하네.”

반질반질한 이호의 눈동자가 계속 생각날 것 같지만, 기적처럼 찾아온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유치하지만 소유의 관심을 홀로 독차지하고 싶었다.

태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유는 챙겨 온 가방에 부족한 것이 없는지 살피느라 바빴다.


“아빠, 분유는…….”

“하루는 짧단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는 하루는 더더욱.”

그제야 어쩔 수 없다는 듯 소유가 통통한 이호의 볼을 붙잡고 짧은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럼 잘 부탁해요, 아빠.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하시고.”

“오냐.”

그때 희훈이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지폐 네 장을 꺼내 태오에게 내밀었다.


“이걸로 맛있는 거 먹고 오게. 더 주고 싶지만, 알다시피 난 이제 직업도 없는 백수라.”

이십만 원. 누군가에겐 큰돈이고, 누군가에겐 작은 돈일 액수.

물론 태오에겐 있으나 마나 한 미미한 금액에 가까웠다.

하지만 태오는 기꺼이 장인이 내미는 꾸깃꾸깃한 지폐를 받아 들었다. 그 돈에 담긴 장인의 진심이 퍽 따뜻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저나 소유나 배 터지게 먹을 수 있겠네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돈이 많은 사람한테 고작 이십만 원 주려니까 부끄럽네.”

“아니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태어나서 용돈이란 거, 처음 받아 봐요.”

그 말에 희훈과 소유가 놀란 표정으로 태오를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겠지만 사실이었다. 늘 부유하게 살아온 태오였지만, 부모님께 직접 용돈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많은 걸 쥐고 있었고, 그것은 ‘상속’이란 이름으로 귀속되었다.

강 회장이나 진 여사가 직접 지갑을 꺼내 돈을 준 적은 없었다. 당연히 용돈 뒤에 따라오는 따뜻한 말도 없었다. 태오의 부모도 진심이었겠지만, 지금처럼 직접적으로 그 온기가 느껴진 적은 없었다.


“용돈 받는 게 이런 기분이었구나. 돈이 많아도 용돈은 기분 좋은 거네요.”

“자주 줘야겠네. 이렇게 좋아하니.”

잠시 후 부부는 신혼 때처럼 팔짱을 끼고 함께 집을 나왔다. 그때까지도 태오는 희훈에게 받은 지폐를 조심스럽게 손에 쥐고 있었다.

소유가 눈을 찡긋하다 물었다.


“아빠가 용돈도 주셨는데, 그걸로 뭐 사 줄 거야? 맛있는 거 사 줄 거지?”

“아니.”

“뭐?”

전혀, 진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단호한 대답에 소유가 얼떨떨하게 걸음을 멈췄다.

그런 소유를 보며 씩 웃던 태오는 지폐들을 제 지갑에 집어넣었다. 그때부터 그 돈은 태오에게 지갑에 늘 넣고 다니는 행운의 부적 같은 것이 되었다.


“이걸 아까워서 어떻게 써? 맛있는 걸 사 주긴 할 텐데 이 돈 말고 내 돈으로 사 줄게.”

“그렇게 좋아?”

가진 것에 비해 소박한 태오가 귀여우면서도 안쓰러웠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이호도 용돈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 그 외의 재산은 성인이 될 때까지 우리가 관리해 주고.”

태오의 제안에 소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젠가는 태오와 대화를 나누고, 한 번쯤은 다투기도 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마음이 잘 맞는 부부라고 한들 양육에 대한 이견은 발생하기 마련이다. 서로 살아온 인생과 가치관이 다르므로.

소유는 태오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양보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일이 원만하게 풀릴 줄이야.


“매달 정해진 돈을 계획적으로 쓸 수 있게 교육하는 거야. 돈의 소중함도 알고, 부모한테 용돈 받는 기분도 느낄 수 있게. 네 생각은 어때? 생각이 다르다면 말해 줘도 돼.”

“아니! 완전 찬성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본격적으로 회사를 물려받으면 재벌로 살아야겠지만, 그 전엔 평범하게 살고 두고 싶어.”

무계획적으로 쓰고 난 뒤의 후회, 추가 용돈을 받기 위해서 하는 소소한 노동 등을 경험할 수 있는 시절은 이호의 인생에서 청소년기가 유일할 테니까.


“아, 근데 우리는 왜 또 이호 이야기하고 있냐. 장인어른께서 일부러 시간까지 내주셨는데.”

문득 태오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게.”

이호가 태어난 이상 더는 이호가 태어나기 전으로 완벽하게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아무리 부부가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도 가슴 한편엔 아들의 자리가 비워져 있으리라.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고 진짜 데이트하러 가자. 뭐 할래?”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돼?”

“응.”

그렇단 말이지. 소유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뭐든?”

“그래. 뭐든.”

“무지 유치한 거 해도 되지?”

“왜 그렇게 웃어? 불안하게.”

 

* * *



“야. 아무리 그래도 이 나이에 이건 아니지 않냐?”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자괴감이 든 태오가 중얼거렸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정소유. 앞으로 ‘뭐든’이란 말을 조심히 써야겠다.

도통 앞으로 나아갈 줄 모르는 태오를 돌아보며 킥킥 웃던 소유가 그의 손을 이끌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연인들이 꼭 한 번씩은 와 본다는 놀이공원이었다. 동화 같은 아기자기한 건물에 둘러싸인 그곳은 마치 현실이 아닌 환상의 나라 같았다.

재회하자마자 연애할 시간도 없이 곧바로 결혼에 골인한 두 사람은 처음 와 보는 데이트 명소였다.

그래. 놀이공원은 그렇다고 쳐. 그런데 이건 아니지.

태오가 고개를 숙여 제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왜. 우리 태오 아직도 고등학생 같은데.”

소유가 입으라고 내민 옷은 다름 아닌 교복이었다. 그것도 ‘강태오’라는 유치한 명찰이 달린.

실제로 태오는 진짜 고등학생 시절에도 교복을 입은 적이 없었다.


“자, 이것도 끼고.”

얼씨구. 한술 더 뜬 소유는 태오의 머리에 곰돌이 귀 머리띠를 씌워 줬다. 그러곤 자기 머리엔 쫑긋한 토끼 머리띠를 씌웠다.


“귀여워, 우리 태오.”

살면서 그토록 머쓱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소유가 이렇게나 좋아하니 거절할 수도 없는 태오였다.

그저 부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만 없길 바랐다. 사진이 찍혀 돌아다니면 그것만큼 흑역사도 없을 테니.


“이걸 왜 하고 싶었던 거야?”

태오가 애써 웃으며 소유에게 물었다.


“한이 돼서. 열아홉 살 때 데이트 한번 못 해 본 게. 그래서 이따금 10대처럼 데이트하고 싶을 때가 있어.”

소유가 밝은 햇살 아래 찬란하게 웃었다.

뭐, 교복을 입고 포니테일을 하니 소유는 정말 고등학생처럼 보이기도 했다. 누가 얘를 중견기업을 이끄는 사람으로 볼까.


“넌 귀여운데, 난 좀 징그럽지 않을까?”

“무슨 소리야. 너도 진짜 10대 같아!”

“네 눈에만 그럴 것 같은데요.”

“됐고, 사진 찍자, 태오야. 사진이 남는 거야.”

소유는 무작정 카메라를 들이댔다. 프레임 안에 밀착한 두 얼굴이 나타나자 태오는 마지못해 미소를 지었다.


 


“김치. 더 활짝 웃어.”

예쁘고 잘생긴 선남선녀가 청춘 영화 한 편을 찍고 있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 쳐다보고 지나갔다.


“아, 그리고 오늘 규칙이 하나 더 있어.”

“또? 그래. 이렇게 된 거, 부인 마음대로 하세요.”

반쯤 포기한 태오는 소유가 원하는 걸 모두 들어주리라 다짐했다.

너만 행복하다면…… 나는 됐어.


“오늘은 날 Hazel이라고 불러.”

영어 이름은 그들을 그때 그 시절로 돌려보내는 주문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건 마음에 드네.”

태오가 소유의 팔에 어깨를 올렸다. 그러니 진짜 평범한 10대 커플처럼 느껴지는 것 같았다. 믿거나 말거나.

소유는 눈을 반짝이며 놀이기구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주말이라 사람이 많아서 웬만한 건 다 줄이 길었다.


“나 유성 급행 타고 싶은데, 여기서 제일 줄 기네. 기다리기 힘들겠지?”

“난 괜찮아. 너 괜찮으면 줄 서자.”

“진짜?”

하루를 분 단위로 쪼개 쓰는 태오는 줄을 서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선뜻 먼저 제안해 주니 소유는 날아갈 듯 기뻤다.

소유는 태오의 품에 폭 안겨 차례를 기다렸다.


“이렇게 줄 기다리는 것만 해도 너무 행복해.”

“너 좋아하는 거 보니까 종종 와야겠네. 둘이서.”

“진짜?”

“대신 그땐 정상적인 모습으로 오자. 이런 꼴로 기사 나고 싶지 않거든.”

저토록 싫어하면서 제 고집을 고분고분 따라 주는 태오가 그저 예뻤다.


“사랑해, Noah.”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라 결혼할 때부터.”

태오는 제 볼을 간지럽히는 소유의 토끼 귀를 앙 깨물었다가 놓았다. 줄이 줄어드는 속도는 아주 더뎠지만 둘이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그것도 그것대로 즐거워 데이트의 한 장면이 되었다.

그러다 소유의 시선이 지나가는 아이의 아이스크림을 따라갔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눈치 빠른 태오가 물었다. 소유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거짓말. 혼자 줄 설 수 있지? 금방 갔다 올게.”

“진짜 괜찮은데.”

태오를 귀찮게 하기 싫어 만류했지만, 어느새 그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아이스크림 가판대로 걸어갔다.

목을 쭉 빼고 태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허전해진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노아 앞에서는 어린 소녀처럼 이렇게 두근대네. 이건 그저 교복을 입어서가 아닌 듯했다.

빨리 와라. 빨리 와라.

헤어지자마자 보고 싶어져 속으로 주문을 외우고 있는데, 그 순간 태오가 아닌 낯선 인영이 소유 앞으로 쭈뼛쭈뼛 나타났다.


“저기…… 제가 이런 적은 처음인데.”

“네?”

소유가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처음인데요. 너무 이상형이라서. 고등학생이세요? 저도 고등학생인데, 혹시 번호 좀 줄 수 있을까요?”

나이 서른 넘어서 고등학생한테 번호를 따이다니.


“아, 남자 친구 없으시면요! 저 이상한 사람 아니거든요.”

우물쭈물하는 어린 학생을 보던 소유가 미안한 듯 말했다.


“남자 친구는 없는데, 남편이 있어요.”

“……네?”

이번엔 학생의 눈이 동그래졌다.

태오 오기 전에 얼른 보내야지, 라고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저 멀리서 아이스크림 두 개를 든 채 이글이글 타오르는 시선을 보내는 태오가 보였다.

그래도 소유가 교육해 둔 게 있어 이전처럼 무작정 달려들진 않았다.

소유가 시선을 보냈다.

기다려. 참아. 얘 미성년자야. 착하지. 옳지.


“애도 있어요.”

“네?!”

학생의 목소리 톤이 높아지더니, 얼굴이 시뻘게졌다. 미안해라. 소유가 양손을 모았다.


“애 엄마예요.”

“말도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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